지자체가 살려낸 이재명 ‘毛퓰리즘’...암환자協 “암보다 탈모지원 충격적”

조백건 기자 2023. 5. 10. 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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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대선 때 공약한 탈모 지원
“건보 재정 파탄” 비판에 흐지부지
일부 지자체들 최근 앞다퉈 실시

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지난 대선 때 탈모 치료비는 물론 중증 탈모인에겐 모발 이식 비용까지 건강보험 재정으로 지원하겠다고 했다. 이 대표는 “탈모 약 (건강)보험 적용 확대에 700억~800억원이면 된다”고 했다. 그러나 당시 의료계에선 “국내 탈모 인구가 1000만명인데 건보 적용 확대로 탈모 약 먹는 사람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 연간 1조~3조원이 들어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건보 재정을 파탄 내는 모(毛)퓰리즘” “탈모가 암보다 급하냐”는 비판도 이어졌다. ‘탈모 지원’은 흐지부지됐다.

그런데 대선 후 지방선거를 거치면서 지자체가 ‘탈모 지원’을 살려냈다. 충남 보령시는 만 49세 이하 시민에게 탈모 치료비를 연 50만원까지 지원하는 사업을 지난달 21일 시작했다. 올해 예산은 2억원이다. 그런데 열흘 만인 이달 1일까지 109명이 지원을 신청했다. 보령시가 예상한 올해 신청 인원인 255명의 거의 절반이 열흘 만에 채워진 것이다. 이 추세라면 “탈모 추경을 편성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이 벌써 나온다고 한다. 보령시 관계자는 “신청자가 시작부터 많이 몰리고 있다”면서도 “추경 단계는 아직 아닌 것 같다”고 했다.

탈모는 질병으로 인한 탈모와 유전적 탈모로 구분된다. 질병과 관련한 탈모 인구는 건강보험공단 통계상 24만여 명이다. 대다수는 유전성 탈모로 추정된다. 그런데 유전성 탈모는 질병 탈모와 달리 건강보험 지원이 안 된다. 매년 약값으로 30만~80만원을 본인이 부담한다고 한다. 올해부터 충남 보령시와 서울 성동구 등 일부 지자체가 ‘청년 탈모’ 지원 사업을 시작하자 ‘탈모비 청구 폭증’ 사태가 벌어지는 것이다. 여야 구분 없이 지자체 단체장과 의원 등은 지방선거를 거치며 표를 얻으려고 ‘탈모 지원’을 공약으로 내건 경우가 많았다. 한성호 동아대병원 가정의학과 교수는 “탈모 치료비 지원 같은 정책을 실시하면 수요가 폭발해 예산이 감당 못 할 수준이 될 것”이라며 “다른 지자체도 경쟁적으로 도입할 우려가 있다”고 했다.

국내 지자체 중 처음으로 ‘청년 탈모’ 지원 사업을 시행한 서울 성동구에서도 신청자가 쇄도하고 있다. 성동구는 예산 1억6000만원을 들여 지난 3월부터 만 39세 이하 구민에게 연간 최대 20만원을 지원하고 있다. 3~4월 두 달간 346명이 지원했다. 올해 예상 신청 인원(700~800명)의 절반가량이 이미 찬 것이다. 성동구 관계자는 “시행 첫 달인 3월에만 255명이 몰려 정말 바빴다”고 했다.

다른 지자체들도 가세하고 있다. 서울 은평구는 올 하반기부터 만 39세 이하 구민을 대상으로 연간 30만원까지 탈모 치료비를 지원하는 사업을 계획 중이다. 은평구 관계자는 “치료비 지원이란 현금성 지원이 아닌 탈모 예방 교육 등 다른 대체 방안들도 함께 검토 중”이라고 했다. 대구시도 내년부터 ‘청년 탈모’ 지원 사업을 하려고 한다. 작년 말 39세 이하 시민 중 탈모증 진단을 받은 사람에게 치료비 일부를 지원하는 ‘청년 탈모 지원 조례안’이 시의회를 통과했다.

부산시 사하구의회도 이달 3일 더불어민주당 강현식 구의원이 대표 발의한 ‘청년 탈모 지원 조례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34세 이하의 탈모 치료 비용 일부를 지원한다는 내용이다. 사하구청은 이르면 내년부터 이 조례안에 따라 탈모 지원 사업을 시행할 계획이다.

탈모 치료비를 지원해야 한다는 논리는 “탈모는 청년들에게 취업·연애는 물론 일상생활에 고통을 주는 사회적 질병”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형평성과 시급성 측면에서 논란이 많다. 서울의 한 대형 병원 피부과 교수는 “청년 탈모 치료비를 지원하면, 여드름이나 시력 교정 수술(라식·라섹) 치료비도 지원해 달라는 요구가 터져 나올 것”이라며 “의료 포퓰리즘 성격이 강한 것 같다”고 했다.

문재인 정부가 초음파와 MRI(자기공명영상) 촬영에 건강보험을 확대 적용하자 4년 사이 초음파·MRI 진료비가 10배 폭증했다. 2018년 1891억원에서 2021년 1조8476억원으로 뛰었다. 정권이 인기 영합적인 의료 정책을 펼칠 경우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여실히 보여준 것이다.

‘탈모 지원’이 늘자 한국암환자권익협의회는 지난 3월 입장문에서 “최근 지자체들의 탈모 치료비 지원 소식은 충격적”이라며 “중증·희소 질환 환자들은 지금도 약값이나 치료제가 없어 생명을 놓고 있다”고 했다. 이 협회 김성주 대표는 “지자체가 중증·희소 질환자에게는 어떤 지원 사업을 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고 했다.

‘탈모 지원’에 제동을 거는 경우도 있다. 서울시의회는 지난 3월 민주당 주도로 서울에 사는 39세 이하 시민에게 최대 67억원의 예산을 투입해 탈모 치료비를 대주는 조례안을 통과시키려다 반대에 부딪혀 조례안 심사를 보류하고 있다. 당시 민주당 소속 시의원들은 “(탈모 지원) 찬성 여론이 상당히 높을 것”이라며 조례안 처리를 밀어붙였다.

관가에선 내년 총선을 앞두고 ‘탈모 지원’ 같은 의료 포퓰리즘적 공약이 정치권에서 쏟아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국민의 의료 서비스 이용은 계속 증가할 수밖에 없다”며 “건보 재정 위기를 막으려면 국민 부담을 늘려야 하는데 걱정”이라고 했다. 이 관계자는 “현재 (탈모 인구에 대한) 건보 재정 지원은 검토할 계획도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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