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길어 힘나는 골잡이 “우승하면 자를게요”
“4부 리그에서 뛰던 시절 일요일에 축구를 하고 월요일엔 이삿짐을 날랐어요. 그러다 허리를 다쳤고, 좀 더 축구에 집중해서 진정한 프로가 되어야겠다는 오기가 생겼습니다.” 그래도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인생을 배웠다. 평범한 사람들이 본인 직업에 자부심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축구를 하는 데 큰 동기부여가 됐다고 한다.
올 시즌 프로축구 울산 현대의 선두 질주를 이끄는 스웨덴 공격수 구스타브 루빅손(30) 얘기다. 이번 시즌을 앞두고 울산 유니폼을 입은 그는 주로 왼쪽 공격수로 나서며 5골을 터뜨리며 FC서울 나상호(27·8골), 울산 주민규(33·6골)에 이어 득점 3위를 달린다. 슈팅 17개 중 11개를 유효 슈팅으로 연결해 다섯 번 골망을 갈랐다.
루빅손의 결정력은 K리그 2연패(連覇)를 노리는 울산의 ‘신형 무기’로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홍명보 울산 감독은 “루빅손은 득점 능력뿐 아니라 상대를 압박하는 스피드가 뛰어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루빅손은 울산 입단 때부터 스웨덴 7부 리그에서 1부까지 올라간 ‘인간 승리 드라마’로 화제를 모았던 ‘대기만성형’ 선수다.
묄니케(7부→6부), 세베달렌스(5부→4부), 외리뤼테(2부), 함마비(1부)를 거치며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올라갔다. 어린 시절 왜소한 체격으로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는 그는 하부 리그에 있을 땐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축구와 일을 병행해야만 했다. 안경 공장, 신문 보급소, 스포츠 용품점, 포장 이사 업체 등이 그의 직장이었다.
최근 울산광역시 동구 울산 현대 클럽하우스에서 만난 루빅손은 “많이 뛰는 성실한 선수”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상대 뒤 공간을 쉴 새 없이 파고들어 기회를 잡아내는 걸 즐긴다”고 말했다.
갖은 고생을 하면서도 축구를 포기하지 않았던 원동력을 묻자 그는 “축구를 사랑해서”라고 답했다. “어릴 땐 그저 축구가 재밌었는데 커가면서 동료와 힘을 합쳐 승리를 따내고, 때론 동료를 위해 싸우면서 느끼는 뜨거운 감정에 매료됐습니다. 무엇보다 내가 좋아하는 축구를 하는데 많은 팬의 응원까지 받으니 ‘최고의 직업’인 거죠.”
K리그처럼 춘추제(봄에 시작해 가을에 종료)인 스웨덴 리그를 꾸준히 관찰하던 울산 구단은 2022시즌을 앞두고 함마비에서 활약 중인 루빅손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당시엔 이적료가 비싸 계약이 이뤄지지 못했는데 1년 새 재정 상황이 나빠진 함마비가 울산과 다시 협상에 나서면서 루빅손은 올 시즌 한국 프로축구 무대를 밟게 됐다.
그는 울산이 자신에게 관심을 보인다는 사실을 알고 지난 시즌 울산 경기를 자주 챙겨봤다고 했다. 울산이 K리그 우승으로 가는 과정은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K리그엔 기술이 좋은 선수가 정말 많습니다. 전쟁처럼 치열하게 맞부딪치면서도 이기적인 선수는 찾아보기 어렵죠. 유럽 사람들에게 꼭 K리그를 보여주고 싶습니다.”
카메라 앞에서 동작이 너무 자연스럽길래 “포즈가 모델 같은데요?”라고 묻자 차랑차랑한 긴 머리를 질끈 묶던 그가 씩 웃었다. “아버지가 사진작가시거든요. 한창 광고 사진을 찍을 때 어린 저를 공짜 모델로 많이 쓰셨죠.”
그의 어머니는 카피라이터. ‘축구 DNA’를 어디서 물려받았을까 궁금했는데 의문은 곧 풀렸다. “외증조부(로베르트 잔더)가 1920년 안트베르펜올림픽에서 스웨덴 주전 골키퍼로 활약하셨습니다. 4년 뒤 파리올림픽에선 후보 골키퍼로 동메달을 따셨고요.”
루빅손은 재작년 겨울 휴가 때 받은 전화를 잊지 못한다. 스웨덴 국가대표팀에 처음으로 발탁됐다는 소식이었다. 하지만 코로나 확산으로 대표팀 동계 훈련이 전면 취소되면서 루빅손은 결국 대표팀 유니폼을 입진 못했다. 그 뒤론 아직 기회가 없다. “실망이 컸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았어요. 코로나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제 문제는 작은 아픔에 불과했으니까요.”
루빅손은 한국식 쌀밥에 불고기를 즐기며 한국 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다. 지난 3월 강원 원정을 떠났을 때는 경기장 위치를 GPS로 찍어주자 북한과 너무 가깝다며 가족들이 걱정한 일도 있었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놀란다는 루빅손은 한반도 정세를 이해하려고 관련 뉴스를 부지런히 찾아보고 있다.
그의 트레이드마크는 긴 머리. 사진 촬영을 위해 풀어헤치니 ‘바이킹 전사’가 따로 없었다. “고교 졸업 후 축구를 1년 쉬는 동안 스키와 서핑을 즐기면서 히피 스타일로 길렀죠.” 머리가 짧아지면 좋은 경기력이 나오지 않을까 봐 손도 안 댄다는 그가 과감하게 우승 공약을 내걸었다.
“제가 스웨덴에서 우승을 해 본 적이 없거든요. 올 시즌 울산이 K리그 정상에 오르면 머리를 자르겠습니다!”
/울산=장민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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