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최원준의 음식문화 잡학사전] <14> 기장 대변 멸치 밥상의 변화
- 회로, 구이로, 찌개로, 초밥으로
- 상차림 이전보다 훨씬 다양해져
- 부산 정체성 담긴 대변 멸치음식
- 시대 따른 조리변화 받아들이되
- 토속음식 계승 노력도 존중돼야
멸치. 한때 멸치는 성질이 급해 물에서 나오면 바로 죽어버린다고 ‘멸치(滅致)’, 작고 보잘것없는 생선이라고 ‘멸치(蔑致)’라 불린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의 멸치는 우리 밥상에 없어서는 안 될, 다양한 쓰임새로 요긴하게 쓰이는 음식재료 중 하나이다. 멸치는 새우젓과 더불어 우리나라 대표 젓갈용 생선으로, 김치를 담글 때 꼭 필요한 조미용 액젓과 밥도둑으로 정평이 난 육젓 등을 만드는 재료이다. 이외에도 작은 멸치는 말려서 볶아 먹거나 조려 먹고, 큰 멸치는 말려두었다가 육수용으로 쓴다. 생멸치로는 다양한 음식을 만들어 먹는다.
▮‘멸치밥상’의 다채로움
부산시 기장군 대변항에서는 생멸치를 갖은 채소와 초장에 비벼 낸 ‘멸치회’, 큰 멸치 몇 마리 넣고 팔팔 끓여낸 ‘멸치찌개’, 석쇠에 자글자글 구워낸 ‘멸치구이’, 칼칼한 양념으로 자작하게 조려낸 ‘멸치조림’, 멸치를 밥과 함께 상추에 크게 한 쌈 싸서 먹는 ‘멸치 쌈’ 등의 음식으로 조리해 먹는다. 이처럼 멸치는 우리 밥상 중앙에 넓고 두툼하게 소용되는 ‘큰 생선’이다.
멸치는 멸치끌그물, 걸그물, 자리그물, 채그물, 죽방렴 등 다양한 어로법으로 잡는다. 크기에 따라 세멸(1.5㎝ 이하), 자멸(1.6~3㎝), 소멸(3.1~4.5㎝), 중멸(4.6~7.6㎝), 대멸(7.7㎝ 이상)로 나뉘며 각각 볶음용, 육수용, 젓갈용으로 쓰인다.
부산 기장군 대변에서는 걸그물(자망) 어업으로 멸치를 잡는데, 특히 배 한 척으로 물길 따라 멸치 떼의 흐름을 보고 그 길목에 그물을 드리워 잡는 흘림걸그물(유자망) 어업이 대세다. 그렇게 잡은 멸치는 크기 10~15㎝의 젓갈용 대멸로, 전국 생산량의 60~70% 이상을 차지한다. 지난해부터 필자는 한 공중파 방송의 음식문화 관련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주로 부산·경남 지역 토속음식의 기원과 음식재료 활용, 독특한 조리법 등을 소개한다. 얼마 전 대변항의 ‘대변 멸치’를 소개하기 위해 멸치 음식 전문 식당을 찾았다가 적이 놀랐다. ‘대변 멸치 밥상’의 변화무쌍함이 생각보다 드넓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멸치로 조리되는 상의 차림이 이전보다 훨씬 다양해졌다. 전에는 멸치회와 멸치찌개 멸치구이 정도였다면, 지금은 멸치조림 멸치튀김 멸치초밥 등이 추가되었다. 예전에는 멸치회면 멸치회, 멸치찌개면 멸치찌개 등 단품으로 멸치 음식을 즐겼다면, 지금은 이 멸치 음식을 조금씩 모두 맛보는 ‘코스요리’가 대중화됐다.
이는 산지에서 바로 잡은 싱싱한 식재료로 지지고 볶고 끓여 먹고 구워 먹고 날로 먹고 싶어 하는 소비자의 ‘미식 욕망’에서 기인한다. 부산시가 내심 추구하는 ‘미식 도시’로서 부산 모습과도 잘 맞는다. 게다가 부산에 온 관광객이 부산을 오롯하게 맛보고자 하는, ‘미지 음식’에 대한 바람과 교차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대변항의 다양한 차림의 멸치 밥상은 이런 ‘맛의 욕망’에서부터 시작한 것이다.
▮‘부산의 맛’ 아어가야
다양한 ‘멸치 음식 망라’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동시에 내보인다. 긍정적인 점은 기장 사람들이 늘 먹어왔던 멸치 음식부터 다른 지역 조리법의 멸치 음식, 최근 소비자 입맛에 맞춘 퓨전 멸치 음식에 이르기까지 시대적으로나 조리 형식 면에서나 비교적 다양한 음식 스펙트럼을 형성한다는 대목이다.
부정적인 점은 멸치 음식 난립으로, 어느 것 하나 충실하게 집중하지 못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와 멸치 본연의 맛을 간과할 개연성이 크다는 데서 온다. 기장 지역에서 오래도록 내려오는 멸치 음식의 소실이나 변질에 대한 걱정이다.
1972년 나온 ‘한국 민속 종합 조사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기장 고유의 멸치 음식을 소개한다. “7~8월에 잡는 길이 10㎝ 되는 생멸치를 소쿠리에 담고 녹두알만 한 자갈을 한데 넣어 흐르는 물속에서 흔들면 멸치의 은빛이 벗겨지고 살이 발갛게 드러난다. 이 멸치를 술지게미 푼 물에 잠깐 담갔다 건지면 기름기가 빠진다. 멸치 한 마리씩 대가리를 붙들고 두 쪽으로 죽 찢어 뼈를 발라낸다. 베보에 차곡차곡 겹쳐 싸서 맷돌로 잠시 누르면 짝 붙는다. 이 회는 쑥갓과 곁들여 초고추장을 찍어 먹는다.”
또 하나. 대변 해안가에는 요즘도 가끔 아낙들이 멸치 배를 따서 건조대에 말리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이렇게 말린 멸치를 기장 사람들은 굽거나 조리거나 찌개로 만들어 먹었다. 그러나 생멸치 음식에 의해 이마저도 점차 밀려나는 추세이다. 이렇게 기장 사람들이 오래도록 먹어온 토속음식이 시대적으로 밀려나 머지않은 미래에 사라질 수도 있다는 점이다. 어쨌든 이번에 체험한 대변 멸치 음식을 통해 멸치 음식 또한 부산의 정체성을 담고 있다는 점을 확인했다. 특히 다른 지역 음식과 음식문화를 수용하고, 부산이란 공동체 안에 편입하는 과정이 그렇다. 한 사례로 몇 년 전 국제신문 영상팀과 술 한 잔 앞에 두고 지역의 음식문화를 기탄 없이 이야기하는 유튜브 콘텐츠 ‘애주시인의 먹방로드’ 프로그램을 진행한 적이 있다. 그때 ‘대변 멸치’ 편을 촬영하던 중 식당 안주인이 내어 준 멸치 음식에 깜짝 놀랐다. 그 음식은 울산 사람인 친정어머니에게서 내림했다는 ‘멸치식해’였다.
식해는 주로 함경도 강원도 경북 등 동해 지역에서 널리 발달한 음식이다. 소금 생산이 많은 서남해 지역이 생선을 소금에 절여 염장 발효한 ‘젓갈문화권’이라면, 상대적으로 소금이 귀한 동해는 쌀이나 기장 조 등 곡물로 발효시킨 ‘식해문화권’으로 구분해 볼 수 있겠다.
부산은 ‘젓갈 문화권’에 속한다. 곰삭은 멸치젓갈을 밥 위에 걸쳐 먹으며 궁극의 구수함, 맛의 절정을 느끼는 곳이다. 멸치젓갈의 메카인 기장 대변에서 멸치식해라니…. 아무튼 멸치식해를 한 점 입에 넣고 탄성이 절로 났다. 풍부한 감칠맛과 끝없이 이어지는 향기로운 산미, 부드럽게 살아있는 식감과 풍부한 풍미의 육즙…. 이때 생각한 것이 대변은 명실공히 멸치의 본산, 멸치 음식의 본향이라 할 만하다는 것이었다. 한 식재료로 두 발효 문화가 함께 공존하는 지역이 또 어디 있던가? 부산은 참 ‘다양성의 도시’란 것을 새삼 느낀 대목이다.
멸치의 고장, 대변. 이곳의 멸치 음식이 다양한 변주, 새로운 변신을 하고 있다. ‘미식 도시, 부산’의 면모를 잘 반영하는 일례이기도 하고, 부산 정체성 중 대표적 키워드인 ‘개방성’과 ‘수용성’이 제대로 반영된, 부산 음식 정체성의 발현이기도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가 오로지 관광객을 위한 변화이거나 보여주기식 차림으로 정착한다면 부산의 오롯한 음식문화를 외지인에게 제대로 전해주지도 못할뿐더러, 우리 고유의 향토음식 보존에도 걸림돌이 될 것이다.
시대에 따르는 새로운 음식 개발과 사람 입맛에 맞춘 조리법의 변화는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와 더불어 음식 하나하나에 그 지역만의 음식문화와 독특한 조리법을 계승하고자 하는 노력 또한 존중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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