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尹·기시다, 盧·고이즈미의 실패를 넘어서라

이하원 논설위원 2023. 5. 10.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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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한일 셔틀 외교 실패
교훈 얻어 ‘플랜 B’ 만들어야
CVID 방식의 과거사 해결하며
노벨 평화상에도 도전해보라

2004년 7월 제주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 기자회견장. 나란히 등장한 노무현 대통령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는 정장 대신 밝은색 콤비를 입고 있었다. 넥타이도 매지 않았다. 노 대통령이 고이즈미 총리가 지켜보는 가운데 복장만큼 파격적인 선언을 했다. 자신의 임기 내에 한일 간 과거사 문제는 공식화하지 않겠다고 한 것이다. “(과거사) 합의를 이루기 어려워 공식 의제나 쟁점으로는 제 임기 동안엔 제기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2003년 일본 국빈(國賓) 방문 때 “모든 문제를 다 후벼 파는 것이 후손들을 위해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한 것에서 더 나아간 것이었다.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7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소인수 회담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2023.5.7/ 대통령실

2004년 제주 회담 당시는 한국 드라마 ‘겨울연가’가 일본에서 인기가 있을 때였다. 노무현은 회담 중에 이 드라마가 화제에 오르자 고이즈미에게 “오늘 우리 둘이서 ‘여름연가’ 한번 찍어 보자”고 말하기도 했다.

같은 해 12월 노무현은 일본 가고시마현 이부스키의 온천을 셔틀 외교차 방문했다. 그는 “한국은 아버지, 일본은 어머니의 나라”라고 말하는 도공 15대 심수관을 고이즈미와 함께 만나 양국 관계를 한 걸음 더 진전시키는 사진을 남겼다.

취임 1주년을 맞은 윤석열 대통령은 한일 관계에서는 집권 초기의 노무현을 닮았다. 2018년 대법원 판결 이후 양국 관계를 숨 막히게 했던 징용 문제에 대해 한국이 우선 배상, 단칼에 해결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일본 정부에 과거사 관련해 어떤 요구도 하지 않은 채 도쿄를 방문, 20년 전의 노무현처럼 일본 지식인 사회를 감동시켰다. 7일 기시다 일본 총리가 답방하자 “과거사가 완전히 정리되지 않으면 한 발자국도 내디딜 수 없다는 인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다시 강조했다.

문제는 노무현·고이즈미 관계가 영속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두 정상의 관계는 일본 시마네현의 ‘다케시마의 날’ 조례, 역사 교과서 왜곡 등으로 틀어져 버렸다. 노무현은 2005년 원고지 30매 분량의 ‘국민에게 드리는 글’에서 “(양국이) 서로 얼굴을 붉히고 대립하는 일도 많아질 것”이라며 “이번에는 반드시 (역사 왜곡의) 뿌리를 뽑도록 하겠다”고 분노했다. 그것으로 두 정상 관계는 끝이었다. 그 이후는 독도 주변 해역에서 충돌 위기를 거치며 악화일로였다.

지난 1년간 신뢰를 쌓아온 윤 대통령과 기시다 총리는 웃으며 출발했던 노무현·고이즈미 관계가 비극으로 끝난 것에 주목해야 한다. 특히 우리는 일본이 과거처럼 또다시 갈등을 야기할 경우,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치밀하게 전략적으로 대응하는 ‘플랜 B’ 시나리오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마이크 폼페이오 전 미 국무장관은 최근 본지 인터뷰에서 “한일 (정상의) 셔틀 외교 재개는 양국 관계가 전환되는 일대 사건”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미국뿐만 아니라 인도, 호주, 베트남,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 전 세계 모든 사람에게도 유익한 일”이라고도 했다. CIA 국장을 지냈고 차기 미 공화당 대선 후보로도 거론됐던 그의 발언은 과장이 아니다. 한일의 화해와 항구적인 협력은 중요한 전환점을 만드는 세계사적인 사건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동안 북핵 문제 해결 방법으로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해체’를 의미하는 ‘CVID(Complete Verifiable Irreversible Dismantlement)’가 자주 쓰여왔다. 윤석열·기시다 커플이 한일 과거사 문제를 CVID 방식으로 해결하고 미래로 나아가는 길을 확고히 닦으면, 동아시아 평화에 기여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 후보 명단에 오를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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