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수의 오마이갓] 국사·왕사는 아니었지만… ‘직지’로 세계사에 기록된 백운 화상

김한수 종교전문기자 2023. 5. 10.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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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과 파리에서 백운 화상 관련 유물 동시에 전시 중
불교중앙박물관에 전시된 장곡사 불상 발원문 중 백운화상의 사인(수결). '직지'의 저자인 백운 화상의 초상화는 남아있지 않다. /불교중앙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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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중앙박물관서 장곡사 불상과 복장유물전

지금 서울 조계사 옆 불교중앙박물관에 가시면 677년 전 고려시대 한 스님의 ‘사인’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박물관에서는 6월 25일까지 ‘만월의 빛, 정토의 빛’ 특별전이 열리고 있는데, ‘만월의 빛’ 전시실에서 그 사인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인은 그림처럼 보입니다. 얼핏 말풍선처럼 보이는 건 한자로 ‘白’, 그 밑에 물결이 흐르는 것처럼 보이는 글자는 ‘雲’입니다. ‘백운(白雲)’입니다. 이 사인(수결)은 충남 청양 장곡사 금동약사여래좌상 내부에서 나온 발원문에 적혀 있습니다. 길이가 10미터가 넘는 이 발원문은 1346년 장곡사 불상을 조성하게 된 경위를 적고 뒷부분에 모두 1078명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불상을 만드는 데 시주한 이들 이름이지요. 그 발원문을 적은 이가 ‘백운’입니다. 불상 조성 작업을 주도한 스님이지요.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 아닌가요? 맞습니다. 그 이름은 지금 프랑스 파리에서도 빛나고 있습니다. 지난 4월부터 7월까지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에서 열리는 ‘인쇄하다! 구텐베르크의 유럽’ 전에 ‘직지(直指)’가 선보이고 있지요. ‘직지’의 일반 공개는 50년만입니다. 서울과 파리, 두 전시에 동시에 등장하는 이름은 바로 고려말 스님 백운(白雲·1298~1374) 화상입니다. 백운은 법호(法號)이고 법명은 ‘경한(景閑)’입니다. ‘화상(和尙)’은 수행을 많이 한 스님을 높여부르는 표현이고요.

불교중앙박물관 기획전 '만월의 빛, 정토의 빛'에 전시된 장곡사 금동약사여래좌상. '직지'를 저술한 백운 화상이 이 불상을 조성했다. /뉴시스

파리 국립도서관에서는 ‘직지’ 전시

세계 최고(最古) 금속활자 인쇄본인 ‘직지(直指)’의 원래 제목은 ‘백운화상(白雲和尙) 초록(抄錄) 불조(佛祖) 직지심체요절’입니다. 백운 화상이 선(禪)수행과 관련한 역대 조사(祖師)들의 어록을 모은 책입니다. 백운 화상이 저술한 책을 제자들이 금속활자본으로 인쇄한 것은 그가 입적한 이후인 1377년입니다. 지금 불교중앙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장곡사 불상과 발원문은 직지가 인쇄되기 30년 전인 40대 때 백운 화상의 발자취인 것입니다.

3월 14일 오후 불교중앙박물관에서 열린 '만월의 빛 정토의 빛' 기획전 개막식 후 조계종 총무원장 진우 스님(오른쪽 끝) 등 참석자들이 장곡사 불상의 복장유물인 발원문을 살펴보고 있다. 이 발원문은 백운화상이 썼다. /연합뉴스

백운·태고·나옹 선사는 ‘고려말 3대 화상’

그런데 저는 ‘직지’ 외에 백운 화상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기억이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불교중앙박물관 특별전을 보면서 그 이름을 들으니 새삼 반가웠습니다. 그만큼 ‘백운 화상=직지’로만 기억했던 것이지요. 독자 여러분은 어떠신지요. 그러면 태고 보우(普愚·1301~1382)나 나옹 혜근(惠勤·1320~1376) 화상은 어떠신가요? 들어보신 적이 있지 않나요? 이미 생몰연대를 보면서 아셨겠지만 백운, 태고, 나옹 화상은 동시대 스님들입니다. ‘고려말 3대 화상’으로도 불리지요. 나옹 화상의 출생 연도가 두 스님과 20년쯤 늦지만 입적한 때는 비슷하고 생전에 서로 돕고 영향을 주고 받으며 지냈지요. 세속의 관점에서 보자면 백운 스님은 보우·나옹 스님에 비해 덜 유명합니다. 태고, 나옹 화상의 초상화(眞影)는 남아있는데, 백운 화상의 진영은 없습니다.

세 스님 중 가장 젊었던 나옹 스님은 20대(1347~1358년) 때 원나라에 유학하고 1371년엔 왕사(王師)가 됩니다. 나옹 스님은 무학 대사의 스승으로도 유명하지요. 태고 스님은 1346~1348년 원나라 유학 후 1356년엔 왕사(王師), 1371년 국사(國師)가 되지요. 태고 스님은 대한불교조계종의 ‘중흥조(中興祖)’로 꼽힙니다. 태고 스님은 간화선(看話禪·화두를 들고 하는 참선) 수행법을 고려에 도입한 분입니다. 현재 조계종은 기본적인 수행법으로 간화선을 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조계종 스님들은 수행법에 관해서는 태고 스님을 따르고 있는 셈입니다.

장곡사 금동약사여래좌상 발원문. 시주한 사람들의 이름이 적힌 위에 새로 천을 덧대어 이름을 추가해 막판까지 모금을 이어갔음을 보여준다. /불교중앙박물관 제공

태고·나옹 화상은 국사·왕사 역임

이에 비해 백운 스님은 전라도 고부 출신으로 10대에 출가했다는 것 외에는 50대까지 이력이 제대로 전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1351년 원나라에 유학해 약 1년 정도 머물다 귀국합니다. 이미 50대에 접어든 나이였습니다. 원나라에서는 석옥(石屋) 선사라는 임제종 스님 문하에 들었는데요, 석옥 선사는 태고 스님의 유학 시절 스승이기도 합니다. 백운 스님이 유학했던 해는 이미 보우 스님이 석옥 선사에게 법통(法統)을 인정받고 귀국한 3년 후였습니다. 엘리트 코스를 걷고 있었지만 태고, 나옹 스님에 비해 백운 스님은 반 발짝씩 늦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세 스님은 서로 존중하는 사이였던 것 같습니다. 백운 스님은 태고 스님과 나옹 스님의 천거와 소개로 공민왕을 만나기도 하고 주요 사찰의 주지로 임명되기도 했답니다.

백운화상, 1000명 넘는 참여 이끌어 장곡사 불상 조성

기록이 많지는 않지만 백운 스님은 부지런한 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장곡사 불상이 그 증거가 아닌가 합니다. 장곡사 불상을 만들던 1346년은 백운 스님이 원나라로 유학가기 5년 전이었습니다. 스님은 충청도 청양의 사찰에 불상을 만드는 데 1000명 넘는 인원의 참여를 이끌어냈습니다. 시주한 사람 가운데는 공민왕으로 추정되는 ‘바얀테무르(佰顔帖木兒)’란 이름도 있고, 왕족과 관리 등의 이름이 즐비합니다. 발원문엔 시주한 사람 이름을 적은 천이 덧대어 붙어 있기도 합니다. 아마도 스님은 한 사람의 힘이라도 더 참여시켜 훌륭한 불상을 만들려 마지막까지 발품을 팔지 않았을까요. 그렇게 만든 불상과 그 안에서 나온 복장유물들은 국보로 지정돼 있습니다. 백운 화상의 정성이 헛되지 않았던 것이지요.

파리 프랑스국립도서관에서 일반 공개 중인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인쇄본 '직지'. '이사불이' '색공불이' 등 불교 가르침이 적힌 페이지가 펼쳐져 있다. /문화재청

‘직지’는 백운 화상 입적 후 제자들이 금속활자로 인쇄

장곡사 불상과 유물이 백운 화상 생전 업적이라면 ‘직지’는 사후의 업적입니다. 백운 화상의 제자들은 스승의 저술을 1377년에는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본으로 인쇄하고 이듬해인 1378년에는 여주 취암사에서 목판본으로 인쇄했습니다. 직지를 인쇄한 흥덕사는 사라졌지만 지금도 청주의 구(區)이름(흥덕구)으로 남았습니다. 지금 파리 국립도서관에 전시된 ‘직지’는 내용을 볼 수 있도록 펼쳐져 있답니다. 펼쳐진 쪽엔 ‘이사불이(理事不二)’ ‘정난불이(靜亂不二)’ ‘선악불이(善惡不二)’ ‘색공불이(色空不二)’ 등이 적혀 있습니다. 선불교의 핵심 가르침들입니다.

4월 11일(현지시간) 파리 프랑스국립도서관 ‘인쇄하다! 구텐베르크의 유럽’ 전에서 ’직지'가 언론에 공개되고 있다. '직지'가 일반에 공개된 것은 50년만이다. /뉴스1

한편에서는 불상을 잘 조성해 대중들의 신심을 높이려 동분서주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처님 가르침 정수를 올바로 전하기 위해 책을 집필하고 인쇄하는 스님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백운 화상 본인과 제자들은 ‘직지’를 인쇄할 당시에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이 될 것이라는 것도 몰랐을 겁니다. 그리고 그 인쇄본이 훗날 서양으로 건너가 세계인의 주목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도 못 했겠지요. 그저 자신들의 본분에서 최선을 다한 것 아닐까요. 그래서 저는 백운 화상의 생전과 사후의 발자취가 서울과 파리에서 동시에 전시되고 있는 것이 우연만은 아닌 것처럼 느껴집니다. 생전엔 왕사(王師)나 국사(國師)가 아닌 선사(禪師)로서 해야할 일을 묵묵히 하고 제자들까지 스승의 뜻을 잘 모신 결과는 세계사적 업적으로 빛나고 있습니다.

백운 화상은 이런 임종게를 남기고 입적했다고 합니다. 선 수행자다운 임종게입니다.

‘인생 70세는 예로부터 드문 일이다. 77년 전에 와서, 77년만에 돌아간다. 곳곳이 모두 돌아갈 길이요, 모두가 고향이로다. 무엇하러 배와 노를 장만하여 특별히 고향으로 가려 하겠는가. 내 몸이란 본래 없고, 마음 또한 머무는 바 없도다. 재가 되어 사방으로 흩어질 뿐이니, 시주들의 땅을 차지하지 않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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