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하게 증발한 8조원…무거운 ‘책임’만 남았다
SG증권발 주가 폭락 사태로 드러난 라덕연 대표(42) 등의 주가조작 의혹이 일파만파 번지고 있다. 미등록 투자자문업체 H사의 라 대표는 이번 폭락 사태가 발생하기 전 다단계 수법으로 투자자를 모집해 8개 종목의 주가를 수년간 인위적으로 서서히 끌어올렸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주가조작 의혹을 받고 있는 라 대표는 자신의 통정거래 혐의를 부인하며, 김익래 다우키움그룹 회장이 주가 폭락의 배후라고 주장하고 있다. 김 회장은 “주식 매각은 합법적이었다”고 라 대표의 주장에 반박했다.
검찰과 금융당국은 시세조종 여부와 내부정보를 이용한 주식매도 여부를 조사하고 있다. 복잡하게 얽힌 SG증권발 주가폭락 사태를 정리해봤다.
삼천리·세방 등 공통점 없는 8개 종목
지난달 24일부터 며칠간 ‘폭락 사태’
수년간 꾸준히 주가 올랐던 종목들
많게는 10배 이상 뛰는 등 이상 현상
① 사건의 시작: 8개 종목의 하한가
지난달 24일 국내증시에서는 별다른 공통점이 없는 8개 종목(삼천리·서울가스·대성홀딩스·세방·다올투자증권·하림지주·다우데이타·선광)이 장 개장 직후 일제히 하한가(-30%)를 쳤다. 폭락은 며칠간 계속됐다. 특히 서울가스, 대성홀딩스, 선광 등 3개 종목은 24일부터 27일까지 나흘 연속 하한가를 찍었다. 일주일간 증발한 8개 종목의 시가총액은 8조원에 달했다.
8개 종목의 공통점은 24일 외국계 증권사인 SG증권 창구를 통해 대량 매도 물량이 나왔다는 점이었다. 또 증권사에 돈을 빌려 투자하는 신용거래융자 비중도 다른 종목에 비해 높았다. 이후 시장에서는 8개 종목의 폭락에 라 대표가 운영하는 미등록 투자자문사 H사를 중심으로 한 주가조작 의혹이 제기됐다. 8개 종목은 2~3년에 걸쳐 꾸준히 주가가 상승하면서 많게는 10배 이상 뛰었다는 것이다.
② 주가조작 세력의 모집 수법
금융투자업계 이야기들을 종합하면 H사 투자자는 1000여명, 투자금액은 1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투자자 중에는 가수 임창정씨, 박혜경씨 등 연예인을 비롯해 이중명 아난티그룹 전 회장, 국회 공직자윤리위원회 장모 위원 등 정·재계 인사가 포함됐다. H사는 유명인을 투자자로 모집한 뒤 이들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투자자를 늘려왔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투자자 모집 때 다단계 방식을 도입해 새로운 투자자를 소개해주면 돈을 지급하기도 했다는 증언들도 나왔다.
H사 투자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이들은 금융당국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투자자 개인 명의로 개통한 휴대폰과 개인정보를 넘겨받아 주식을 거래했다. H사는 8개 종목에 대해서는 “대주주 지분율이 높은 우량주다. 대주주가 상속할 때 세금을 덜 내려고 일부러 주가를 떨어뜨려 둔 종목들”이라고 투자자들에게 설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유통 주식이 적어 시세조종이 쉬운 종목들을 노린 것으로 풀이된다.
CFD 이용 레버리지 투자 방식
유통 주식이 적은 종목들 ‘타깃’
연예인 등 유명인 먼저 끌어모아
친분 과시하며 몸집 불려온 듯
③ 한순간 하한가 사태…CFD는 무엇?
H사는 투자자 명의로 증권사 계좌를 개설해 최대 2.5배까지의 레버리지 투자가 가능한 차액결제거래(CFD)를 이용했다. CFD는 투자자가 증권사에 증거금을 납입하면 증권사가 투자자 대신 주식을 매입하고 추후에 차액만 정산하는 파생상품이다. 예를 들어 증거금률 50%가 적용되는 종목의 경우 투자자가 증거금 10만원을 내면 증권사가 20만원어치의 주식을 대신 사준다. 주가가 30만원까지 오르면 투자자는 10만원의 이익을 거두고 증권사에 수수료를 납부한다. 투자자로서는 적은 돈으로 큰 이득을 노려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문제는 주가가 하락했을 때는 원금 이상의 손실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또한 주가가 하락하면 증권사는 손실을 메꾸기 위해 투자자에게 추가 증거금을 요구하는데, 투자자가 이를 납부하지 않으면 투자자 대신 사들였던 주식을 임의로 청산하는 반대매매에 들어간다.
이번 하한가 사태는 특정 계기로 해당 종목의 주가가 하락했고, 증거금이 부족하게 되자 증권사들이 반대매매에 나서면서 촉발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라덕연 대표, 통정매매 혐의 부인
“다우키움그룹 회장, 폭락의 배후”
빚더미 앉은 투자자들 “난 피해자”
거래 방식 인지하고 있었다면 공범
④ 라덕연은 왜 김익래 회장을
주가조작 의혹을 받는 라 대표는 통정매매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정상적인 투자를 해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오르기만 하던 8개 종목이 갑자기 하한가로 돌아선 배후세력이 있다”며 “이번 하락으로 인해서 수익이 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범인이 아닐까 생각을 한다”고 했다. 라 대표는 김익래 다우키움그룹 회장을 직접 겨냥했다.
김익래 회장은 폭락이 시작되기 2거래일 전인 지난달 20일 다우데이타 주식 605억원어치를 블록딜(시간 외 대량 매매)로 매각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김 회장이 다우데이타 폭락에 대한 정보를 미리 알고 주식을 매각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된다.
라 대표는 김 회장이 제3자와 공모해 주가를 떨어뜨렸다고 주장하고 있다. 라 대표는 최근 경향신문과 통화하면서 “김 회장의 다우데이타 주식 600억원어치를 매수한 제3자가 이를 장중에 낮은 가격에 팔아버리면서 주가가 떨어졌다”며 “제3자는 사실은 상속세 절약을 위해 주가를 떨어뜨리려는 김 회장과 한 몸일 것”이라고 말했다. 주가조작의 책임이 자신이 아닌 김 회장에게 있다는 뜻이다.
증권가에서는 라 대표의 주장에 대해서 김 회장에게 책임을 떠넘기며 시간을 벌기 위한 전략이 아니냐는 시각이 강하다. 김 회장도 라 대표의 주장에 반박했지만, 논란이 계속되자 지난 4일 기자회견을 열고 회장직에서 사퇴하겠다고 밝혔다. 605억원의 주식 매각 대금은 사회에 환원하기로 했다. 다만, 김 회장은 사퇴하면서도 “주식 매각은 합법적이었다”고 강조했다.
과거 주가 상승 때 ‘세력 움직임 파악’
폭락 때 내부정보 이용 매도 여부 관건
식당 등 운영한 H사 ‘돈세탁 혐의’ 주목
금감원은 ‘증권사 CFD 운용 문제’ 조사
⑤ 투자자들은 ‘피해자’일까 ‘공범’일까
H사의 투자자들은 “나는 거액의 손실을 본 피해자”라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투자자들은 H사에 휴대폰과 개인정보를 맡긴 후 거래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고 강조하고 있다. 한 투자자는 경향신문과 통화하면서 “휴대폰과 개인정보를 넘겼고, 나는 하한가 사태가 일어나기 전까지 증권사 계좌 비밀번호도 모르고 있었다”고 말했다.
H사에 투자한 것이 알려진 가수 임창정씨도 지난달 27일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저의 자금을 이들에게 투자해서 큰 손해를 보았을 뿐 다른 투자자들에게 주식과 관련하여 어떠한 유치나 영업행위를 하지 않았다”고 글을 올렸다. 현재 일부 투자자들은 라 대표를 사기죄로 고소한 상태다.
하지만 금융투자업계와 법조계에서는 거래에 관여하지 않았더라도 통정거래 사실을 인지하고도 돈을 맡겼다면 투자자들도 자본시장법 위반으로 처벌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H사가 어떻게 투자를 하고 있는지 알고 투자금을 맡겼다면 투자자들도 공범으로 볼 수 있다”고 밝혔다.
현재 서울남부지방검찰청과 금융위원회 합동수사팀은 H사의 통정매매 혐의에 대해 조사 중이다. 이외에도 H사는 골프아카데미와 헬스장·식당·온라인 매체를 운영하면서 투자자들에게 수수료 명목의 결제를 유도해 돈세탁을 했다는 혐의도 받고 있다.
금융감독원은 키움증권을 시작으로 증권사들의 CFD 운용 과정에 문제가 없었는지 조사하고 있다. 금감원은 증권사가 CFD 관련 규정을 지켰는지 외에도 내부 임직원의 연루 여부 등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김익래 회장의 연루 의혹도 들여다볼 예정이다.
향후 이번 주가조작 사태와 관련해서는 △ 8개 종목이 오르는 동안 주가조작이 있었느냐와 △ 8개 종목이 폭락할 당시 내부정보를 이용한 매도가 있었느냐 여부가 수사의 핵심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박채영 기자 c0c0@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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