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한국인 원폭희생자 위령비
고종의 손자 이우(1912~1945) 공은 2차 세계대전 막바지이던 1945년 7월 일본 육군 중좌(중령)로 히로시마 제2총군에 배속됐다. 그해 8월6일 아침 영내로 출근하던 중 그의 머리 위에서 굉음과 함께 섬광이 번쩍였다. 그는 목과 얼굴에 화상을 입고 발견돼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이튿날 숨졌다. 이우 공은 미국의 핵 공격으로 숨진 조선인 수만 명 중 한 명이다. 당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는 조선인이 많았다. 전시동원체제하에 징용된 군인이나 군속, 강제 연행되거나 이주한 노무자들이었다. 한국원폭피해자협회는 조선인 원폭 피해자가 약 7만명(히로시마 5만명, 나가사키 2만명)에 이르고 그중 1945년 말까지 약 4만명이 숨진 것으로 추정한다. 일본인 사망자 14만명에 비해 결코 적지 않다.
하지만 이들이 겪은 비극은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았다. 일본에서는 이들의 존재가 일본의 ‘가해자’ 면모를 드러내 불편하게 여겨졌고, 한국에서는 원폭이 해방을 가져다준 사건으로 기억됐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한일청구권협정에서도 다뤄지지 않았다. 어느 쪽 정부도 돌보지 않는 가운데 한국인 생존자와 유족들은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 싸워야 했다. 평화운동을 하는 일본 시민들만 관심을 가졌을 뿐, 외로운 싸움이었다. 이들의 노력 끝에 1970년 4월 ‘한국인 원폭희생자 위령비’가 세워졌다.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밖, 이우 공이 피폭된 자리를 택했다. 일본 정부가 이 위령비를 평화기념공원 내에 세우는 걸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위령비가 공원 내로 옮겨진 것은 1999년 7월이다. 오부치 게이조 일본 총리가 그해 8월6일 히로시마를 찾았다가 위령비 이전 소식을 듣고 즉석에서 헌화를 결정했다.
한·일 정상이 오는 19~21일 히로시마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때 한국인 원폭희생자 위령비를 함께 참배한다고 한다. 놀랍게도 한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이다. 대통령실은 일본 측이 먼저 제안해 이뤄지는 참배라고 했다. 한국 측은 이 문제엔 애초 큰 관심이 없었다는 투로 들렸다. 이것이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일본의 우회적 사과인지는 지켜봐야 한다. 정치적 활용에 그치지 않고, 한국 정부가 피폭자 문제에 더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기 바란다.
손제민 논설위원 jeje1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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