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한 인연에 흔들리는 가족·여성… 절망의 순간도 지나간다”
가난으로 인한 삶의 무게·외도 가정 등
희망 쉽게 허락 않는 시대 속 인물 주목
지난 6년여간 발표한 단편 10편 묶어
“목소리 안 커도 이야기 전할 수 있어
시야 넓어져… 좋은 소설 계속 쓰고파
사라지지 않는 작가였으면 좋겠다”
“너를 보내는 들판에 마른 바람이 슬프고 내가 돌아선 하늘에 살빛 낯달이 슬퍼라 오래토록 잊었던 눈물이 솟고 등이 휠 것 같은 삶의 무게여 가거라 사람아 세월을 따라 모두가 걸어가는 쓸쓸한 그 길로.”
옛 노래를 키워드로 몇몇 작가들과 앤솔로지 작품집을 내기로 의견을 모으자, 소설가 김이설은 임희숙의 노래를 떠올렸다. 노래 가운데 등이 휠 것 같은 삶의 무게, 라는 부분에서 마음이 멈춰 섰다. 짐이 연상됐고, 이삿짐센터에서 일하며 힘겹게 사는 여성이 터벅터벅 걸어 나왔다. 평생 고단하게 사는 여성, 하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여자, 그래서 손톱이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여성이….
“창밖이 허옇게 밝아오고 있었다. 두 시간 뒤에는 집을 나서야 했다. 한숨도 자지 못한 유순은 온몸이 부서질 것 같았다. 하루가 너무 길었다. 노모의 쌀 씻는 소리가 천연덕스럽게 들렸다. 새벽부터 매미가 울어댔고, 유순은 아까부터 피가 맺힌 줄도 모르고 거스러미를 뜯어내고 있었다.”(325쪽)
소설가 김이설이 단편 ‘긴 하루’를 비롯해 지난 6년간 발표한 단편 10편을 묶은 소설집 ‘누구도 울지 않는 밤’(문학과지성사)을 들고 돌아왔다. 그의 네 번째 소설집.
소설집은 다양한 이유와 사연으로 지층부터 흔들리고 있는 가족, 특히 여성들의 이야기를 사실적으로 담고 있다. 가족과 여성들의 위기는 구성원의 외도, 천형 같은 가난, 피할 수 없는 성격 차이뿐 아니라 사회구조적 환경 때문에 점점 더 심각해진다. 지옥 같은 현실에서 빠져나갈 희망은 쉬이 허용되지 않는다.
김이설이 이번 소설집에서 그리고 있는 가족과 여성들은 어떤 모습일까. 그는 왜 가족과 여성들의 불안한 인연에 주목하는 것일까. 김 작가를 지난달 11일 서울 용산 세계일보 사옥에서 만났다.
―‘긴 하루’에서 딸 혜서는 엄마 유순의 전철을 벗어날 수 있을까.
“저는 불안감을 계속 부여해 주고 싶었던 것 같다. 요즘 대한민국에선 계층 간 이동이 쉽지 않으니까. 새벽 4시에 집을 뛰쳐나간 딸에게서 걸려온 전화는 엄마 나 잘 살고 있어, 라는 전화는 아닐 것이다. 결국 딸도 호락호락하지 않은 삶을 살아갈 것이다. 비록 엄마는 고생했지만 딸은 잘 살 거야, 라는 이야기는 드라마에나 있는 얘기지, 현실에선 힘든 일이지 않을까.”
소설집을 여는 작품 ‘모면’은 형부의 분양사무실에서 일하는 여성 소영의 이야기다. 소영은 형부가 외도를 하고 있고 언니 역시 형부의 외도를 모르는 척하는 모습을 바라본다. 그러다가 어린 시절 이모와 아버지의 부적절한 관계를 떠올리는데.
―소영과 언니 모두 형부의 외도를 모르는 척하는데.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어 하는 마음 아닐까. 다 드러내면 감당할 수 없으니까 알면서도 덮고, 덮으면서 또 아파하는 마음일 것이다. 살려면 눈 감아야 되고 거짓말도 해야 되고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계속 외면할까) 아마, 그럴 것이다.”
‘환기의 계절’은 가족을 버린 아버지가 27년 만에 병들고 늙은 몸으로 돌아오면서 시작된다. 엄마는 기다렸다는 듯 아버지를 이해하고 받아준다. 외도하는 남편에게서 이혼까지 요구받는 장녀인 나는 엄마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얼마 뒤 아버지가 쓰러지고 나서야 엄마에게 아버지가 동성애자였다는 사실을 듣게 되고, 나 역시 엄마에게 위기의 상황을 털어놓는데.
―엄마는 사는 게 맘대로 안 된다고 했는데, 과연 ‘나’는 견뎌낼 수 있을까.
“소설집의 인물 중에서 가장 미련한 인물이긴 하지만, 이 친구는 견뎌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보통의 딸들은 엄마랑 닮기 싫어, 라고 표현하는데, 이 친구는 엄마처럼 살고 싶다고 표현한다. 다음 계절을 기다리고 있는데, 뭔가 변화가 있을 것 같다.”
―이번 단편집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시야가 조금 넓어진 느낌이 든다. 지금은 목소리가 크지 않아도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고, 내가 꼭 때리지 않고 맞아도 된다고 생각하게 됐다. 이면도 보고, 다른 쪽도 볼 수 있는 좀 익은 사람이 된 것 같다. 어떤 독자들은 여전히 날 서 있는 소설들을 그리워하기도 하지만. 제 작가정신이 무뎌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변화가 나쁘진 않다는 생각이 든다.”
1975년 예산에서 태어난 뒤 서울에서 자란 김이설은 200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이후 소설집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 ‘오늘처럼 고요히’, ‘잃어버린 이름에게’, 경장편소설 ‘나쁜 피’, ‘환영’, ‘선화’,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 등을 펴냈다. 황순원신진문학상, 젊은작가상 등을 수상했다.
―작품이나 작가로서 비전은.
“계속 현장에 있는 작가, 계속 쓸 수 있는 작가이고 싶다. 상을 받거나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서점에 책이 있는 작가였으면 좋겠다. 제일 힘든 일이겠지만, 사라지지 않는 작가였으면 좋겠다. 잘생긴 소설보다 좋은 소설로 발전돼 갔으면 좋겠다. 좋은 소설을 쓸 수 있을까, 요즘 젊은 독자들에게 어필이 될 수 있을까, 감각을 유지할 수 있을까. 이런 것들이 제일 고민이다.”
오전 7시에 일어나서, 아이들을 학교 보낸 동시에 카페에 가서 소설을 쓰거나 소설수업 준비를 합니다. 집에 와서 점심을 먹은 뒤, 오후 2시쯤 다시 카페에 가서 소설을 쓰거나 소설수업 준비를 하고요. 오후 6시, 집에 돌아와서 집안일을 하고 저녁 먹은 뒤 쉬다가….
이젠 그 누가 있어 이 외로움 견디며 살까 이젠 그 누가 있어 이 가슴 지키며 살까. 노래를 유튜브에서 찾아 들었다. 기사가 잘 써지지 않은 이유도 있었지만, 자신의 하루 루틴을 대답한 뒤 뒤따라온 김이설 작가의 말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루틴을 갖기 위해 무려 16년이 걸렸다는. 두 아이가 중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카페에 가는 건 엄두도 내지 못했다는. 아~ 저 하늘에 구름이나 될까 너 있는 그 먼 땅을 찾아 나설까 사람아 사람아 내 하나의 사람아 이 늦은 참회를 너는 아는지…. 성문의 빗장이 풀린 것처럼 허둥지둥했던 인터뷰의 마지막이, 임희숙의 묵직한 목소리와 희미하게 겹쳐졌다.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Copyright © 세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3개월 시한부' 암투병 고백한 오은영의 대장암...원인과 예방법은? [건강+]
- “내 성별은 이제 여자” 女 탈의실도 맘대로 이용… 괜찮을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속도위반 1만9651번+신호위반 1236번… ‘과태료 전국 1위’는 얼마 낼까 [수민이가 궁금해요]
- '발열·오한·근육통' 감기 아니었네… 일주일만에 459명 당한 '이 병' 확산
- “그만하십시오, 딸과 3살 차이밖에 안납니다”…공군서 또 성폭력 의혹
- “효림아, 집 줄테니까 힘들면 이혼해”…김수미 며느리 사랑 ‘먹먹’
- ‘女스태프 성폭행’ 강지환, 항소심 판결 뒤집혔다…“前소속사에 35억 지급하라”
- 사랑 나눈 후 바로 이불 빨래…여친 결벽증 때문에 고민이라는 남성의 사연
- "오피스 남편이 어때서"…男동료와 술·영화 즐긴 아내 '당당'
- 예비신랑과 성관계 2번 만에 성병 감염…“지금도 손이 떨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