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재근의 족집게로 문화집기] 닥터 차정숙, 막힌 속 뚫어줬다
JTBC에서 모처럼 히트 드라마가 나왔다. 바로 토일 드라마 '닥터 차정숙'이다. 8회 만에 시청률 16.2%를 기록하며 대박 조짐을 보이고 있다. 요즘은 과거 30%를 우습게 넘긴다던 KBS 주말드라마마저 20%선에 머무를 정도로 드라마 대약세기다. 이런 상황에서 KBS보다 훨씬 심각한 드라마 침체기 속에 있었던 JTBC의 드라마가 16%를 넘었다는 건 매우 놀라운 소식이다.
주인공 차정숙은 가족 뒷바라지밖에 모르는 전업주부였다. 남편은 대학병원 교수로 향후 병원장 이상까지도 바라보는 전도유망한 엘리트다. 시어머니는 건물주로 우아한 생활을 이어가는 상류층이다. 아들은 남편이 있는 병원의 전공의로 가업을 잇는다.
이런 집안의 안 주인으로서 남부러울 것 없을 것 같지만 차정숙에겐 남모를 서러움이 있다. 바로 집안에서 인정을 못 받는다는 것이다. 남편은 차정숙을 돌 보듯하며 무시하고 아예 각방을 쓴다.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일 해주는 가사도우미 정도로 여기고 사돈도 무시한다. 독자적인 경제력이 없는 차정숙은 철저히 시댁에 종속된 처지로 남편과 시어머니의 눈치만 보며 살아간다.
그랬던 차정숙이 갑자기 대학병원 전공의가 된다. 말도 안 되는 것 같은데 그렇게 황당한 인생역전이 대놓고 펼쳐지니까 더욱 시원통쾌하다. 차정숙이 20년 전에 의대생이었는데 결혼과 출산으로 인해 경력단절 됐다는 설정이다. 보통은 경력단절 상황에서 성공적으로 복귀하기가 힘들다. 하지만 차정숙은 손쉽게 레지던트로 병원에 복귀해 의사의 길을 간다. 여기서부터 대리만족이 생겨난다. 차정숙을 무시만 하던 엘리트 남편은 사실 바람을 피고 있었다. 내연녀는 대학병원 의사로서 그녀 역시 엘리트다. 잘 나가는 남편과 세련된 내연녀, 그에 당하는 천덕꾸러기 전업주부 여주인공. 성공한 주말드라마의 전형적인 설정 중 하나다.
당하던 여주인공이 갑자기 엘리트로 변신해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잘 생기고 지적인 연하남의 사랑까지 받으며, 남편은 뒤늦게 부인의 가치를 깨닫고 연하남을 질투하지만 처절하게 몰락해버리고 만다는 설정 말이다. 막장드라마에서도 익히 봤던 소재다.
워낙 대놓고 익숙한 설정을 보여줬기 때문에 연하남의 등장도 예상할 수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미국 출신 젊은 꽃미남 의사가 차정숙 곁에 나타났다. 남편은 점점 차정숙의 매력에 눈 뜨게 됐는데, 불륜 행각이 가족에게 들켜 권위가 추락했다. 앞으로도 추락이 이어지고 시댁의 재산도 무너질 것으로 예측된다. 남편과 시어머니는 차정숙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며 매달리게 될 것이다.
시댁 앞에서 벌벌 떨던 차정숙이 점점 당당해지면서 그에 비례해 시청률이 올라갔다. 남편의 권위가 본격적으로 추락하기 시작한 8회에 16.2%를 찍었다. 시청자들은 시댁의 콧대가 더 무너지길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정말 뻔한 설정이고 예상되는 이야기인데, 그래도 호응이 뜨겁다.
그만큼 억눌려 사는 주부들이 많다는 뜻이다. 경력단절로 사회적 무력감을 느끼는 여성들도 많다. 그들의 막힌 속을 전업주부에서 닥터로 변신한 차정숙이 시원하게 뚫어주고 있다.
원래 뻔한 설정의 힘이 큰 법이다. 뻔한 설정이 뻔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너무나 많이 반복됐기 때문이다. 그렇게 반복된 이유는 계속 성공했기 때문이다. 계속 성공한 이유는 시청자들이 원했기 때문이다. 다수 대중의 한과 욕망이 집결해 뻔한 설정을 만들어낸 것이다. 일종의 간접적 집단창작이라고 할까? 이런 뻔한 설정을 아주 강도 높게 표현하면 막장드라마가 되고 수위를 조금 낮추면 일반 주말드라마가 된다.
'닥터 차정숙'이 또 하나의 주부 인생역전 성공작으로 우뚝 설 전망이다. 이런 성공에 고무돼 누군가는 또다시 주부가 대변신해서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시댁 식구들 콧대를 납작하게 만드는 이야기를 기획할 것이다.
물론 기계적으로 그런 설정만 맞춘다고 무조건 성공이 보장되는 건 아니다. 전형적인 설정에 실질적인 완성도로 숨을 불어넣어야만 성공작이 탄생한다. '닥터 차정숙'은 경쾌한 코믹터치로 작품 자체를 재밌게 만들었다. 부담 없이 웃으면서 볼 수 있는 분위기로 흘러가면서 사이다 설정이 시원하게 터지니 시청률이 급등한 것이다.
캐릭터도 누구 하나 밋밋하지 않고, 그런 캐릭터를 구현하는 연기자들의 합도 좋다.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더욱 후련한 국민 사이다 드라마가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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