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서 드물어…정치판 뒤엎는 女드라마로 대리만족
美·英 외교전서 활약하고
강력한 부통령 후보로 떠올라
대만 정치 드라마 '인선지인'
여성들의 치열한 선거전 다뤄
결혼·가사분담 등 현실고민도
넷플릭스에 '퀸 메이커'들의 이야기가 대세다. 배우 김희애와 문소리가 출연한 드라마 '퀸메이커'도 있지만, 우리나라뿐 아니라 미국의 '외교관', 대만의 '인선지인: 웨이브 메이커스' 등 동시대 여성 정치인과 그 조력자들을 주인공으로 삼은 웰메이드 드라마가 잇따라 공개됐다.
우리나라 '퀸메이커'가 정치·재벌 권력의 주요 인물을 모두 여성 배우로 치환시키고 복수의 서사를 입히면서도 진부한 전개 방식을 택한 반면, 미국·대만판 퀸메이커 드라마에선 현실성 있는 전개와 반전을 거듭하는 서사, 기성 권력을 넘어 다양한 가치와 목소리가 리더십으로 구현되는 정치적 올바름(PC)이 돋보인다. 유능한 여성 주인공이 중심에 있고, 이들이 펼치는 전략뿐 아니라 여성으로서, 아내 혹은 엄마로서 겪는 갈등과 차별의 현실도 혐오나 편견 없이 묘사된다.
물론 유리천장을 깨는 여자들은 많아졌다. 정치도 마찬가지라서, 우리나라 현 21대 국회의원 중 여성은 57명으로 역대 최다다. 그런데도 남성 대비 비중은 19%에 불과하고, 세계 평균인 25%에도 못 미친다. 여전히 자신만의 판을 짜는 여성들의 이야기는 짜릿한 판타지다. 거기다 성별을 넘어, 선거 캠페인으로 포장된 정치꾼이 아닌, 실무에 밝고 유능한 적임자가 리더로 성장해가는 스토리까지 이중의 판타지가 펼쳐진다.
먼저 '외교관'(The Diplomat)에선 유능한 외교관이자 물불 안 가리는 성격을 가진 중년의 여성 케이트 와일러가 '퀸'이다. 케이트는 중동 문제 전문가로, 아프가니스탄 대사 부임 직전 돌연 영국 대사로 내정돼 런던으로 떠난다. 미국의 최우방국 영국의 군함이 알 수 없는 배후로부터 공격받아 수십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고, 전쟁을 막기 위한 케이트의 외교 협상이 치열하게 펼쳐진다. 그녀를 후임 부통령 후보로 점찍고 시험대에 올린 백악관 비서실장, 정보 전쟁의 한복판에 있는 중앙정보국(CIA) 런던지부장 등의 캐릭터도 여성이고, 유색인종 배우가 맡았다.
킬힐이나 코르셋은 언감생심. 케이트는 늘상 검은 정장에 머리도 빗지 않은 모습이 태반인데 총명한 눈빛과 뒤지지 않는 말빨로 외교가를 휘어잡는 매력을 선보인다. 여기에 로맨스·코미디 요소는 복잡한 외교 무대의 긴장감을 덜어준다. 케이트의 남편이자 선배 외교관인 핼 와일러는 든든한 지원군이기도, 사기꾼 기질 다분한 사고뭉치이기도 하다. 케이트와 핼의 위태로운 결혼 생활, 그녀의 업무 파트너인 영국 외무장관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기류도 관전 포인트다. '홈랜드' '웨스트윙' '그레이 아나토미' 등 인기 미드 작가인 데버라 칸이 제작한 만큼 보는 맛을 갖췄다. 현지에선 영국 대사에 부통령 후보를 앉힌다는 설정 등 일부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등의 지적도 나온다지만, 고령의 미국 대통령이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등 국제 정세가 비교적 생생하게 반영돼 있다. 넷플릭스는 이 작품 공개 후 2주도 채 되지 않은 지난 2일 공식 계정을 통해 시즌2 제작을 공식화했다. 현재 공개 후 2주 연속 넷플릭스의 글로벌 톱10 영어 TV시리즈 부문에서 1위를 지키고 있고, 전 세계 84개국의 넷플릭스 톱10에 올랐다.
대만 드라마 '인선지인: 웨이브 메이커스'(Wave Makers)는 대선 10개월 전부터 대선 당일까지 정권 교체를 꿈꾸는 '공정당'의 선거캠프 홍보팀의 활약을 다룬다. 유권자의 이목을 끌고 상대 당을 흠집 내려는 시도가 이어지는 치열한 선거전의 이면이 현실적으로 다뤄진다. 우리나라 정치 체제, 정당 운영과도 비슷한 면이 많아 비교하고 유추하며 보기에 어렵지 않다.
극중 연임에 도전하는 여야 총통(우리나라의 대통령) 후보는 모두 여성이다. 실제 대만은 2016년 최초의 여성 총통 차이잉원이 취임해 연임까지 한 나라라 위화감 없이 설정이 받아들여진다. 또 실제 대만은 내년 1월 치러질 16대 총통 선거를 앞두고 본격 대선 레이스가 시작된 상황이다. 대만 넷플릭스에선 우리나라 드라마 '퀸메이커'가 3주 연속 1위고, 지난달 28일 공개된 '인선지인'도 3위에 올랐다.
두 작품 모두 서사의 큰 뼈대가 선거 운동이라는 점, 기성 남성 권력가의 외도와 성폭력이 거대악으로 상정됐다는 점 등에서 닮아 있긴 하다. 인선지인의 차별점은 연령·성향 등에 있어서 다양한 여성 캐릭터를 배치하고 입체적으로 서사를 끌어간다는 데서 나온다. 이를 통해 직장 내 성폭력이나 '미투' 폭로, 결혼 가정의 남녀 간 가사·육아 분담, 비혼, 동성애 등 여러 고민이 비춰지고, 피해자 등 약자에게도 목소리가 부여된다. 다만 약자가 억압된 상황을 극 안에서 속 시원히 복수하거나 해결하지도 않는다. 피해자가 직장 내 성희롱 문제를 고발한 후 여러 해법이 논의되지만 결국 가해자 징계 없이 조용히 해고하는 선에서 마무리 짓는 식이다. 인과응보의 '사이다' 전개보다는 현실을 묘사하는 쪽을 택한 것으로도 보인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공감하며 연대해가는 과정은 그나마 드라마에서 얻을 수 있는 위안이다.
[정주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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