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한 민심’ 어디로···에르도안 운명 가를 튀르키예 대선 미리보기
“내 논리는 에르도안이라고 말하지만 내 마음은 클르츠다로울루라고 말한다.”
오는 14일(현지시간) 치러질 튀르키예 대선·총선을 앞두고 한 21세 청년은 블룸버그통신에 이 같이 말했다. 그는 이번에 생애 첫 투표를 하는 500만 유권자 중 한 명이다. 그는 “에르도안은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이 나라의 지도자였다. 더 자유롭고 정의로운 분위기에서 살고 싶다”고 했다.
그의 말은 튀르키예 표심의 중요한 단면을 보여준다. 이번 선거는 20년 동안 집권한 ‘스트롱맨’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의 정치 인생에서 가장 큰 도전이다. 케말 클르츠다로울루 공화인민당(CHP) 후보를 필두로 하는 튀르키예 야권이 승리할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도 크다. 85%에 달하는 물가상승률이 상징하는 ‘민생 실패’와 5만명 이상이 숨진 ‘대지진 참사’가 에르도안 대통령과 집권 정의개발당(AKP)의 발목을 잡았다. 야당·언론 탄압을 일삼은 권위주의적 통치와 부정부패에 지친 분위기도 있다.
분노한 튀르키예 민심, 어디로 갈까
이 분노한 민심의 향방이 이번 선거 결과를 가를 전망이다. 9일 기준 최근 일주일 간의 여론조사 추이를 보면, 클르츠다로울루 후보가 지지율 47.3%~54.2%로 에르도안 대통령(41.9~46.1%)을 앞섰다. 클르츠다로울루 후보는 에르도안 대통령의 ‘강하고 직선적인’ 이미지와 대조적인 인물이다. 차분한 말투에 안경을 쓴 외모로 ‘튀르키예의 간디’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는 선거 캠페인에서도 유권자에게 “나는 에르도안과 정반대다. 여러분들처럼 겸손한 삶을 살고 있다”고 강조하며 에르도안 정권의 부패 혐의 및 권위주의적 이미지와 거리를 뒀다. 클르츠다로울루 후보는 사법권 독립 강화, 중앙은행 통화정책 독립, 대통령 중심제에서 의회중심제로 복귀 등 에르도안의 유산을 철회하겠다고 공약했다.
그러나 결과를 단정하긴 이르다. 포린폴리시(FP)는 에르도안 대통령이 쉽게 물러나지 않으리라 전망했다. 역대 튀르키예 대통령 중 쿠데타나 급사가 아닌 선거 결과에 승복해 물러난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무엇보다 에르도안은 대중적 지지 기반과 국가기관에 대한 강력한 통제력을 모두 쥔, 전례없는 대통령이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이번에도 ‘선거의 제왕’으로서의 면모를 드러냈다. 가장 큰 약점인 경제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최저임금 55% 인상, 노동자 230만명 정년 폐지, 공무원 임금 30% 인상 등을 내걸었다. 튀르키예 지진 관련 부패 혐의자들을 엄벌하고, 피해 지역을 1년 내로 복구하겠다고도 했다. 최근엔 클르츠다로울루 측을 두고 “LGBT 친화적”이라고 비난하는 등 야권 공격을 이어가고 있다.
야권이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선거를 치른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이번 대선의 투명성과 공정함을 둘러싼 우려가 이미 나오는 중이다. 이는 현 정권이 과거 선거에서 반복한 ‘찜찜한’ 정황이 있기 때문이다.
FP에 따르면, 2014년 지방선거 당시 AKP 소속 후보가 앙카라 시장직에서 패배할 것처럼 보이던 시점에 최고선거위원회의 투표 집계가 수시간 동안 갑자기 중단됐다. 이후 집계는 AKP 후보가 앞서나가는 것으로 재개됐고, 이에 대한 야당의 소송은 헌법재판소에서 기각됐다. 2017년 에르도안 대통령이 강력 추진한 대통령중심제 전환 개헌안을 두고 국민투표를 할 때도, 선거감독관들은 공식 인장이 없는 투표 용지까지 집계에 포함시킬 것이라고 발표했다. 도장이 찍히지 않은 투표 용지가 얼마나 집계됐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결국 개헌안은 약 51% 찬성으로 통과됐다.
‘에르도안 타도’라는 단일 기치 아래 하나로 모이긴 했으나 정치집단으로서의 정체성이 불분명하다는 것도 현 야권의 약점으로 꼽힌다. 클르츠다로울루 후보가 대표하는 6개 야당 연합은 ‘반(反) 에르도안’ 외에는 공통기반이 거의 없다. 좌파 사민주의, 극우 민족주의를 포함해 중도 우파와 종교적 보수 정당까지 포괄한다.
이는 대선 뿐만 아니라 총선을 함께 치르는 이번 선거 이후 의회 정치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워싱턴포스트(WP)는 “튀르키예 야권은 이번 선거를 앞두고 서로의 견해 차이를 간신히 봉합했지만, 승리하더라도 동맹 내부에서 이해관계를 두고 싸우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
국제적으로도 중요한 선거···균형·중재 역할 변하나
이번 튀르키예 대선은 선거 결과에 따라 국제 질서의 방향이 바뀔 수 있다는 점에서도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튀르키예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회원국 중 두번째로 규모가 큰 군대를 보유한 나라이지만 러시아와의 관계를 강화해왔으며, 핀란드와 스웨덴의 나토 가입도 방해했다.
클르츠다로울루 후보는 에르도안 정권의 외교 정책을 비판하면서 자신이 정권을 잡으면 미국 및 유럽연합(EU)과의 관계를 개선하겠다는 입장을 밝혀왔다. 클르츠다로울루 후보가 승리할 경우 튀르키예는 우크라이나 전쟁 상황에서 러시아와 서방 간 균형 외교를 추구하던 것에서 벗어나 나토 회원국으로서의 정체성을 강화할 가능성이 있다. 에르도안 대통령이 어깃장을 놓고 있는 스웨덴의 나토 가입이 원활해질 것으로 보이며, 서방의 대튀르키예 경제 투자가 늘어나리라는 예상도 나온다고 로이터통신은 전했다.
클르츠다로울루 후보는 8일 가디언 인터뷰에서 ‘푸틴과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이냐’는 질문에 “튀르키예의 이익에 따라 정책을 만들겠다. 현재의 외교 정책이 튀르키예에 유리하지 않다고 본다”고 답했다. 이어 “우크라이나는 부당하게 침략당했다. 우리는 그들을 지지한다. 우크라이나에 필요한 모든 정치적 지원을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다만 정권이 교체되더라도 튀르키예와 러시아 경제가 에너지 분야를 중심으로 깊게 얽혀 있어 튀르키예의 핵심 노선이 단번에 바뀌기 힘들다는 분석도 있다. 타스통신에 따르면 러시아는 튀르키예의 가장 큰 무역 파트너로, 지난달 러시아와 튀르키예 양자 무역은 620억달러를 넘어섰다.
5월 28일 결선으로 넘어가나
14일 치러지는 1차 투표에서 득표율 과반을 넘긴 후보가 없을 경우 2주 뒤인 이달 28일 결선 투표를 치른다. 최근 일주일 여론조사 동향을 보면 클르츠다로울루 후보가 에르도안 대통령을 앞서가긴 하나, 지지율 50%를 넘긴 적은 두차례 밖에 없다.
이에 따라 결선 투표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FP는 “한가지 위험은 선거 당일 야당이 근소한 차이로 앞서면 에르도안이 최고선거위원회나 다른 기관을 통해 이 차이를 메꾸려고 할 가능성이고, 또 다른 위험은 야당이 이겼음에도 에르도안이 이를 인정하지 않을 가능성”이라고 짚었다. 이어 “결선 투표로 넘어간다면 이러한 위험은 더 커질 것이다. 국제 사회는 선거 현장 모니터링에 상당한 자원을 배치해야 한다”고 전했다.
김서영 기자 westzer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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