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삶은 풀어야 할 숙제를 안고 태어난다

[[휴심정] 김용규의 숲과 지혜]

픽사베이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그대들은 인간을 극복하기 위하여 무엇을 했는가? 지금까지 모든 존재는 자신을 뛰어넘어 무엇인가를 창조해왔다.”

20세기의 시작과 함께 세상을 떠난 철학자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는 자신의 책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통해 인간을 향해 저렇게 외쳤다. 니체 철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그 유명한 위버멘쉬(Übermensch)에 대한 요청이 시작되는 문장이다. 그는 이어서 말한다. 신은 죽었으니 저기 어디 나보다 높은 데나, 나의 외부에 있을 것이라고 믿는 그 구원자에게 더는 기대려 하지 말라, 대신 오직 여기 발 딛고 있는 땅에 충실하라 요구한다.

“보아라, 나는 그대들에게 위버멘쉬를 가르치노라! 위버멘쉬는 대지를 의미한다. 그대들은 위버멘쉬는 대지를 의미한다고 말해야 한다. 그대들에게 명하노니 형제들이여, 대지에 충실하라. 그리고 그대들에게 대지를 초월한 희망을 말하는 자들을 믿지 말라! 한때는 신에 대한 모독이 최대의 모독이었다. 그러나 신은 죽었고 신과 함께 이러한 모독자들도 죽었다.”

스스로 삶의 주체로 서서 자신을 뛰어넘으라고 요청하는 니체의 철학은 그가 맞았던 서양사적 배경 위에서 탄생했다. 신이 모든 걸 주재한다고 믿었던 시대 중세가 종말을 고한 뒤, 왕의 목을 벤 혁명의 시대가 왔고, 동시에 과학과 놀라운 기술, 달라진 사유 등을 엔진으로 탑재한 새로운 시대, 즉 근대가 탄생하면서 서양인들의 영혼은 오래된 정처를 놓치고 떠돌기 시작했다. 새로운 시대와 함께 찾아온 전통적 의지처, 혹은 복종 대상의 소멸, 그리고 그에 따른 영적 공백의 시간, 니체는 부유하는 인간을 향해 대지를 초월한 곳에 희망은 없다고, 이제 오직 너 자신, 스스로가 희망이 되어야 한다고 부추겼다. 위버멘쉬! 니체에게 인간은 스스로 창조력을 발휘하면서 삶을 극복하고 주도해야 하는 존재로 파악되었다. 알다시피 니체의 철학은 이후 이어지는 서구의 실존주의 철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큰꽃으아리. 김용규 제공

아니다. 모든 생명의 삶이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니체는 주로 인간에게 주목하여 인간을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라고 바라봤지만,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인 존재는 인간만이 아니다. 숲을 자세히 보면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들의 생이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을 안고 태어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나는 상처와 좌절, 혹은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숲이 전하는 가장 소중한 위로와 지혜가 바로 이 부분에 있다고 생각한다.

숲에서 저 자신에게 놓인 숙제를 스스로 풀지 않고 제 꽃을 피워내는 식물은 단 하나도 없다. 대충대충 보면 나무와 풀이 보살펴주는 이 아무도 없는 야생의 숲 바닥에 아무렇지도 않게, 아무렇게나 뿌리를 박고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오랜 시간을 두고 자세히 보면 나무도, 풀도 모두 저마다 극복해야 할 난제를 하나하나 넘어서며 살아가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결국 산다는 건 자신에게 부여된 그 숙제를 차곡차곡 풀어가는 과정임을 알게 될 것이다. 인간을 포함해 생명 각각이 타고난, 극복해 내야 할 그 무엇을 나는 하늘(혹은 神)이 그 생명에게 부과한 ‘삶의 숙제’라고 부른다.

숲 가장자리에 사는 붉나무. 김용규 제공

신은 죽었는가?

여기서 내가 말하는 신(하늘)은 니체가 죽었다고 선언한 그 신이 아니다. 니체가 사망을 선언한 신은 아마 인간이 자신과 만물을 꼭두각시로 두고 조종한다고 믿었던 신일 것이다. 삶의 구원 역할을 맡고 있다고 믿었던 신이었을 것이다. 혹은 조건을 갖춘 자에게 면죄부를 주는 신이거나, 마녀인지 아닌지를 구분하거나, 천국과 지옥의 길을 심판한다고 믿었던 신이었을 것이다.

니체는 당시 그러한 신은 죽었다고 확언했다. 그러나 신은 여전히 살아있다. 물론 니체가 죽었다고 한 서양의 그 신은 아마 니체의 시대에 훨씬 앞서 이미 사망선고를 받은 상태였을 것이다. 흥미롭게도 동아시아의 사상과 견해 속에서 그런 신은 애당초 없었다. 대신 우리에게는 (신을 대신하는 개념으로) 하늘(天)이 있었다. 이 대지 위에서 만물이 뒤엉키며 약동하고 부풀어 팽창하다가 점점 사위고 수렴하였다가 다시 약동으로 이어지는 이 성실한 자연의 질서를 가능케 하고 관장하는 ‘하늘(天)’ 말이다. 다시 말해서 니체가 언급한 그 신 대신에 로고스로서의 하늘이 있었다. 주자학에서는 그 로고스(logos)를 ‘리(理)’로, <중용>(中庸)처럼 더 앞선 사유에서는 ‘성(誠)’으로, 다른 전통에서는 ‘도(道)’나 ‘법(法)’으로 부르기도 했다.

관련하여 흥미로운 점이 하나 있다. <성경>에 로고스라 적힌 말을 우리말로는 무엇이라 옮겼을까? 그 구절은 기독 복음서의 하나인 요한복음 제1장에서 만날 수 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있었으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 여기 ‘말씀’이라고 번역된 단어가 바로 로고스(logos)인데, 옛날에 우리나라에 개신교가 처음 들어왔을 때 이걸 ‘태초에 도가 있으니’라고 번역했다고 한다.(함석헌,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1”, <바보새 함석헌 아카이브> http://ssialsori.net/bbs/board.php?bo_table=0301&wr_id=32) 초기 기독교에서 ‘로고스’를 ‘도(道)’라고 번역했다는 사실만 보아도 신(하늘, 로고스)에 대한 우리의 전통적 사유가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계곡을 서식지로 삼는 식물들. 김용규 제공

생태학과 신

요컨대, ‘인간을 포함해 생명 모두는 하늘이 부여한, 극복해야 할 저마다의 숙제를 안고 태어난다’는 표현 속의 ‘하늘’은 ‘로고스로서의 신’과 다르지 않다. 생각해 보자. 앞에 쓴 ‘나무와 풀이 아무렇지도 않게, 아무렇게나 뿌리를 박고 살아가네’라는 식의 표현은 진실을 담고 있을까? 아니다. 어떠한 삶도 그렇게 무질서하게 뿌리 내리고 쉽사리 전개되지 않는다. 오히려 철저한 로고스(logos)의 지배 아래 있다. 모든 생명의 한 생이 자신의 출발점(씨앗, 알 등)에 응축돼 있지만, 그 생명은 아무 자리에서나 태어나지(발아하지) 않는다. 미나리의 씨앗을 모아 마른 밭에 뿌리는 농부는 없다. 그곳에서는 태어나지도(발아하지도), 살아가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산등성이에서는 왜 버드나무를 볼 수 없을까?’라고 묻는 숲 탐방객은 없다. 버드나무는 물이 더 풍부한 자리에서만 살아가는 나무임을 그들도 알기 때문이다. 모든 가능성을 품고 있는 원기(元氣) 덩어리인 씨앗(알)이라 할지라도, 생명 저마다가 태어나고 살아가는 서식지에는 엄연한 질서가 있음을 일반인들도 어렴풋하게나마 알기 때문일 것이다.

이 부분, 즉 생물과 그 환경의 상호작용을 체계적으로 살펴 개별 생명을, 또는 생명 집단(군집, 경관 등)을 파악하고 규명해 보려는 학문이 바로 생태학(生態學)이다. 생태학의 어원을 따라가 보면 그것이 ‘서식지의 로고스’를 중심에 두고 있는 학문임을 알 수 있다. 생태학(生態學)의 영어 표현인 ‘ecology’는 ‘eco+logos’를 버무려 만든 말로, 이 학문의 골간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eco’는 집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 그리스어 ‘oikos’에서 유래했다. 영어로는 ‘house’, 우리말로는 그것을 ‘서식지’라 번역할 수 있다. 그러니까 ecology는 기본적으로는 서식지의 로고스를 핵심으로 하는 학문인 셈이다. 넓게는 적도로부터 극지에 이르기까지 우리 행성 지구의 물과 뭍과 공중을 차지하고 살아가는 온갖 생명들은 각각 고유의 터전을 서식지로 삼아 살아가고 있다. 좁게는 우리 주변의 숲과 들, 그리고 그것과 연결된 계곡과 하천 또는 강에 이르기까지 온갖 동식물은 결코 아무 자리에서나 살아가지 않는다. 버드나무와 미나리는 모두 넉넉한 물 환경이 필요한 생명이지만, 그래서 물 속이나 물 근처에서 살지만, 그 서식지는 분명하게 다르다. 산삼이 싹 트고 살아가는 자리와 큰꽃으아리가 꽃 피며 사는 자리 역시 완전히 다르다. 시간을 관통하는 로고스는 또 얼마나 신비한가. 같은 터전에서 만날 수 있는 풀이지만, 여름꽃 달개비는 봄꽃 제비꽃이 피고 진 뒤에라야 그 어린싹을 겨우 만날 수 있다. 새들도 그렇다. 참새나 오목눈이가 사는 터전과 부엉이나 말똥가리가 사는 터전은 확연히 다르다. 까치나 까마귀는 각각 또 어디에 살고, 왜가리를 보고 싶다면 어느 계절에 어디로 찾아가야 하는지 한 번 떠올려보라. 생명은 모두 서식지의 로고스, 그 정교하고 신비한 질서를 따르며 살아간다. 오 위대한 하늘이여, 신비한 로고스여!

미스김라일락. 김용규 제공

숙제의 근원, 태극(太極)

그렇다면 생명 저마다가 극복해야 할 숙제는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생명의 직접적인 숙제는 바로 저 서식지에서 비롯된다. 버드나무는 풍부한 물의 조건을 잃으면 시들어 죽게 되고, 소나무는 다른 식물이 더 높게 자라서 자신의 상층부에 그늘을 드리우며 덮어버리면 서서히 죽음을 맞게 된다. 키가 작은 냉이 역시 개망초나 주홍서나물, 쑥처럼 상대적으로 엄청나게 키가 큰 풀들이 자신을 뒤덮으면 삶을 이어가기 어렵게 된다. 버드나무는 물이 주된 숙제이고, 소나무나 냉이 같은 경우는 빛이 커다란 숙제인 셈이다. 내륙의 암석 지대를 서식지로 삼고 살아가는 식물에는 토양이나 수분이 그렇고, 바닷가에 사는 식물에는 염분 또는 거센 바람 따위의 숙제가 놓여 있다. 고산지대를 차지한 식물은 찬 기온과 거센 바람 같은 숙제를 풀어낸 생명이다.

이렇듯 생명의 직접적인 숙제는 저 자신의 터전, 즉 서식지에서 비롯되는 것이지만, 모든 생명이 숙제를 안고 태어나고, 또 숙제를 풀어내며 살아가야 하는 보다 근원적인 이유는 만물이 태극의 지배 아래 있기 때문이다. <성경>의 창세기를 우주론으로 읽는다면, 태극 역시 우주론(cosmology)으로 읽을 수 있다.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는 태극을 간결한 그림으로 그려 설명했다. (태극도는 앞선 글의 그림을 참조.

https://www.hani.co.kr/arti/well/well_friend/1081162.html)

빛 좋은 들판. 그 치열함의 숙제를 이겨내고 꽃 피워 열매 맺는 냉이. 김용규 제공

생명에게 숙제가 부여되는 보다 근원적인 이유를 더욱 간명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태극(太極)을 음양(陰陽)으로 추상화한 그림(음양태극)을 보자. 우주만물은 음양으로 구성되어 있고 음양 운행, 그 리듬의 지배 아래에 있다. 하늘이 있으니 땅이 있고, 능선이 있으니 계곡이 있다. 능선과 계곡이 있으니 물도 그 적고 많음의 자리가 생기게 된다. 또한 북극과 남극이 있으니 적도가 있게 마련이고, 그 공간의 특성에 따라 기온과 바람도 각각의 기질을 달리하게 된다. 맑은 날이 있으면 흐린 날, 비나 눈보라 쏟아지는 날이 있는 것과 같다. 생명의 터전, 서식지는 매 순간 모두 저 음양의 역동과 그 특성으로부터 영향을 받게 되어 있다. 우리 안에는 금욕이 있는가 하면 뜨거운 음욕도 똬리를 틀고 앉아 있지 않은가. 한번 살았는가? 그렇다면 기어코 죽어야 한다. 그것이 생명 가진 존재들을 관통하는 준엄한 음양의 질서다. 태극을 이루는 이 대극성(對極性)이 생명 각자에게 숙제를 안긴다. 따라서 숲에서 빛이 많이 비추는 자리를 서식지로 삼는 식물이라면(양) 대략 척박한 토양, 양분의 결핍(음)이라는 숙제를 풀어야만 자기 삶을 완결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능선에서는 능선의 숙제를, 계곡에서는 계곡의 숙제를, 숲 한복판에서는 그 자리의 숙제를, 숲 가장자리에서는 그 자리의 숙제를 풀어야만 한다. 태극(太極)은 위대하고, 역(易)의 질서는 준엄하다.

자신을 가난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부유한 사람을 부러워할 때마다 나는 말한다. “신이 모든 걸 주지는 않는다. 당신은 여기 맨땅에서 태어났고, 그 사람은 저 깊은 숲, 양분 가득한 땅에 태어난 삶처럼 보이는가? 그는 양분이 가득한 대신 그늘 드리운 하늘을 얻고 태어났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하늘을 열기 위해 그 그림자를 어떻게든 해결해야 할 것이다. 주목(朱木)은 그런 땅에서 수백 년 동안 하늘을 열어 마침내 마음껏 빛을 누린다. 당신이 맨땅이라고 불평하는 그곳을 자세히 보시라. 땅은 척박해도 햇살은 찬란히 쏟아지지 않는가? 민들레는 그곳에서 기어코 꽃을 피워 자신을 증명한다.

김용규(여우숲 생명학교 교장)

*이 시리즈는 대우재단 대우꿈동산과 함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