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주의는 과학으로 위장해도 인종주의
히포크라테스는 기원전 5~4세기 그리스 사람이다. 인술(仁術)을 펼치는 의료인의 자세와 다짐을 밝힌 ‘선서’로 유명하지만, 임상의학뿐 아니라 자연학과 철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현전하는 <히포크라테스 전집>에는 글 60여 편이 실렸는데, 모두 그가 직접 썼는지는 불분명하다. 국내에는 그중 5편을 추려 번역한 <히포크라테스 선집>(나남, 2011)이 출간됐다.
침략·살육의 정당화로 나간 인종주의
히포크라테스의 육필로 인정되는 저작 중 하나가 ‘공기, 물, 장소에 관하여’다. 환경이 신체와 정신 건강에 미치는 영향(전반부)과, 인간의 체질·성정·습속의 관계를 고찰(후반부)한 에세이다. 후반부에 “아시아와 유럽이 자연의 산출물과 사람의 본성에서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를 논한 흥미로운 대목이 나온다.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 ‘아시아’는 오늘날 튀르키예 영토에 해당하는 아나톨리아반도(소아시아) 일대를 가리킨다.
“모든 것이 아시아에서는 훨씬 더 아름답고 크며 다른 지역보다 덜 거칠고, 사람들의 성격도 보다 유순하고 온화하다. 그 원인은 기후의 알맞은 혼합상태 (…), 같은 크기의 힘이 모두 균형을 이루는 것이다. (…) 씨로부터 생기건 땅 자신이 산출하건 철에 따라 식물이 그곳에서 많이 자라고, 가축이 번성하고 새끼를 먹이기에 아주 좋은 것은 당연하다.” 여기까지만 보면, 아시아의 자연과 사람에 대한 찬사로 읽힌다. 그런데 이어지는 논술은 오리엔탈리즘(동양에 대한 서구의 편견 또는 선입관)의 효시가 아닌가 싶을 만큼 엇나간 느낌이다.
“그러나 용기, 인내, 노력, 기개 등은 이러한 본성에서 생겨날 수 없다. (…) 아시아 사람들이 유럽인보다 호전적이지 못하고 유순한 것은 추위나 더위 쪽으로 큰 변화를 보이지 않는 일정한 계절이 가장 큰 원인이다. (…) 유럽에 살고 있는 종족들은 키나 외모가 서로 다른데, 크고 잦은 계절의 변화 때문으로, 강한 열기와 엄혹한 겨울, 많은 비와 오랜 가뭄, 크고 다양한 변화를 일으키는 바람이 있다. 거칠음, 사나움, 용맹함은 그런 자연환경에서 생겨난다. (…) 항상 같은 기후에서는 게으름이 생겨나고, 변화가 많은 기후에서는 몸과 마음이 시련을 견뎌낸다.”
히포크라테스는 인간 성정의 차이를 정치체제에서도 찾았다. 아시아인이 “왕의 지배를 받아 정신이 노예화”된 탓에 겁이 많은 반면, 유럽인은 “스스로 다스리는 사람들이어서 남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기꺼이 위험을 떠맡는다”는 것이다. 그의 결론 부분은 이렇다. “기후가 일정하게 유지되는 곳(아시아)의 사람들은 나태하고 (…) 무기력함과 졸음이 그들을 지배한다. 헐벗고 거친 곳(유럽)에 사는 사람들은 단단하고 날씬하며 관절이 잘 움직이고 탄력이 있고 몸에 털이 많다. 그런 체질에서는 일에 대한 열정과 경계심이 있고, 기술적인 면에서 보다 예리하고 지적이며, 전쟁에서는 보다 용맹스럽다.”
2400년 전의 주장을 오늘날 잣대로 폄하할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노골적인 ‘인종주의’ 혐의를 지울 수는 없다. 풍토와 체질의 관계를 인종주의 관점으로 설명한 시도는 이후 침략과 살육을 인종주의로 정당화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유럽에서 기독교 신앙이 지배적 세계관이 된 중세 1천 년 동안은 기독교도와 이교도의 차이가 우리와 그들, 나아가 문명과 야만의 경계를 갈랐다. 이른바 ‘지리상의 대발견’이 시작된 16세기, 유럽인은 신대륙 아메리카에서 생면부지 원주민과 맞닥뜨렸다. 서구의 기준으로 일부는 문명생활과 거리가 멀었지만, 다른 일부는 체계가 잘 짜인 문명제국을 이뤘다. 그런데 유럽의 백인 정복자가 식민지에서 일삼은 가혹한 착취와 무차별 학살은 현실적으로나 도덕적, 종교적으로 전에 없던 문제를 던졌다.
‘논리정연’ 과학의 언어로 위장한 편견
1550년 스페인 본국에선 식민지에서 벌어진 일들의 정당성을 두고 격론이 벌어졌다. 왕명에 따른 진상조사와 신학토론회가 함께 열린 ‘바야돌리드 회의’다. 현지에 기독교 복음을 전하러 갔다가 정복자의 잔혹 행위에 충격받은 도미니크회 수사 라스카사스와, 신대륙에 가본 적은 없지만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유럽사에 정통한 대학교수 세풀베다가 맞붙었다. 논쟁의 핵심은 ‘원주민도 기독교도와 동등한 인간인가’, ‘식민지 정복과 원주민의 노예화가 하느님 뜻에 부합하는가’였다. 해를 넘겨 이어진 논쟁은 또 다른 인종주의를 정당화하는 타협안으로 마무리되고 말았다. 신대륙 원주민의 “이성적 영혼과 문명을 건설한 능력”을 인정해 보호하되, 식민지의 부족한 노동력은 “동물에 훨씬 가깝고 노예의 천성을 타고난” 아프리카 흑인 노예로 보충한다는 것이었다.(장 클로드 카리에르, <바야돌리드 논쟁>, 샘터, 2007)
거칠고 주관적인 ‘혐오’보다 논리정연한 ‘과학’의 언어로 위장한 편견이 더 위험한 법이다. 과학을 특정한 정치 의도로 기획하고 왜곡한 유사과학과 구별하지 못하고, 사실에 기반한 진실이 가짜뉴스와 선전·선동에 휘둘릴 때 그 위험은 끔찍한 현실이 된다. 혐오와 배제를 자양분 삼은 인종주의의 극단적 패악을 인류는 20세기 중반에 경험했다.
19세기 후반 독일 지리학자 프리드리히 라첼이 체계화한 ‘환경결정론’도 멀리는 히포크라테스의 앞 저작에 뿌리가 닿는다. 라첼은 지리와 자연환경이 거주집단의 생활양식과 속성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며 그 속성은 이주로 전파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라첼은 또 다윈의 진화론을 사회에 적용한 사회진화론을 주창하며 ‘생활권’(Lebensraum)이란 개념을 창안했다. ‘생존에 필요한 공간’을 뜻하는 생활권은 나치 독일의 유럽 침공과 점령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동원됐다. 여기에 다윈 진화론의 자연선택과 적자생존 이론을 끌어와 독일민족(아리안)의 우수성을 주장한 우생학은 제노사이드(집단살해)에 그럴싸한 명분을 보탰다.
1935년 나치는 ‘뉘른베르크 인종법’이라는 두 개의 법률을 공포했다. 하나는 제국 시민권법, 다른 하나는 독일인 혈통·명예 보호법이다. 전자는 순수 혈통의 독일인만 독일 시민권을 취득하도록 했다. 후자는 인종을 독일인, 2급 혼혈인, 1급 혼혈인, 유대인으로 구분하고 독일 시민과 유대인의 혼인과 성관계를 ‘인종 모독’으로 간주해 금지했다. 이로써 아리안족 순혈주의가 법과 제도로 뒷받침됐다. 몇 년 뒤 본격화할 유대인 대학살의 예고편이기도 했다. 앞서 히틀러는 <나의 투쟁>(1925)에서 “유대인은 흑사병보다 더 나쁜 정신적 유행병(…), 그러한 역병을 제거하는 유일한 방법은 뿌리를 제거하는 것”이라고 천명했다.
유대인 학살 배상액, 70년간 118조원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 본토와 나치가 점령한 폴란드·헝가리·우크라이나 등 ‘독일인의 생활공간’에서 ‘열등한 인간’ 1100만 명이 학살됐다. 절멸 대상에는 유대인뿐 아니라 집시, 슬라브족, 장애인, 성소수자, 사회주의자도 포함됐다. 최대 희생양은 약 600만 명이 목숨을 빼앗긴 유대인이었다. 나치가 ‘유대인’을 판별한 결정적 기준은 인종이나 국적이 아니라 종교였다. 조부모가 유대교 공동체에 속하고 가족 또는 개인이 일상생활에서 유대교 전통을 지키면 유대인으로 분류됐다. 당사자가 자신의 으뜸 정체성을 독일인이라 확신하고 애국심을 증명해도 나치의 인종법 앞에선 아무 소용이 없었다.
꼭 78년 전인 1945년 5월8일, 나치 독일은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히틀러의 광기 어린 ‘인종청소’도 막을 내렸다. 근대 이후 인간의 이성과 문명을 과신하던 인류는 나치가 자행한 학살과 만행에 큰 충격을 받았다. 1945년 11월부터 이듬해 10월까지 독일 뉘른베르크에선 나치 전범에 대한 국제법정이 열려 학살 주범들이 사형과 종신형 등 중형으로 단죄받았다. 비극의 재발을 막기 위한 국제협약도 잇따랐다. 1948년 12월 유엔 총회는 ‘집단살해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1965년 유엔 총회에선 ‘모든 형태의 인종차별 철폐에 관한 국제협약’이 역시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선 과거 인종주의 범죄에 대한 사과와 속죄가 이어진다. 독일은 1970년 12월 빌리 브란트 서독(당시) 총리가 폴란드 바르샤바에 있는 유대인 희생자 추모비 앞에 무릎을 꿇은 이래, 대통령과 총리의 진심 어린 사과가 끊이지 않는다. 국가 차원의 배상도 꾸준하다. 독일 정부는 2022년 9월에도 유대인 학살 피해자들에게 12억유로(약 1조8천억원) 규모의 추가 배상 계획을 밝혔다. 1952년 룩셈부르크 협약으로 첫 배상금을 지급한 이래 지금까지 70년 동안 배상 누적액이 800억유로(약 118조원)가 넘는다.
2023년 4월25일 포르투갈의 마르셀루 헤벨루 드소자 대통령은 과거 포르투갈이 저지른 노예무역에 사과하고 책임져야 한다고 말했다. 포르투갈의 최고지도자가 노예무역의 책임을 공식 인정하고 사죄한 것은 처음이다. 15~19세기 아프리카인 600만 명 이상이 납치돼 대서양 건너 식민지 브라질에 노예로 팔렸다. 앞서 3월엔 영국의 진보 성향 일간 <가디언>이 19세기 <가디언> 설립자들이 노예제에 연루된 데 사과하고 10년간 1천만파운드(약 168억원) 규모의 배상 프로그램을 운영한다고 발표했다.
유럽도 극우 포퓰리즘의 득세로 골머리를 앓지만 보편적 인권과 양심의 큰 흐름은 거스르지 못한다. 인종적 열등감을 감추고 ‘탈아입구’를 지향하던 군국주의 일본이 식민지 과거사를 대하는 태도와 크게 대조된다. 윤석열 정부가 한-미 공조에 ‘올인’하느라 희대의 ‘셀프 배상’으로 희생자 유가족과 국민의 가슴에 대못을 박은 사태는 재론하기가 낯뜨거울 정도다. 그러나 모두가 느낄 공분과 수치심을 잠시 접어두고, 한국이 ‘우리 안의 타자’를 어떻게 대우하는지 역지사지할 필요가 있다.
한국도 유엔 인종차별 협약 가입
유엔 인종차별 협약이 정의한 ‘인종차별’(제1조)은 “인종, 피부색, 가문 또는 민족이나 종족의 기원에 근거를 둔 어떠한 구별, 배척, 제한 또는 우선권을 말하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또는 기타 어떠한 공공생활의 분야에 있어서든 평등하게 인권과 기본적 자유의 인정, 향유 또는 행사를 무효화시키거나 침해하는 목적 또는 효과를 가지고 있는 경우”라고 명시했다. 한국은 1978년 협약에 가입했다.
2023년 오늘, 한국 사회가 이주노동자와 난민(신청자 포함)을 대하는 시선과 태도는 어떤가? 국제협약이 정의한 ‘인종차별’의 혐의에서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을까? 현실은 그 ‘반대’에 훨씬 더 가깝다. 수많은 문제에도 여전히 개선되지 않는 고용허가제, 대구 이슬람사원 신축을 반대하는 일부 주민의 횡포는 극히 일부의 사례일 뿐이다. 피부색과 국적, 종교, 신분에 따라 외국인을 차별하는 관행은 생각보다 훨씬 폭넓고 뿌리 깊다. 대접받고 싶은 대로 대접하라는 것은 동서고금 만인에게 적용되는 진리다.
조일준 <한겨레> 선임기자 iljun@hani.co.kr
*호모 미그란스: 조일준 <한겨레> 선임기자가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는 현안들의 역사적 맥락과 관련 지식, 그에 얽힌 사람들 이야기를 4주에 한 차례씩 연재합니다. 호모 미그란스는 ‘더 나은 삶을 찾아 이주하는 인간’을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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