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안거하듯 써내려간 79편… 눈에 보이는 모든 게 시였다”
시 쓰는 4년간 팬데믹 겪으며
자연의 섭리·존재의 죽음 등
‘삶의 유한함’ 경험적인 통찰
멸치에 소주 한잔 ‘봄날 저녁’
단절의 고통 속 온기 갈망해
‘오랫동안 사람과의 거리두기/입과 코를 가린 마스크도 벗고/오늘은 양념장과 함께/생으로 졸인 봄멸치 한 숟갈/상추쌈에 밥과 쌈된장/입안에 쏟아 넣자마자 울컥/눈물이’.
김종해(82) 시인의 시집 ‘서로 사랑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다’(문학세계사)에 실린 ‘봄날 저녁’의 일부다. 팬데믹 터널 안에 갇혀 있던 어느 날, 한식(寒食)이 지나 잡힌 기장 봄멸치를 저녁 밥상에서 만난 김 시인은, 정말로 울었다고 한다. 최근 문화일보사에서 만난 그는 “무너지고 무뎌진 것들이 되살아나는 기분이었다”며 “그 순간 깨어난 건 ‘미각’ 그 이상의 것이었다”고, 그리 멀지 않지만 어딘지 아득한 ‘그 날’을 떠올렸다. 시는 이렇게 이어진다. ‘오오, 내가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봄 입맛이었구나!/목울대를 빠르게 타고 넘는 소주 한 잔이/꿀보다 더 달다’고, ‘또 무엇을 더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서로 사랑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다’는 등단 60년을 맞은 김 시인의 열세 번째 시집이다. 4년 만의 신작. 시작(詩作)의 시간 대부분을 코로나19와 보냈다. 시인은 “스님의 동안거(冬安居)처럼 지냈다”며 “그 어느 때보다 많이, 빨리 썼다”고 했다. 그러면서 “코로나는 엄청난 통증과 짙은 절망이면서도, 아이러니하게 시 쓰기엔 절묘한 때였다”고 덧붙였다. “눈에 보이는 것과 느끼는 것, 생각하는 것이 모두 시가 되는 경험을 했습니다.” 시인은 시절(時節)을 강조했으나, 이제 무슨 말을 해도 시가 되는 경지에 이른 게 아닐까.
단절의 고통만큼 온기를 갈망하는 시 ‘봄날 저녁’을 비롯해 시집엔 삶과 존재에 대한 시인의 경험적 통찰이 담긴 79편이 실렸다. 자연의 섭리, 존재의 죽음, 죽음의 임박, 그리고 떠난 이들을 향한 그리움까지 화자는 줄곧 ‘삶의 유한함’을 이야기한다. 떠난 이는 시인이 ‘체험’한 문학사적 이름들이다. ‘봄이여 무심하구나-이어령 선생님을 그리며’를 필두로 최하림(‘섬에서 최하림 시인을 만났다’), 박목월(‘따뜻한 지폐’), 박남수(‘한 마리의 새, 이민을 가다’) 등 문인들과의 인연이 깃든 시들은, 김 시인이 어떻게 성장하고 성숙하고 문제의식을 벼려왔는지, 그 걸어온 길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시가 있으므로 사람 마음속에 감춰진 놀라운 낙원 하나를 깨닫게 되었다”는 시인에게, 이들은 ‘낙원의 동지’다. 60년을 쓰고도 “아직 가보지 않은 새로운 시”를 찾겠다는 그 앞날을 밝히는 ‘저녁 등불’이다.
‘나이 팔순 지나가니까/풀이 문득 보인다/풀이 보이니까 바람마저 보인다’(‘풀 앞에 서서’ 중에서). ‘내가 풀잎이 되어야/겨우 알아듣게 되는 저 풀잎의 말/서로 사랑하는 모든 존재는 흔들린다’(‘풀잎끼리도 사랑하니까 흔들린다’ 중에서).
김수영의 ‘풀’을 의식하고, 자신만의 ‘풀’로 해석한 두 편의 시는 삶의 화두와 문학적 질문에 동시에 답한다. 정답아닌 유일한 해답 ‘사랑’으로의 귀결. 화자는 자신이 ‘풀’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고(‘풀 앞에 서서’), ‘풀잎’이 되어 ‘풀잎’의 말을 듣는다(‘풀잎끼리도 사랑하니까 흔들린다’). 그리고 고백한다. ‘바람이 불지 않아도/살아 있는 것은/서로 사랑하니까 흔들린다’고.
시인은 “드러내기 싫었던 것도 썼다”고 했다. 시인에게 “가장 맺혀 있는” 인생의 시간을 풀어 놓은 ‘시’로,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오던 때를 회상한 짧은 산문시 ‘서울 입성’이다. ‘정월 대보름날 사흘 지난 1962년 2월 18일께, 나는 고향 부산을 떠났다’로 시작하는 시에서 화자는 서울행 밤 기차에 올라 통곡하고, 넓고 낯선 사막을 걷는다.
서울살이를 ‘사막’으로 표현했으나 시인은 “비교적 삶이 쉽게 풀린 편이다. 맨주먹으로 올라와서 거침없이 출판했다”고, 시인뿐만이 아니라 출판 기획자로 왕성히 활동했던 과거를 회상했다. 46년 전 시인이 창립한 출판사 문학세계사는 오랜 세월 문인들의 사랑방으로 유명했다. 시인은 지금도 현대시 동인들을 만나고 종종 젊은 시인들과 술을 마신다. 술값도 고기 굽기도 김 시인의 몫. 미식가로 알려진 그는 “내가 잘 구워서 그래, 그래야 맛있으니까”라며 웃었다.
시인은 신작 원고 마감 후 넉 달째 단 한편도 쓰지 못했다고 했다. 요즘처럼 길게 펜을 놓아본 적이 없다. “시 쓰는 동안거 끝내고, 시 안 쓰는 춘(春)안거가 시작됐나 봅니다. 어쩌면 이제 조금 쉬라는 뜻인가 봅니다.”
박동미 기자 pd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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