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보다 키작아도 상관없어요. 코드만 맞으면 됩니다”
‘힘들 때도 많았죠. 내가 잘한 것인가 스스로에게 수십번도 더 물어볼 때도 있었어요. 하지만 후회하지는 않았습니다. 후회까지 해버리면 그동안 내가 해왔던 노력과 과정들이 의미없는 것이 될수도 있을 것 같았거든요“
우리는 살다보면 많은 선택의 기로에 서게된다. 큰 선택일 수도 있고 작은 선택일 수도 있지만 당시로서는 결과의 크기까지 가늠하기는 힘들다. 어떤 방향으로 가서 어떻게 나에게 돌아올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잘했다고 뿌듯할 수도, 아님 후회로 가득차 스스로를 책망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바로 삶이고 자신에 대한 기록이다. 연필과 지우개처럼 쓰고 지우고를 반복할 수 없기에 매순간 최선을 다해 살아야하는 이유다.
한때 ’제2의 박찬숙‘이 될 것으로 기대를 모았던 센터 '쟌느' 정진경(45‧190cm) 역시 늘 선택이라는 상대와 쉼없이 싸워왔다. IMF로 인한 팀해체, 드래프트 파동, 많은 이들이 반대했던 대만행 그리고 3번의 '전방십자인대 파열'까지…, 2005년. 한국 나이로 28살에 WKBL로 들어와 국내 프로리그에서의 늦은 경력을 시작했지만 만신창이가 된 몸과 마음으로 인해 오래 버티지못했다.
신세계 쿨캣 소속으로 2005년 겨울리그부터 2007~08시즌까지 83경기에 나서 평균 4.77득점, 4.12리바운드, 1.72어시스트, 0.66스틸로 이름값에 비하면 아쉬운 성적을 남겼다. 우연의 일치였겠지만 KB스타즈에 유독 강했다. 한경기 최다득점(2005년 7월 18일 18득점), 최다 리바운드(2005년 8월 14일 11개)를 비롯 최다 어시스트, 스틸, 블록슛, 자유투 성공 등이 모두 KB스타즈전에서 나왔다.
은퇴 후에도 그녀는 쉬지않았다. 모교인 신길초와 숭의여중에서 7년동안 코치생활을 한 것을 비롯 길지는 않았지만 중국여자프로농구 산시 신루이에서도 경험을 쌓았다. 2016년부터는 부천 KEB하나은행(현 부천 하나원큐)의 코치로 이환우 감독을 보좌하면서 WKBL에서의 커리어를 시작했다.
2018~19 시즌 종료 후 이감독이 사퇴하면서 함께 물러났지만 농구인 정진경의 일욕심은 멈추지않았다. 되도록 코트에서 가까이있어야 현장 감각이나 이런저런 기회와 멀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지도자 생활은 잠시 멈추었지만 해설위원, 칼럼니스트 자격으로 농구와 함께했는데 코치 시절과는 또 다른 시각으로 코트를 바라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시간이었다고 자평한다.
거기에 더해 2021년 4월부터는 WKBL 경기운영본부장이라는 새로운 직함으로 리그 발전에 힘쓰고있는 모습이다. 새로운 도전을 두려워하지않고 끊임없이 배우고 경험하는 부지런한 농구인 정진경을 만나 선택과 과정 그리고 결과에 대한 그녀만의 신념을 들어보았다.
P.S / 정진경은 선수시절 특별한 별명은 없었다. 다만 대만에서 활동할 때 그곳 선수들에게 한국어 발음이 어려워서 ’진진‘이라고 불렸으며, 현재는 가까운 친구들이 ’쟌느‘라는 프랑스 발음으로 부르고 있다. 개인적으로 프랑스 문학작가들을 좋아하는 그녀로서도 그러한 애칭이 친근감있고 좋다고 한다.
“서로 대화가 통하냐가 문제지 저보다 크냐 작냐는 전혀 중요하지않습니다”
Q.WKBL 경기운영본부장을 맡고있는 것으로 알고있는데 어떤 일을 하는 자리인지 궁금합니다.
맞습니다. 말씀주신 것처럼 저는 WKBL 경기운영본부장을 맡고있어요. 현재는 시즌이 끝난상태인지라 출근은 하지만 조금 한가한 상태입니다. 저뿐아니라 대부분 농구인들에게는 5월이 그래도 여유로운 시기일거에요. 시즌 때는 경기의 전반적인 운영에 대한 총괄을 맡고있다고 보면되요. 심판부, 경기부에 대한 관리를 하고, 시합배정을 하고, 규정상 문제가 생겼을 때 해결해야하는 등 해야하는 일이 제법 많은 편입니다. 각구단이나 감독님들과도 소통을 해야하고요. 지금같은 비시즌 때는 정비해야하는 규정같은 것이 있으면 수정 삭제하거나 새로만들기도합니다.
Q.어떤 점이 가장 힘들까요?
다들 공감하다시피 시즌때는 판정에 대한 부분이 가장 크게 다가와요. 판정 하나로 인해 경기흐름이나 상황이 바뀌기도하잖아요. 중요한 순간에는 더더욱 말할 것도 없고요. 때문에 각팀들 입장에서는 더더욱 예민하게 반응하기도 하죠. 진짜로 잘못될 때도 있겠지만 제대로 판정을 해도 손해를 보는 쪽에서는 그게 아닌 것으로 느끼는 경우도 있을테고요. 직접 심판을 보는 것은 아니지만 판정에 대한 문제제기가 나오는 경우 조율 혹은 해결해야될 때가 어렵고 힘듭니다. 특히 승패가 결정난 상황에서 뒤늦게 오심이 드러나게되면 정말 난감해지죠. 심판에 대한 징계나 구단과의 소통 등이 이어져야하는데 그런 일이 벌어진 것 자체로 모두가 만족할만한 대안은 사실상 나오기 힘들어지잖아요. 가장 최선을 찾아야죠. 재발방지에도 신경써야하겠고요.
Q.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결혼은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SNS 등을 보니 가족에 대한 흔적이 보이지 않아서요.
전혀 실례되지않습니다.(웃음) 기자님만 그런 것 물어보셨겠습니까. 편하게 물어봐주세요. 아직 결혼은 하지않았어요. 독신주의자라던가 그런 것은 아니고요. 어쩌다보니 늦어지게 됐습니다. 좀 더 그럴듯한 이유를 내놓고 싶지만 다른 이유가 없는지라 이게 가장 솔직한 답변입니다.
Q.선호하는 이상형이 있을까요?
음…, 특별히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질문을 듣고나니 생각해보게 되네요. 특별히 정해진 이상형은 없어요. 그냥 대화가 잘 통하고 오랜시간을 만나도 편하게 얘기할 수 있는 사람? 계속해서 만나 얘기를 나눴다는 것은 그 자체로 어느 정도는 서로 맞는 부분이 있다는 반증일테니까요. 이게 나이를 먹어가니까 좀 달라지는 것 같아요. 어릴 때는 겉으로 드러나는 매력을 많이봤는데 이제는 편안함, 코드 등 대화를 하고 겪어봐야만 느낄 수 있는 숨은 매력이 더 긍정적으로 다가오는 듯 싶어요.
Q.보통 여성분들은 그래도 자신보다는 키가 커야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하하핫…, 저는 본래 그런 것 따지지 않았어요. 더불어 저보다 큰 사람을 고집한다면 만날 수 있는 폭이 너무 좁아지지 않을까요? 키가 커도 싱거운 사람이 있는 반면에, 크지않아도 듬직하고 크게 느껴지는 사람이 있더라고요. 대화가 잘 통한다는 전제하에 상대가 제 키가 부담스럽지않다면 저도 상대의 키에 크게 신경쓰지않고요. 실제로 제가 만났던 분들 중에서 저보다 큰 사람은 없었습니다.(웃음) 예전에는 여자 키에 대해 편견도 있고 그랬다는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 저는 그런 쪽으로 불편함을 전혀 느끼지못하고 살아왔어요. 오히려 시원시원하고 좋아보인다는 분들은 많으시더라고요.
Q.호감이 있는 남성이 있다는 전제하에 상대 역시 농구에 대해서도 많이 알아야할까요?
아무래도 제가 평생 농구를 해온 사람이고 지금도 농구관련 일을 하고 있으니까 농구에 관심이 많으면 나쁠 것은 없겠죠. 하지만 설사 그렇지않다해도 별로 상관없어요. 만나서 농구 얘기만 할 것도 아니니까요. 계속해서 농구인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코트 밖에서의 저는 농구외에도 관심있는 분야가 적지않아요. 책, 영화, 그림 등등 문화예술 쪽에도 조예는 깊지않지만(웃음) 전반적으로 좋아하는 편이고요. 그런 쪽을 좋아하는 분이 있으시면 같이 신나게 얘기하면서 즐길 자신이 있답니다. 꼭 이성으로서가 아니더라도 편하게 대화가 잘 통하는 분들과는 오래오래 친구로 지내고 있어요.
Q.은퇴한지 상당한 시간이 지났음에도 날씬함을 유지하고 있어요. 체질적으로 살이 안찌는지 아님 꾸준한 관리의 힘인지 궁금합니다.
제 기준으로 봤을 때 저는 잘 찌는 체질같아요. 그래서 ‘체질적으로 날씬함을 유지하고있어요’ 등의 거짓말은 못하겠고요. 꾸준히 관리하고있다고 솔직히 말씀드릴께요. 운동도 많이하는 편이고, 그렇지않은 날은 음식도 조절하고 그러고있어요. 운동을 시작하기 전에는 통통? 아니 뚱뚱에 가까운 체형이었어요. 그러다가 운동을 시작하고 살이 빠지면서 현재의 체형이 되었죠. 스트레스를 받으면 좀 빠지는 체형이기도 하고요. 아무래도 키가 있는 상태에서 살까지 찌면 정말 거구가 되거든요. 그래도 날씬한 쪽이 보는 쪽에서도 부담이 덜하겠죠.(웃음) 저도 쪽 그런 체형으로 살다보니 현재 상태가 편하고요. 갑자기 찐다던가하면 외적인 모습도 그렇지만 몸이 무거워져서 생활이 힘들 것 같아요. 제가 옷을 좀 타이트하게 입는 편인데 어려보이고싶은 마음 그런 것은 진짜 없고요. 그렇게 입어야 저도 꾸준히 긴장을 풀지않고 관리를 할 것 같은 이유가 커요.
Q.모델을 해봐라 등의 얘기는 들어본적 없으세요?
어릴 때는 전혀 없었고요. 은퇴후에는 나이를 잘 모르는 분들같은 경우 말 그대로 넌지시 던지시는 경우는 가끔 있었어요. 나이를 아시는 분들은 좀 더 시간이 흐르면 시니어모델 한번 해보라는 얘기를 하시더라고요.(웃음)
“지금 시대에서 뛰었다면 센터는 아니었을 듯 싶어요”
Q.농구는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요?
저희 아버지가 대학교(국민대) 시절까지 농구를 하셨어요. 유명한 분은 아니셨지만 그래도 농구인이라고 할 수 있죠. 제가 무남독녀 외동딸인데 어릴 때부터 키가 크니까 농구를 시켜야겠다고 생각하셨나봐요. 더불어 아버지께서 꿈을 이루지못해서 딸에게 투영된 것도 있었던 듯 싶고요. 워낙 어릴 때라 제 의사도 물어보지 않으셨어요. 그냥해야돼 하고 시키신거죠. 저희 때는 부모님이 하라면 그냥 하던 시대였잖아요. 사실 저같은 경우 키만 컸지 운동은 썩 좋아하지않았어요. 체육시간에도 버벅거렸고 이래저래 운동하고는 잘맞지 않는 아이였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구를 시키셔서 하게됐습니다. 그때가 초등학교 4학년때에요.
Q.처음에는 어떤 포지션을 맡았나요?
아무래도 키가 있다보니까 딱히 선택의 여지도 없었어요. 그냥 센터였죠. 쭉 5번으로 갔습니다.
Q.학창시절 선후배 중에 라이벌이라고 할만한 선수로는 누가 있었을까요?
제가 농구하던 시절에는 장신자들이 꽤 있었어요. 당장 같은 학교에 1년 후배 김계령이 있었고요. 저희를 ’트윈타워‘로 묶는 기사도 있었지만 선의의 라이벌 혹은 미래의 라이벌로 스토리 구도를 잡아가는 기사도 많이 나왔던 기억이 나요. 그런데 사실 계령이와 저는 플레이 스타일이 완전 달랐어요. 계령이같은 경우 체격도 듬직하고 힘도 좋아요. 그래서 어지간하면 몸싸움에서 밀릴 일이 없었고 힘있게 포스트에서 상대를 제압하는 말 그대로 정통 빅맨이었죠. 반면 저같은 경우 체형이 그렇다보니 골밑에서 부딪히고 비비고 하는 것보다는 달리는 농구가 몸에 잘 맞았어요. 지금으로 따지면 3번 혹은 4번에서 뛰는게 잘 어울리지 않았을까 싶어요. 백투백보다는 페이스업을 즐겼고 패스하는 것도 좋아했죠. 현재 트랜드같았으면 외곽슛도 갈고닦아서 적극적으로 던졌을 것 같아요.
Q.빅맨치고 말랐다고 살을 좀 찌우라는 얘기도 들었을 듯 싶어요.
왜 없었겠어요. 많이 들었죠. 실제로도 신장에 비해서는 몸무게가 적게나갔던지라 몸싸움 등을 위해서라도 많이 좀 먹으라는 말이 계속 나왔습니다. 하지만 체질이라는 것도 있고 잘되지않더라고요. 지금이야 선수들 재능이나 적성에 맞게 포지션이나 플레이 스타일을 만들어주지만 그때는 키가 크면 일단 골밑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을 요구받았어요. 그러다보니 어려움이 좀 있었습니다.
Q.코오롱은 어떻게 입단하게 된것인가요?
그때는 실업시절이라 드래프트가 아닌 자유계약으로 팀을 정했어요. 그래도 학창시절에 꽤 주목을 받았던지라 여러 팀들이 접촉한 것으로 알고있는데 이후의 사정은 전혀 몰라요. 부모님이 코오롱을 선택하셔서 저는 정해준 팀으로 가게된 것 뿐이죠. 아무래도 해당 팀의 사정과 저의 플레이 스타일의 궁합 등 여러 가지를 잘 보고 제일 잘맞는 팀으로 골라줬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Q.그렇게 입단했는데 바로 팀이 해체되어 버렸어요.
그렇죠. 해체된 자세한 내막까지는 제가 알리없고요. IMF때문이라고만 들어서 알고있어요. 어쨌거나 입단하고 딱 한시즌 뛰고 팀이 해체가 되어버리니까 무척 혼란스럽더라고요. 프로와 달리 그때는 입단한 팀이 평생 팀이 되는 경우가 많았어요. 팀을 옮기는 것 조차 수치로 여길정도로 한팀에 모든 것을 걸고 뿌리를 박아야된다고 알고있었죠. 제 농구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절중 하나였습니다. 말이 그렇지 막 고등학교 졸업하고 직장이나 대학교에 들어갔는데 하루아침에 그것이 없어졌다고 생각해보세요. 누구라도 멘붕이 왔을거에요.
“대만행을 결정하고 매국노 소리까지 들었죠”
Q.어쨌거나 상당한 유망주였고, 여러 가지 선택의 수가 있었을텐데 대만행을 결정했어요.
고민도 컸으나 힘들게 결정했죠. 팀이 해체되는 큰일을 겪고나니 정신적인 충격으로인한 스트레스가 너무 컸고 그런 와중에 대만리그를 갈 수 있게 된 것이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제는 당시 국내 여자농구도 프로화가 시작되었다는 겁니다. 첫 드래프트를 앞두고있던 시점이었죠. 개인적으로 당시 드래프트 제도는 여러 가지 부분에서 공평하지 못하다는 느낌을 받았고 거기에 휩쓸리고 싶지가 않더라고요. 더불어 해외에서 농구를 하면서 그곳 문화나 환경도 경험해보고 싶은 마음도 컸습니다. 공부도 겸할 수 있다는 부분도 장점으로 다가왔고요.
Q.해외진출에 대한 당시 인식이나 분위기도 그렇고, 프로 출범과 맞물려 반대의 목소리도 컸을 것 같아요.
큰 정도가 아니었죠. 거의 모든 분들이 반대하셨죠.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가고자하는 의지가 컸고 적지않은 대립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타협의 여지가 없었다는 부분입니다. 제가 국가대표로 뛴 경력이 있기 때문에 해외리그를 가기 위해서는 대한농구협회에서 써준 동의서가 필요했어요. 동의서가 필요하다고 알게된 순간부터 쉽지않겠다고 느끼기는 했어요. 아니라다를까 저의 의지와 상관없이 절대 동의서를 써주지 않더라고요. 도저히 방법이 없더라고요. 귀화를 결심하게된 이유죠.
Q.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귀화라하면 국민정서까지 더해져 매우 나쁘게 받아들여졌던 시기일텐데요.
그렇죠. 모든 면에서 많이 달라진 현재도 귀화만큼은 매우 민감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사실인데 당시에는 어땠겠어요? 엄청난 질타와 비난의 목소리가 쏟아졌습니다. 심지어 저희 부모님까지도 반대하셔서 저와 적지않게 싸웠으니까요. 처음에는 부모님도 저의 뜻을 존중해주고 대만행을 지지하셨습니다. 하지만 부모님 입장에서도 귀화는 전혀 다른 문제로 받아들여지셨나봐요. 외동딸의 귀화 선언에 깜짝 놀라서 그것만큼은 안된다며 세게 반대하셨죠. 앞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어릴때부터 부모님 말씀을 잘듣는 편이었어요. 농구도 그렇게 시작했고 심지어 실업팀을 갈 때도 모든 것을 일임했죠. 그런 의미에서 귀화 결정은 난생 처음으로 부모님과 서로 다른 의견으로 나눠졌던…, 제 인생의 방향을 스스로 결정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던 듯 싶어요. 좋다 나쁘다를 말하는 것이 아닌 선택의 시점을 말하는 것입니다.
Q.부모님까지도 의견을 달리하셨으니 너무 큰 결심을 했고 외롭기도 했을 듯 싶어요.
정말 힘들었죠. 하지만 귀화를 마음먹을 당시부터 어느 정도 각오한 상황이었던지라 마음을 굳게 먹으려고 노력했습니다. 단순한 반대를 떠나 집으로 협박전화까지 왔으며 매국노 소리도 들었죠. 때문에 대만에 갈 때는 정말 굳은 마음을 먹어야만 했습니다. 극심한 반대 여론을 뚫고 간 것이기도 했거니와 실제로 5년자격정지까지 받은 상태인지라 잘못되더라도 돌아올 수가 없었죠. 어쨌든 그렇게 힘들게 대만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는데 막상 가서는 정말 잘지냈어요. 농구적인 부분 외에도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했던 시기였다고 생각합니다.
Q.지금와서 돌아보면 후회스럽지는 않나요?
전혀요.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당시 결정에 대해 후회하는 마음은 없습니다. 물론 국내에 계속있었다면 태극마크도 달고 국가대표로 활약하고 훨씬 평탄한 농구인생을 걸었겠지만…, 그랬다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것 같아요. 풍부한 경험을 쌓음으로서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을 만들었고 이래저래 많은 배움을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힘든 선택이었고 과정이었지만 나름의 가치가 많았던 시간이었습니다. 개인적인 인생으로 봤을때는요.
Q.당시 대만은 프로리그였나요?
프로리그는 아니었고요. 외국인선수가 뛸 수 있었던 리그? 그정도였죠. 지금도 대만은 프로리그가 아니에요. 당시 대만에서의 저는 용병 개념보다는 지금으로보면 아시아쿼터 제도 정도로 보면 될 것 같아요. 그곳에서 8년을 있었는데 마냥 순탄하지는 않았어요. 그 기간동안 크고 작은 부상을 꽤 많이 당했었으니까요. 십자인대수술만 3번을 하는 등 재활의 시간도 길었거든요. 여러 가지 경험을 하면서 배워나가는 생활 자체는 만족스러웠지만 선수로서 부상에 시달리다보니 그런 부분에서는 꽤 힘들었어요. 육체적으로는 물론 정신적으로도 지쳐서 우울증도 심하게 앓아서 치료도 받고 그랬으니까요.
Q.어린 나이에 타국 생활을 했던지라 많이 외로웠을 듯 싶어요.
그런 부분도 있었지 않나싶어요. 만 19세에 갔었으니까요. 그때는 막 외롭다 그런 생각은 많이 들지않았어요. 어쩌면 외로웠지만 그렇지않다고 스스로 부정하고 싶었을 수도 있고요. 어쨌거나 우울증도 찾아오고, 그런 것을 보면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던 듯 싶어요. 제가한 선택이고 뒤가 없었으니까 스스로 계속 강한 마음을 유지하려고 노력은 했지만요. 사실 대만행 자체에는 후회도 불만도 없었어요. 저를 힘들게 했던 것은 오직 부상이었죠. 농구를 즐겁게하고싶어서 간건데 마음처럼 실컷 뛸 수 없게되니까 거기서 오는 심리적인 고통이 컸을 뿐이죠. 그 부분은 국내에 있었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 같아요.
Q.선택에 대한 후회는 없었던거네요?
맞아요. 저는 지금도 그래요. 뭔가를 자주 바꾸는 성격도 아니고 만약 그래야된다면 충분히 시간을 가지고 깊은 고민을 해요. 그렇게 선택한 것에 대해서는 어떤 힘든 일이 닥쳐도 후회는 하지않고요. 인생사가 그렇잖아요. 선택에는 책임이 따르고 그것을 감내해야하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이니까요. 더불어 그런 경험이 지금의 긍정적인 저를 만들었다는 생각도 들고요.
Q.국내 복귀는 어떻게 결정한 것인가요?
대만에서 8년을 뛰었는데 7년째 되던해 신세계에서 한번 연락이 왔어요. 5년 자격정지도 풀린 상태였으니까요. 처음에는 거절을 했어요. 하지만 당시 신세계 김윤호 감독님이 직접 대만까지 오셔서 경기를 보러오시는 등 많은 정성을 보이시더라고요. 그리고 다음해에 또 감독님이 찾아오시고 연락도 취하시면서 생각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아버지도 건강이 안좋으셨던지라 이래저래 두 번째 선택을 해야할 시기가 온 것인가 고민을 깊게하게 됐죠. 그래서 심사숙고 끝에 국적회복 절차를 거쳐서 국내로 돌아가게 됐습니다.
“다른 이들에게 꿈을 나눠줄 수 있도록 더 많이 배우고 노력하겠습니다”
Q.국내에서의 첫 시즌에 쏠쏠한 활약을 하면서 신인상을 받게 됐는데 별로 원하지 않았다고 들었어요.
맞아요.(웃음) 제가 당시 나이가 20대 후반이었어요. 나이 상으로도 그렇고 말이 신인이지. 꽤 긴시간동안 경기를 계속 뛰어왔잖아요. 같이 운동했던 동기나 후배들도 리그에서 베테랑이 되어가고있던 시점이었고요. 어찌보면 불공평한 경쟁이었고 말 그대로 신인상인데 파릇파릇한 진짜 신인들에게 양보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어요. 당시 나이 정도에 은퇴하는 선수도 적지않은 상황에서 이래저래 민망하더라고요. 그래서 신인상을 안받으면 안되냐고 구단을 통해 사무국에 문의까지했지만 규정상 어쩔 수 없다는 답변만 들었습니다. 어쩌겠어요. 이미 정해진 규정을 제가 싫다고 어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요. 정말 쑥스러웠습니다.
Q.함께 뛰었던 외국인선수중 인상깊었던 선수로는 누가 있을까요?
엘레나 비어드요. 질문하신 순간부터 바로 팍 떠올랐어요. 개인기를 앞세운 폭발적인 득점력이 인상적이었던 친구에요. 유머감각도 있고 성격도 좋아 동료들과 잘 어울렸고요. 기량적으로는 리그 상위권 선수였지만 문제는 이 친구는 슈팅가드였다는 점이에요. 당시 대부분 팀에서 외국인선수를 빅맨으로 뽑았는데 신세계에서는 저를 너무 믿은 나머지 외국인가드를 뽑아버린 것이란 말이에요.(웃음) 결국 제가 상대 외국인 빅맨들을 맡아야했죠. 당시 외국인선수들 수준도 매우 높았었거든요. 그렇다고 토종 빅맨이 많아서 로테이션으로 상대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어요. 저랑 같은 포지션에 허윤자 선수 정도가 기억나네요. 어쨌거나 그렇게 시즌내내 외국인빅맨들과 겨루다보니 몸이 많이 상하게 되었고 특히 무릎에 무리가 많이 가게되었습니다. 이후 다시 부상이 잦아지기 시작하면서 첫시즌만큼도 활약하지못하고 예상보다 일찍 은퇴하게되어 버렸죠. 개인적으로도 아쉽고 팀에게도 미안하고 그랬습니다. 제가 좀 더 튼튼했더라면 좋았을텐데 타고난 내구력은 어떻게 잘안되더라고요.
Q.은퇴하고 바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어요.
여행도 다니면서 8개월 정도 쉰 것 같아요. 그러다가 모교인 초등학교에서 코치를 뽑는다고해서 거기서부터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게 됐고 이후 숭의여중, 19세 대표팀 등에서 7년 정도 아마추어 코치생활을 이어갔습니다. 이후 잠깐 쉬는 기간에 임달식 감독님에게서 연락이 와서 함께 중국여자프로농구 산시 신루이에 코치로 따라갔죠. 하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감독님께서 일찍 하차하게되셨고 저는 사령탑이 비어있는 동안 선수들을 데리고 한국으로 전지훈련가는 것도 통솔하는 등 공백을 채우는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후임 감독으로 이탈리아 감독님이 오셨는데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커리어도 좋고 경력도 많은 분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런 상황에서 KEB하나은행(현 부천 하나원큐)에서 코치 제의가 들어왔는데 중국에 남아있는 것보다는 국내로 들어오는 쪽이 여러모로 낫겠다싶어서 다시 WKBL와 인연이 닿게됐죠.
Q.오늘 너무 감사했습니다. 마지막으로 ’10년 뒤의 정진경‘에게 한마디 어떠실까요?
진경아. 열심히 노력하고 열정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모습 정말 보기좋다. 나이먹었다고 특별히 달라질 것은 없어.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배울 수 있는 것은 가리지않고 배워가면서 더 나은 사람으로 성장해가도록 노력해보자. 배움에는 나이가 필요없고 뜻을 펼치는데도 시기가 정해져있지않잖아. 다른 이들에게 꿈을 나눠주면서 너도 계속 꿈을 꿀 수 있으면 좋겠다. 사랑해. 정진경.
#글_김종수 칼럼니스트
#사진_본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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