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 혹한기도 피해갔다"…일본 벤처시장이 잘 되는 이유 [긱스]
일본 진출 기업을 위한 A to Z
무신사 에이블리 지그재그 등 국내 패션 플랫폼이 잇따라 일본 시장에 진출하고 있습니다. 인공지능(AI) 솔루션 기업 올거나이즈는 지난해 본사 기능을 미국에서 일본으로 옮기고 도쿄증시 상장을 준비하고 있고요. 글로벌 투자 한파에도 일본 벤처투자 시장이 여전히 활발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한경 긱스(Geeks)가 지난달 26일 디캠프(은행권청년창업재단)가 마련한 일본 벤처캐피털(VC) 세미나에서 이경훈 글로벌브레인 한국대표와 한상현 팍샤캐피털 파트너를 만나 일본 벤처시장의 현황과 성공적인 일본 진출을 위한 A to Z를 물어봤습니다.
지난해 일본에서 가장 많이 투자한 벤처캐피털(VC)인 글로벌브레인이 해외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2014년 한국에 처음 진출한 이후 지난해 독일과 인도까지 지난 10년간 해외 거점을 10곳으로 늘렸다. 한국에 투자한 기업만 직방, 블라인드, 데일리호텔, 두나무 등 20여개사에 이른다.
이경훈 글로벌브레인 한국대표는 최근 한경 긱스(Geeks)와의 인터뷰에서 "일본은 글로벌 투자 혹한기에도 벤처시장 열기가 꺾이지 않고 있다"며 "기업공개(IPO) 진입장벽이 낮아 VC의 투자금 회수 기회가 열려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글로벌브레인은 투자 기업의 일본 진출을 돕고 있다. 이 대표는 "패션·뷰티 소비자 직접판매(D2C) 커머스부터 콘텐츠·엔터테인먼트는 한국이 세계적으로 잘하기 때문에 일본 시장에 많이 진출하고 있다"며 "기업용 서비스형 소프트웨어(SaaS)도 한국 스타트업이 강점이 있는 분야"라고 설명했다.
Q. 지난해 11월 글로벌브레인 한국 대표로 선임됐는데요. 일본 VC를 선택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A. 국비유학생으로 일본 교토대 물리공학과에 입학하면서 일본과 인연을 맺게 됐는데요. 대학 졸업 후 정말 재밌어하는 일이 뭔지 몰라서 컨설팅 회사에 들어갔어요. 다양한 프로젝트를 해볼 수 있으니깐요. 한국 노무라종합연구소를 시작으로 보스턴컨설팅그룹으로 옮기면서 일본으로 다시 건너갔고요. 그곳에서 대기업과 스타트업의 제휴 프로젝트를 담당하면서 인공지능 로봇 스타트업 AKA로부터 스카우트를 제안받았어요. 2015년부터 3년간 최고전략책임자(CSO)로 일하며 스타트업을 직접 경험했죠. 컨설팅 업무를 하면서 회사를 돕는 일에 보람을 느꼈어요. 스타트업 투자뿐만 아니라 핸즈온(직접) 지원에 특화된 글로벌브레인을 선택한 이유죠. 100명 직원 중 절반이 스타트업 지원 인력일 정도예요.
Q. 지금까지 투자한 주요 스타트업은 어디인가요.
A. 일본 기업 중엔 MCN 스타트업 라이버와 메타버스 플랫폼 크라스타가 대표적인 포트폴리오입니다. 현재 한국 스타트업 중에선 고객 관리 솔루션 채널톡을 운영하는 채널코퍼레이션, 기업용 인공지능(AI) 솔루션 업체 올거나이즈, 웹드라마 제작 기업 와이낫미디어를 관리하고 있어요. 이중 올거나이즈와 와이낫미디어에는 제가 직접 투자했고요. 자금 유동성이 풍부하기 때문에 스타트업 투자가 여전히 활발한 상황입니다. 글로벌브레인도 한국 스타트업 투자를 줄이지 않을 거고요.
Q. 글로벌 투자 혹한기에 일본 벤처 시장은 왜 꺾이지 않았나요.
A. 한국 벤처투자가 급감한 원인으로는 높은 IPO 진입 장벽이 꼽히지만, 일본은 반대입니다. IPO 진입장벽이 낮아 벤처캐피털(VC)의 투자금 회수 기회가 열려있어 투자가 활발합니다. 일본은 코스닥과 코넥스 중간 정도의 마더스 시장이 있어 적자 스타트업도 쉽게 상장할 수 있어요. 마더스 상장사의 기업가치는 시초가 중간값 기준 1000억원 정도인데요. 한국 스타트업 기준 시리즈 A, B 정도만 돼도 상장하는 거죠.
Q. 어떤 분야 스타트업이 일본 시장에 진출하기 유리할까요.
A. 무신사 지그재그 에이블리 등 한국 패션 플랫폼이 줄줄이 일본 시장에 진출했죠. 글로벌브레인이 투자한 올거나이즈, 채널톡, 와이낫미디어도 일본 시장에 성공적으로 진출한 경우입니다. 패션·뷰티 소비자 직접판매(D2C) 커머스부터 콘텐츠·엔터테인먼트는 한국이 세계적으로 잘하기 때문에 일본 시장에 많이 진출하고 있습니다. 또 기업용 서비스형 소프트웨어(SaaS)도 한국 스타트업이 강점이 있는 분야죠. 한국은 모바일 서비스가 고도화했기 때문에 프러덕트를 정말 잘 만들어냅니다. 한국은 스타트업엔 좋은 개발자가 많아요. 일본은 주로 대기업에 있는데 말이죠.
Q. 한국 스타트업이 일본 시장에 성공적으로 진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A. 해외 파트너사를 선정해 리셀러를 만나는 방식보단 현지 법인을 만들고 창업자가 계속 왔다 갔다 하면서 키워나가는 방식이 성공 가능성을 높인다고 봐요. 가장 중요한 건 좋은 법인장을 뽑는 일입니다. 일본 문화를 잘 알고 본사 대표와 끈끈한 유대감으로 혼자 스타트업 운영을 견뎌낼 사람으로 말이죠. 올거나이즈가 대표적인 성공 사례인데요. 지난해 7월 회사의 본사 기능을 미국 휴스턴에서 일본 도쿄로 옮기고 도쿄거래소 상장을 준비하고 있죠. 이창수 대표가 올거나이즈 이전에 파이브락스를 창업했을 때부터 일본 법인장을 했던 분이 계속 맡고 있는데, 혼자서 자기 회사처럼 일하면서 일본 매출을 만들어냈어요. 글로벌브레인은 파이브락스 때부터 올거나이즈까지 계속 투자하면서 일본 진출을 도왔고요.
Q. 글로벌브레인은 기업벤처캐피털(CVC) 펀드 운용사로 유명한데, 강점이 뭔가요.
A. 한 기업을 펀드 LP로 두는 CVC 펀드를 운용하는 게 특징인데요. 일본은 자체 CVC를 두는 기업도 있지만 외부 투자전문가에게 맡기는 곳도 많습니다. 각자 잘하는 것을 하자는 거죠. 글로벌브레인은 CVC 지원실에서 기업마다 원하는 섹터에 전문가를 배치하는 등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또 섹터별로 한 펀드만 운용해 경쟁사 간 충돌되는 경우는 없고요.
Q. CVC 펀드 덕분에 운용자산(AUM)도 많이 늘었나요.
A. 글로벌브레인은 지난해 투자 건수 150건, 투자금액 228억엔을 올리며 일본 VC 업계 1위를 기록했습니다. 전체 운용자산(AUM) 2200억엔(약 2조원)의 절반가량이 CVC 펀드 자산이고요. 현재 12개 CVC 펀드를 운용하고 있는데, 대표적인 펀드 LP는 일본 통신회사 KDDI와 미쯔이부동산디벨로퍼로 각각 4000억원 규모 펀드를 운용 중입니다. 특히 KDDI는 3호 펀드를 출자했을 정도예요.
Q. 글로벌브레인은 최근 10년 사이 해외 거점을 10곳으로 확대했는데요. 가장 주력하는 지역과 산업은 어디인가요.
A. 제일 공격적으로 투자하는 지역은 유럽입니다. 현재 영국과 독일에 거점을 두고 있는데 제2의 본사를 유럽에 두고자 합니다. 유럽에는 핀테크나 딥테크 분야 좋은 스타트업이 많이 생겨나고 있는데 비해 VC 시장 자체는 미국과 중국보다 활발하지는 않아요. 그래서 기회가 있다고 보는 거죠. 전 산업에 분야에 투자하고 있지만, 현재 바이오·로봇·우주·AI 등 딥테크 분야 전문가를 늘리며 팀의 역량을 높이고 있습니다.
A. 유망 스타트업을 발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요. 특히 한국 VC 업계 자체가 일본의 벤치마크 대상입니다. 한국엔 리픽싱 등 다양한 금융기법이 있고 일본에 없는 세컨더리펀드나 수천억 원의 밸류에이션을 감당해줄 수 있는 그로스 펀드도 많고요. 글로벌브레인은 올해 중 공동운용사(Co-GP) 형태로 국내에서 벤처펀드를 출시할 계획입니다.
한상현 팍샤캐피털 파트너는 "일본은 초기 단계에 IPO가 가능해 창업가들이 빠르게 성장하려는 동기가 적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일본의 국내총생산(GDP)이 한국보다 2.7배 크지만 유니콘(기업가치 1조원 이상 비상장사) 수는 10개사로 한국의 15개사보다 적은 것도 이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일본 VC 입장에서 '리턴'이 높은 한국 스타트업이 매력적인 이유다.
알고리즘 펀드 2호를 출시한 팍샤캐피털은 한국에서 AI 기술을 통해 기존 산업의 디지털 전환(DX)을 이끄는 스타트업을 발굴하고 있다. 그는 일본 진출을 준비하는 창업가들을 향해 "일본에선 명함 교환법, 압존법 등 비즈니스 매너가 특히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Q. 일본 스타트업은 기업가치가 작은 편인데, 왜 그런가요.
A. 한국 스타트업은 투자단계가 올라갈수록 조달금액이 크게 뛰는데 일본은 그렇지 않습니다. 기업당 평균 펀딩 금액을 보면 시리즈 A 단계가 1억6000만엔, 시리즈 B 3억엔, 시리즈 C 3억7000만엔 정도로 펀딩 금액 차이가 크지 않아요. 일본 스타트업은 대부분 시리즈 B, C 단계에 IPO로 가기 때문에 펀딩을 많이 받지 않아요. 그래서 기업평가 가치도 낮은 편이죠.
Q. 일본 VC 입장에서 한국 스타트업이 왜 매력적인가요.
A. 일본은 초기 단계에 IPO가 가능하기 때문에 창업가들도 빠르게 성장하려는 동기가 적어요. 한국 스타트업처럼 유니콘(기업가치 1조원 이상 비상장사) 기업에 도전하는 곳들이 많지 않고요. 또 일본은 내수 시장 규모가 크다 보니 글로벌 진출에 대한 필요가 적은데, 한국은 반대죠. 유니콘으로 성장해 한국 시장을 장악하든, 글로벌 시장으로 나가든 해야 살아남는 구조이기 때문에 좋은 기업을 고를 수 있으면 돌아오는 수익이 크다는 게 매력적입니다.
Q. 팍샤테크놀로지가 팍샤캐피털을 만든 이유는 무엇인가요.
A. 팍샤테크놀로지는 AI 솔루션 기업으로 도쿄 스탠더드 상장사입니다. 자회사인 팍샤캐피털은 5년 전 설립된 신생 VC로 직원은 10명입니다. 팍샤 SPARX 알고리즘펀드 1, 2호를 운영 중이며 전체 운용자산은 1200억원 규모입니다. 팍샤캐피털은 재무적 투자를 하고 있지만 모기업과 AI 솔루션과 시너지를 낼 수 있다면 협력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Q. 증권맨 출신으로 지난해 11월 팍샤캐피털에 합류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A. 와세다대 교육학부 사회과학과를 졸업하고 2014년부터 2018년까지 미즈호증권에서 지점영업부터 펀드 기획 등을 담당했습니다. 그러다 친구인 권진 대표가 창업한 채용플랫폼 더팀스에서 3년간 계약서 작성부터 팁스 프로젝트, 영업까지 해봤습니다. 대기업과 달리 스스로 필요한 것을 찾아서 일하는 문화라 생소했고, '이런 것까지 해야 하나' 싶기도 했죠. 하지만 덕분에 지금 VC에서 일하면서 스타트업에 감정이입이 되는 것 같습니다. 직전까지 한국 노무라종합연구소에서 리서치 업무를 하다가 지난해 11월 알고리즘펀드 2호 운용을 지원하기 위해 팍샤캐피털 한국 담당으로 오게 됐습니다.
Q. 이번 알고리즘 펀드 2호 운용에서 도쿄대 마츠오연구소는 어떤 역할을 하나요.
A. 마츠오 유타카 교수가 이끄는 마츠오연구소는 일본 산업계 AI 인재를 육성해 기업의 DX를 선도하는 역할을 하는 곳으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이번 펀드에는 마츠오연구소가 자회사 법인을 만들어 참여하는데요. 투자 검토 대상 기업의 AI 기술을 검수하고 자문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일본 대학이 벤처투자에 적극적인 편이지만, 교수가 법인을 세워 펀드에 참여하는 것은 특별한 경우입니다.
Q. 마츠오연구소 출신 창업가로는 누가 있나요.
A. 우에노야마 카츠야 팍샤테크놀로지 대표도 마츠오연구소에서 박사 과정을 마쳤고요. 이밖에 마츠오연구소 출신이 창업한 일본 유명 스타트업으로는 정보 큐레이션 서비스 상장사인 구노시(Gunosy), AI 강화학습 분야 딥엑스(DeepX), AI 솔루션 분야 에이시스(Aces), 소비자 정보 분석 분야 에이아이큐(AiQ), 콘텐츠 자동생산 기업 엘리자(ELYZA) 등이 꼽힙니다.
Q. 2호 펀드가 한국에서 주목하는 분야는 어디인가요.
A. 기존 산업을 AI로 시너지 낼 수 있거나 혁신성장이 가능한 기업을 찾고 있습니다. 60%는 일본 기업에 투자하고 나머지는 동남아, 한국, 중국 스타트업에 투자할 예정입니다. 1호 펀드에선 국내 스타트업 가운데 비팩토리, 힌스, 콜랩아시아, 김캐디, 글로랑, 캐스팅엔에 투자했는데요. 2호는 투자 대상을 찾고 있는데, 시장을 얼마나 장악해 매출을 올릴 수 있느냐를 중요하게 보고 있습니다.
Q. 국내 스타트업이 일본 시장에 성공적으로 진출하려면 무엇을 기억해야 할까요.
A. 우선 일본 시장을 이해해야죠. 상장이 목표면 주식회사, 비용 효율화를 하려면 합동회사(LLP)로 설립하는 게 유리합니다. 또 일본은 한국에 비해 고용 유연성이 높아 전문가를 확보하는 게 수월합니다. 정규직은 일부만 두고 나머지는 업무위탁으로 고용하는 거죠. 마지막으로 일본은 비즈니스 매너가 특히 중요한 나라입니다. 예를 들어, 명함을 교환할 때는 오른손으로 자신의 명함을 주면서 동시에 왼손으로는 상대방의 명함을 받아야 합니다. 또 회사 이름 뒤에 사람을 존중할 때 쓰는 '사마'를 붙여서 표현하는 게 좋고요.
허란 기자 why@hankyung.com
사진=강은구 영상정보부장 egka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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