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언스샷] 나비에 암흑군주 사우론의 이름 붙인 까닭은

이영완 과학전문기자 2023. 5. 9.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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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서 발견한 나비 2종, ‘사우로나’ 명명
사우론 공룡, 간달프 나방, 골룸 달팽이도
과학과 생태계 보전에 관심 유도 위해
디캐프리오, 오바마 이름 붙인 신종도
영화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암흑군주 사우론의 눈(오른쪽)을 닮은 나비에 사우론이라는 이름이 붙었다./영국 자연사박물관, New Line Cinema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지켜보는 눈이 달린 나비가 있다. 영화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암흑의 군주 사우론(Sauron)의 이름을 딴 나비이다. 영국 자연사박물관은 지난 7일(현지 시각) “남미에서 처음 발견한 나비가 날개 가장자리 둥근 무늬가 마치 영화에서 세상을 노려보던 눈을 연상시켜 속명(屬名)을 ‘사우로나(Saurona)’로 붙였다”고 밝혔다.

영화의 등장인물이나 실제 영화배우, 심지어 미국 대통령의 이름을 딴 동물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단순한 재밋거리로 한 행동이 아니다. 과학자들은 과학 연구와 생태계 보전에 관한 관심을 유도하기 위해 일반인에게 친숙한 이름을 새로 발견한 생물 종에 붙이고 있다.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암흑군주 사우론의 이름이 학명에 붙은 나비. 날개에 사우론의 눈을 닮은 무늬가 있다./영국 자연사막물관

◇나비 날개에 사우론의 눈 달려

사우론은 J. R. R. 톨킨의 소설 ‘반지의 제왕’과 이를 바탕으로 한 영화에 등장하는 암흑의 군주이다. 절대 반지의 힘으로 지은 바랏두르의 탑에서 붉은 눈을 부릅뜨고 세상을 감시하는 것으로 묘사됐다.

자연사박물관의 블랑카 우에르타스(Blanca Huertas) 박사는 주황색 날개 가장자리에 검은 테두리 안에 흰 점이 있는 모습을 가진 나비를 발견하고 사우론의 이름을 붙였다. 바로 ‘사우로나 트리앵굴라(Saurona triangula)’와 ‘사우로나 아우리게라(Saurona aurigera)’이다.

과학자들이 생물에 붙이는 이름인 학명은 분류 체계에서 가장 낮은 단계인 종명(種名)을 뒤에 두고, 그보다 한 단계 높은 속명을 앞에 둔다. 사우로나는 독일 알렉산더 쾨니히 동물연구박물관의 마리앤 에스펠란드(Marianne Espeland) 박사가 이끈 국제 공동 연구진이 지난달 국제 학술지 ‘나비 분류학’에 발표한 신발견 나비 속 중 하나이다. 블랑카 박사는 “특이한 이름을 붙이면 아직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나비들에게도 관심을 유도할 수 있을 것”이라며 “매우 비슷하게 생긴 종들 사이에서도 칙칙함 속에 가려졌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사우론의 이름을 딴 동물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이미 소똥구리, 개구리, 공룡 등이 사우론의 이름을 얻었다. 일례로 지난 2012년 이탈리아 몬테바르키 고생물학연구소 과학자들은 모로코에서 발굴된 육식공룡 두개골 화석에 ‘사우로니옵스 파키톨루스(Sauroniops pachytholus)’란 학명을 붙였다. 속명은 그리스어로 ‘사우론의 눈’이라는 뜻이다.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착한 마법사 간달프(Gandalf)의 이름을 단 포유류 화석(Mithrandir)도 있다. 게와 나방, 딱정벌레도 그의 이름을 땄다. 영화에서 원래 호빗이었다가 괴물로 변한 골룸(Gollum)은 갯민숭달팽이(Smeagol 속)와 기생말벌(Gollumiella 속), 물고기(Gollum galaxias) 이름에 올랐다.

2012년 이탈리아 몬테바르키 고생물학연구소 과학자들은 모로코에서 발굴된 육식공룡 두개골 화석에 사우론의 이름을 따 '사우로니옵스 파키톨루스(Sauroniops pachytholus)'란 학명을 붙였다./The Dinosaur Database

◇DNA 연구 통해 새로운 나비 속 발견

나비는 전체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이 연구되는 곤충이지만, 겉모습이 독특하거나 화려한 종에 연구가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나비는 날개 색이나 무늬로 종을 구분하지만 서로 겹치는 경우가 많다. 블랑카 박사는 “이번에 연구한 나비들은 남미 열대지역에 널리 분포하지만, 생김새가 비슷해 제대로 연구되지 않았다”며 “이번에 400여종의 나비에 대해 DNA 분석을 통해 새로 분류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연구진은 이번에 사우로나를 포함해 9개의 새로운 속을 찾아냈다. 그중에는 역시 블랑카 박사가 명명한 ‘아르헨테리아(Argenteria)’ 속도 있다. 아르헨테리아는 은광(銀鑛)이라는 뜻으로, 날개에 은빛 비늘이 있어 이런 이름을 붙였다. 현재 이 속에는 6종이 있지만, 더 많은 종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연구진은 밝혔다.

이번 연구진은 영화 캐릭터의 이름을 통해 나비 연구에 좀 더 관심을 가지도록 유도할 수 있다고 기대했다. 블랑카 박사는 “이미 멸종 위기에 처한 나비들도 있다”며 “앞으로 더 많은 종이 발견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자연사박물관은 사우로나 속 나비도 지금까지 두 종(種)이자만, 아직 미발견종이 많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호주 과학자는 2019년에 발생한 대형 산불로 파괴된 생태계를 복원하기 위한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새로 발견된 딱정벌레 3종에 포켓몬에 나오는 요괴 이름을 붙였다./Yun Hsiao

◇환경보호 앞장선 할리우드 배우 이름도

과학자들은 소설이나 영화에 나오는 가상의 인물을 새로 발견한 동물에 붙여 대중의 관심을 유도한다. 2021년 미국 아스턴 뉴 멕시코대의 다렌 폴락(Darren Pollock) 교수와 호주 국립곤충박물관의 윤 샤오(Yun Hsiao) 박사는 2019년에 호주에서 발생한 대형 산불로 파괴된 생태계를 복원하기 위한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새로 발견된 딱정벌레 3종에 애니메이션 포켓몬(Pokémon)에 나오는 요괴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배우와 대통령의 이름을 딴 동물도 있다. 영국 왕립 큐 식물원의 마틴 칙(Martin Cheek) 박사 연구진은 지난해 1월 국제 학술지 ‘피어제이(PeerJ)’에 “카메룬에서 발견한 식물 신종(新種)에 ‘우바리옵시스 디캐프리오(Uvariopsis dicaprio)’란 학명(學名)을 붙였다”고 밝혔다. 종명의 디캐프리오는 바로 할리우드 배우의 이름이다.

줄기에 황록색 꽃이 피는 이 상록수는 카메룬의 이보(Ebo) 숲에서 처음 발견됐다. 이보 숲은 고릴라와 침팬지, 숲코끼리(둥근귀코끼리) 같은 멸종위기 동물과 다양한 희귀식물들이 사는 원시림이다. 칙 박사는 “디캐프리오가 이보 숲의 벌목을 멈추게 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줬다고 생각한다”고 명명의 의미를 설명했다.

카메룬에서 발견된 식물 신종(新種) ‘우바리옵시스 디캐프리오(Uvariopsis dicaprio)’. 줄기에 황록색 꽃이 핀다./영국 큐 식물원

카메룬 정부가 2020년 이보 숲의 벌목을 허가하자 전 세계 과학자들이 멸종 위기 동식물 보호를 위해 벌목 허가를 취소해달라고 청원했다. 디캐프리오기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과학자들의 청원 내용을 올리자, 팔로워 수백만명이 벌목 반대 캠페인에 동참했다. 카메룬 정부는 이후 벌목 허가를 취소했다.

디캐프리오는 앞서 1998년 환경보호를 위해 자신의 이름을 딴 재단을 세웠으며, 2016년 유엔으로부터 환경보호 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디캐프리오의 이름이 학명에 붙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18년 필리핀과 네덜란드 과학자들은 말레이시아 보르네오섬에서 처음 발견한 수생 곤충에 ‘그루벨리누스 리어나도디캐프리오이(Grouvellinus leonardodicaprioi)’라는 학명을 붙였다. 시냇물에 사는 이 곤충은 몸길이가 채 3㎜도 안 된다. 연구진은 “아무리 작은 곤충이라도 소중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디캐프리오의 이름을 땄다”고 밝혔다.

◇멸종이란 이름을 가진 꽃

대통령도 학명에 등장한다.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임기 중 환경보호와 과학발전에 크게 이바지해 무려 9종에 이름이 들어갔다. 대통령으로는 제26대 시어도어 루스벨트(7종)를 넘는 역대 1위 기록이다.

이를테면 2016년 하와이 산호초에서 새로 발견된 열대어는 파파하노모쿠아키아 해양보호구역을 확장한 공로를 기리기 위해 ‘토사노이데스 오바마((Tosanoides obama)’로 명명했다. 2011년 아프리카 콩고에서 발견된 신종 물고기엔 ‘텔레오그라마 오바마오룸(Teleogramma obamaorum)’이란 이름이 붙었는데, 오바마와 아내 미셸이 함께 아프리카의 과학 교육과 환경보호에 이바지한 공로를 기린 것이다.

2011년 11월 남미 에콰도르에서 재발견된 ‘가스테란투스 익스팅크투스(Gasteranthus extinctus)'. 종명이 멸종이란 뜻이다./미국 필드 자연사박물관

영화 등장인물이나 배우처럼 화려한 이름 대신 참혹한 학명을 가진 식물도 있다. 바로 에콰도르 자생식물인 ‘가스테란투스 익스팅크투스(Gasteranthus extinctus)’이다. 힉명 중 뒤쪽 종명(種名)은 멸종(extinct)이란 단어에서 왔다.

익스팅크투스는 1981년 처음 채집됐다. 과학자들이 2000년에 학명을 붙일 때는 이미 서식지가 완전히 파괴된 상태였다. 에콰도르 정부가 숲을 대대적으로 개간해 농지로 만들면서 서부 열대우림이 97% 이상 사라졌다. 과학자들은 미처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사라진 꽃을 보고 후대에 교훈을 주기 위해 멸종이란 이름을 붙였다.

다행히 이름 그대로 40년 전에 이미 멸종했다고 생각한 꽃이 다시 발견됐다. 미국 시카고 필드 자연사박물관의 나이절 피트먼 박사 연구진은 지난해 4월 국제 학술지 ‘파이토키스(PhytoKeys)’에 “에콰도르 서부 센티넬라 능선의 폭포 근처에서 멸종했다고 생각했던 가스테란투스 익스팅크투스가 여전히 자연에 있는 것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어쩌면 인간이 붙인 이름이 동물과 식물의 운명을 좌우할지 모른다.

참고자료

Systematic Entomology(2023), DOI: https://doi.org/10.1111/syen.12590

Plant Biology(2022), DOI: https://doi.org/10.7717/peerj.12614

The Canadian Entomologist(2021), DOI: https://doi.org/10.4039/tce.2020.74

ZooKeys(2016), DOI: https://doi.org/10.3897/zookeys.641.11500

Cretaceous Research(2013), DOI: https://doi.org/10.1016/j.cretres.2012.09.002

Acta Palaeontologica Polonica(2012), DOI: http://dx.doi.org/10.4202/app.2011.0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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