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멱칼럼]법 위에 선 사람들

송길호 2023. 5. 9.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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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후 관점 디자이너]‘뻔뻔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전적 의미로는 ‘부끄러운 짓을 하고도 염치(廉恥)없이 태연하다’라는 뜻입니다. 염치라는 단어는 살필 염(廉), 부끄러울 치(恥)라는 글자로 이뤄져 있습니다. 부끄러움을 살핀다는 뜻이죠.

요즘 정치를 보면 뻔뻔한 사람들이 너무 차고 넘쳐 안타깝다는 말로는 감정을 설명하기 힘듭니다. 경선의 무대 뒤에서 봉투를 주고 받으며 그들이 나눈 추악한 말들을 방송을 통해 직접 귀로 들은 국민들은 경악합니다. 오죽하면 재판부가 검찰의 구형보다 더 강한 처벌을 내렸을까요? 그러나 ‘같은 편 그들’의 반응은 뜻밖입니다. ‘밥값도 안되는 돈’ ‘관행이었다’ ‘왜 검찰이 그런 사실을 흘리느냐’ 는 등의 상식밖의 말들이 사과보다 앞섭니다. “관행이다”라는 말은 이런 불법적인 일을 지금까지 계속 해왔다는 말로 들렸습니다. 참으로 어이가 없습니다. ‘염치없이 태연한 정도’를 넘어 상대방을 공격까지 하는 그들을 어찌 이해해야 할까요. 최소한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기본적인 상식도, 최소한의 정치인이 가져야 할 양심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대중은 이슈가 아니라 이슈를 다루는 태도를 보고 지지를 결정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건 자체도 어이가 없는데 그 사건을 다루는 태도는 더 상식 밖이니 말입니다. 그들은 어느 정도 돼야 부끄러움을 느끼는지 궁금해질 정도입니다. 거짓말이 드러나도 사과는 커녕 “돈벌게 해줘서 고맙다”는 태도를 보이고, 논리적인 답변을 하는 장관을 ‘천하제일혀’라고 비웃습니다. “그 생각은 이러한 증거, 근거, 논거에 의해 틀렸다”거나, “이런 부분이 다르지만 우리의 생각은 이렇다”는 식의 소통이 상식이 아닐까요?

생각이 다르면 토론(debate)이 시작돼야 합니다. 상대방과 의견이 다르면 그 다름이 어느 부분에서 생겨났는지, 어떤 부분의 생각이 다른지를 대화를 통해 그 차이를 좁히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 상식적인 사회입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우리의 정치는 생각이 다르면 공격이 시작됩니다. 좌표를 찍고, 입에 담지 못한 말들을 수백, 수천건의 문자에 담아 보내며 상대방을 압박하는 수단으로 씁니다. 이것이 일본의 이지메(イジメ)랑 뭐가 다른지 모르겠습니다.

진보와 보수는 ‘가치의 문제’에 의해 구분되는 것이지 ‘옮고 그름’으로 나눠지는 개념이 아닙니다. 우리는 진보와 보수의 가치를 논하는 토론을 현실정치에서 볼 수 없습니다. 그저 ‘내편 네편’만 있을 뿐입니다.

진보와 보수의 가치는 흑백논리처럼 색깔로 나누어지는 것인가요. 일반인의 상식으로는 전혀 이해하지못할 일들이 왜 정치판에서는 그리 빈번하게 일어나는지 의아하고 궁금할 뿐입니다. 예전에 있던 투서(投書)는 이제 이익단체가 자기 편을 위해 대신 ‘고소(告訴)’해주는 것으로 바뀌었고, 자기 의견을 표현하는 데모는 상대방을 겁박하고 위협하는 수단으로 변질됐습니다.

음서제(蔭敍制)는 높은 벼슬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자손은 과거를 치르지 않고도 관리가 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였습니다. 현실에서도 현대판 음서제가 존재합니다. 노동자가 일정 기간 근무하면 그들 자녀에게 혜택을 주는 것을 명문화했습니다. 그것을 없애자는 주장에 이미 노조측은 ‘이미 사문화된 제도’라며 어이 없는 대응을 합니다. 어떤 집단은 이 사건에 ‘노동자 탄압’이라는 단어를 써 방패로 쓰려합니다. 재벌세습에 반대하던 그 노동자들의 큰 목소리가 부끄럽지 않나 묻고 싶습니다.

정당한 검찰의 수사도 ‘야당탄압’이라는 한 단어로 자기를 지키는 치트키처럼 쓰려합니다. 이런 것들이 상식적입니까? 정치도 노동자의 권리도 특정 집단이 나서면서 법을 넘어서는 존재가 되고 있습니다. 초법적인 존재가 등장하면 민주주의는 물론 공산주의 조차도 망친다는 것은 긴 시간 역사를 통해 증명된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제 물어야 합니다. 누가 누구 위에 있습니까? 누가 누구를 위해 존재합니까? 부끄러움은 압니까? 이 질문을 다시 시작할 때입니다.

송길호 (khsong@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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