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中과 공급망 경쟁…EU가 '가격 보다 품질'을 따지는 이유
[편집자주] 지난달 23~24일 유럽 풍력협회 윈드유럽·덴마크 스테이트오브그린·그린파워덴마크가 주최해 덴마크에서 열린 프레스 투어 및 같은 달 25~27일 코펜하겐에서 열린 윈드유럽 콘퍼런스에서 나온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한국에 함의를 줄 수 있는 내용들을 추렸습니다. 유럽에서는 에너지 안보 제고라는 정치적 동력·에너지 전환으로 산업 활로를 찾겠다는 경제적 동력이 맞물려 강력한 변화가 일어나는 중입니다. 올해 이 곳의 최대 화두는 풍력발전 확대를 위한 '공급망'을 어떻게 구축하느냐였고, 이 공급망 구축을 지배하는 의제가 '지속가능성'이었습니다. 추상적 구호가 아닌 시장에 의해 가속화하는 지속가능성입니다. 이 공급망에 속한 한국 기업들도 직면하게 될 흐름의 일부인만큼, 이 곳에서 가장 활발히 논의된 내용들을 소개합니다.
유럽 풍력 기업들이 생물다양성·저탄소 제품 사용·지역사회와 공존 등 '지속가능성' 항목으로 분류되는 경쟁력 강화에 앞다퉈 나선 건 유럽 각국 정부가 이를 촉진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설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럽 정부는 왜 이런 방향으로 제도를 손질하고 있을까.
1. 팬데믹·전쟁·중국…'저가 경쟁' 불가능해진 유럽 제조업체들
유럽연합(EU)과 각 회원국이 지속가능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풍력 입찰 제도를 변경하고 있는 건 우선 '가격 경쟁'이 유럽 기업들에게 지속 불가능하다는 여론이 팬데믹과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임계점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유럽 국가들이 정부 차원의 풍력발전 개발을 본격화한 2010년대 입찰의 핵심은 '누가 더 낮은 가격을 적어내느냐'였다. 가격으로 모든 게 판가름 났기 때문에 개발업체는 더 낮은 입찰가를 써내야 프로젝트를 수주할 수 있었고, 터빈 제조업체들도 더 저렴한 터빈을 공급하는 데 주력해야 했다.
십 수년간 이어진 '저가 경쟁'은 유럽 풍력 산업 공급망 기업들의 재정 압박으로 이어졌다. 그러던 중 코로나19 팬데믹 및 인플레이션으로 철강과 섬유 등 원자재 가격이 오르면서 기업들의 원가 부담마저 극심해졌다. 지난해 우크라이나 전쟁 촉발로 에너지 안보를 위한 EU 차원의 풍력발전 목표는 더 높아졌는데, 공급망에 속한 기업들이 재정적으로 사업을 지속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풍력산업 공급망 병목은 더 심각해졌다.
여기에 '저가 경쟁' 방식으로는 중국 기업들과 경쟁할 수 없다는 위기감도 커졌다. 입찰 기준을 가격으로만 두자 중국 기업들이 프랑스, 이탈리아, 크로아티아 등에서 풍력 발전 단지를 수주하는 사례가 이어졌다. 유럽 풍력개발사와 터빈사들은 재활용 가능한 블레이드 등의 사용을 늘려 왔는데, 입찰 기준에 가격만이 적용되면 환경에 긍정적인 이런 제품을 쓸 유인이 떨어진다는 목소리도 커졌다. 유럽 기업들이 경쟁력을 보유한 '정성적' 분야에 대한 인센티브를 강화하는 유럽 내 제도 변화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지지를 얻게 된 배경이다.
이런 정책 변화는 유럽 기업들의 호응과 맞물려 빠르게 정착하는 추세다. 바닥을 향한 경쟁(Race to the bottom) 대신 품질 경쟁으로 옮겨 가는 게 바람직하다는 게 유럽 업계의 대체적 의견이다. 세계 최대 터빈 제조사인 덴마크 베스타스의 와디아 프루르가드 공급망 정책 책임자는 지난달 26일 '입찰의 비가격기준을 통한 유럽 풍력 산업 활성화'를 주제로 열린 윈드유럽 콘퍼런스 세션에서 "일부 국가가 비가격기준을 채택하는 것은 분명히 좋은 일"이라 했다.
2. 보조금 쏟아붓는 IRA에 대응하기
유럽의 '정성평가 확대'는 미국 정부가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을 통해 미국 내 재생에너지 공급망을 구축하려는 시도에 대응하려는 차원도 있다. 야첵 트루슈친스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EC) 녹색 및 순환 경제 부문 부국장은 같은 콘퍼런스 패널 토의에서 "IRA가 나오면서 공급망을 구축하기 위해 다른 관할권과 약간의 경쟁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며 "초점이 공급망으로 돌아가게 됐고, 이제 가격 기준이 아닌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도 그 이야기의 일부"라 했다.
독일·프랑스 등 유럽 9개국은 2050년까지 북해 해상풍력 발전용량을 300기가와트(GW)로 늘리자는 계획을 지난달 24일 정상회의에서 발표했다. 현재 북해 해상풍력 누적 용량이 30GW가 채 안 되는 걸 감안하면 매우 도전적 목표다. 이는 2027년까지 러시아산 가스 의존에서 완전히 벗어나겠다는 '에너지 안보' 달성이 일차적 이유지만, 한편으론 풍력발전을 통해 유럽의 경제적 활력을 얻겠다는 목표도 있다.
풍력발전 단지를 짓기 위해서는 철강, 섬유 등의 원료부터 각종 기계류, 케이블, 터빈까지 매우 넓은 공급망이 필요하다. 이런 제조업 공급망을 유럽 안에 만들어 경제성장 기반과 일자리를 만들겠다는 거다. 미국이 IRA로 이루려는 것과 유사한 목표인데, 유럽 기업들의 강점에 인센티브를 더 주는 방식으로 달성 방식을 차별화하겠다는 의도다.
지속가능성 관련 항목에 이미 경쟁 우위를 갖고 있는 유럽 풍력 기업 입장에선 환영할만한 추세다. 아일랜드에 본사를 둔 재생에너지 개발업체 메인스트림 리뉴어블 파워의 아미샤 파텔 공공 업무 및 정책 책임자는 이 패널 토의에서 "지난 2~3년 동안 우리가 헤쳐 나가야 하는 매우 어려운 지정학적 공간이 만들어졌다"며 "우리는 미국의 야망과 IRA를 봤고 이는 업계의 판도를 바꿔놨다"고 했다. 이어 "'메이드 인 EU' 접근 방식을 채택하고 건강한 공급망을 구축하는 원동력을 보는 건 놀라운 일"이라며 "순전히 가격을 기반으로 한 입찰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대규모의 공급망 구축을 장려하지 않을 것"이라 했다.
3. 유럽 국내 정치적 수용성
해상풍력을 급속히 늘리는데 따른 '부작용'을 최소화해 국내 정치적 수용성을 높이겠다는 점도 각국이 정성평가 도입을 늘리는 배경 중 하나다. 네덜란드가 해상풍력 발전 입찰에 생태학적 기준을 강화하는 게 대표적이다.
폴린 블롬 네덜란드 경제기후정책부 해상풍력 담당 수석 정책관은 같은 콘퍼런스 세션 기조발표에서 "EU가 2050년까지 300GW의 해상풍력 발전단지를 건설하려면 1만5000개의 풍력 터빈이 해상으로 이동해야 한다는 의미"라며 "이런 풍력 터빈을 만들려면 수백만톤의 철, 수톤의 구리, 알루미늄과 희토류 금속이 필요하고 바다 생태 서식지의 상당 부분이 개발될 것"이라 했다.
이어 그는 "풍력 에너지 공급망에서 발생하는 인권과 환경에 대한 잠재적 위험을 파악하고 부정적 영향을 최소화해야 한다"며 "따라서 네덜란드 정부는 지난 해상풍력 입찰에서 생태학에 대한 기준을 포함시키기 위해 기업들과 접촉했고, 곧 있을 입찰에서도 생태학을 포함시킬 것"이라 했다.
네덜란드는 2040년까지 50GW의 해상풍력 발전단지를 세울 계획으로, 풍력발전 단지가 들어설 해양 면적이 네덜란드 국토 면적 보다 커질 수도 있다. 정부가 앞으로 대규모 해상풍력 개발을 계속 하려면 해양생태계 보호 등을 바라는 자국 여론과 충돌하는 사태를 방지해야 한다.
이 취지에 대한 업계의 전반적 공감이 어우러지며 이행가능성도 높아지고 있다. 네덜란드 해상풍력 개발업체 에네코 윈드의 로버트 아이켈렌붐 해상풍력 개발 책임자는 같은 콘퍼런스 패널 토의에서 "현재는 네덜란드에서 해상풍력에 대한 평판이 상당히 좋은 편"이라며 "하지만 앞으로 발전해 나가며 어딘가에서 한계에 부딪히지 않도록 해야 하고, 그런 의미에서 해상풍력 입찰에 이러한 종류(생태학 등)의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것이 매우 좋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코펜하겐(덴마크)=권다희 기자 dawn27@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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