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광개토왕비에 석회 덮었다…일본 조사기록 공개

노형석 2023. 5. 9.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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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 일본 고구려 유적 조사 원본
비석에 손댄 중국 탁본업자 면담 눈길
“1900년대부터 글자 임의로 새겨넣어”
1913년 세키노 조사단이 만주 집안의 광개토왕비를 조사하면서 비의 정면과 측면을 여러 각도에서 찍은 사진이다. 야쓰이 세이이쓰가 촬영한 것들이다. 

5세기 동아시아 역사를 뒤흔든 고구려 정복군주 광개토대왕(374~412). 그의 실체를 지난 근대기 세상에 다시 알린 건 일본 학자들이었다. 높이 6m가 넘는 대왕의 비석을 그들은 처음으로 샅샅이 훑으며 살핀 뒤 사진을 찍고 글자를 판독했다. 하지만 공식 조사기록은 전혀 남기지 않고 떠나버렸다. 왜 그랬을까?

1913년 10월 조선총독부 지원을 받은 일본 역사학자들은 사상 최초로 만주벌에 흩어진 고구려 유적의 실체를 학술조사했다. 압록강 기슭 집안에 있는 고구려 도읍 국내성터와 환도산성을 비롯한 인근의 산성, 장군총을 비롯한 숱한 무덤떼, 성 근교에 있는 5세기 광개토왕의 거대 비석을 열흘 넘게 둘러보고 200장 넘는 사진을 찍고 현장 상황을 기록했다.

당대 일본을 대표하는 문화재학자였던 도쿄대 건축과 교수 세키노 다다시가 단장을 맡고 문헌사에 밝은 조사원 이마니시 류, 현장 유적과 사진에 능통한 야쓰이 세이이쓰 등이 수행원으로 참여한 조사단은 1000㎞ 이상 되는 방대한 거리를 주파했다. 황해도·평안도·함경도 등 조선의 중부와 북부를 가로질러 압록강 넘어 집안까지 갔다가 다시 경성(서울)으로 돌아오는, 한달 이상 걸린 대규모 조사였다.

하지만 학자들은 당연히 내야 할 후속 보고서를 발간하지 않았다. 100년을 훌쩍 넘긴 지금까지도 나오지 않았다. 조사단을 이끌었던 세키노 다다시와 조사원 이마니시 류가 1~2년 뒤 학술잡지에 간단하게 조사를 요약한 글을 쓴 게 전부다. 하지만 그들이 당시 찍은 유적 사진은 지금까지 인용된다. 광개토왕비와 주변 풍경, 피라미드를 방불케하는 장군총 등의 사진은 1915년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조선고적도보>에 실리면서 오늘날까지 한국인들이 고구려 유적 하면 떠올리는 대표적인 유적 이미지를 형성하게 된다.

집안 근교의 고구려 성인 산성자 산성을 실측스케치한 야쓰이 세이이쓰이 야장 도면. 처음 공개되는 자료다.

고구려 유산의 실체를 후대 처음 드러낸 계기이면서도 조사 경위나 내용이 안개에 싸여 있던 1913년 집안 유적 조사의 주요 내용을 담은 당시 사진과 도면 등의 현장 조사 자료들이 세상에 처음 나왔다.

공개한 이는 20세기 초 일제가 처음 기틀을 놓은 한반도 유적 조사의 실상을 추적해온 정인성 영남대 문화인류학과 교수다. 그는 수년 전 일본에서 입수한 식민사학자 야쓰이 세이이쓰(1880~1959)의 학술 사료 파일(이하 야쓰이 비망록)을 뒤져 1913년 일본 조사단이 총독부 지원을 받은 1차 조선 고적 조사 당시 고구려 수도였던 평양과 만주 집안 유적을 찍은 유리건판 사진 280장과 관련 도면 70여점을 발굴하고 지난달 열린 학술발표회에서 일부를 공개했다.

1913년 세키노 타다시를 단장으로 한 일본 학계 조사단의 조선고적조사 행로를 그린 설명 지도. 한반도 중북부를 종단해 압록강변 집안까지 조사한 뒤 경성으로 돌아오는 대규모 일정이었다.,

공개된 사료들은 일본인 학자들이 광개토왕비를 처음 학술조사한 기록 원본이 나왔다는 점에서 중요한 학술사적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 무엇보다 주목되는 사료는 광개토왕비의 비석 표면에 석회칠을 하고 글자를 임의로 새겨넣었다는 당시 중국인 탁본업자와 조사원 야쓰이가 면담한 기록이다.

현지에 살던 탁본업자 초붕도를 만나 헌병보조원의 통역으로 대화해보니 풍화로 비석 표면이 닳자 1900년대부터 석회를 계속 바르고 기존에 모본으로 생각한 문장의 글자를 임의로 새겨 넣었다는 내용이다.

광개토왕비 비석을 19세기말 이미 일본군 등이 개입해 석회로 덮고 내용을 변조했다는 의혹을 1970년대 역사학자 이진희가 제기한 바 있으나 이 면담 사료는 전혀 알려진 바 없다.

1980년대초 중국 학자 왕젠췬이 탁본한 업자의 후손을 만나 비석을 보존하고 돈을 벌기 위해 석회로 덮고 글자를 다시 써넣은 것으로 선조한테 들었다는 전언을 입수하고 논고로 소개한 적은 있으나 110년 전 탁본한 당사자를 인터뷰한 면담 기록 실물은 처음 나온 것이어서 학계에 파장이 일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 면담메모가  일본군이 직접 비석을 변조했다는 결정적 물증은 아니다. 야쓰이와 답사를 같이했던 세키노나 이마니시가 몇 년 뒤 자신의 개인적 논고에서 일부 전언 형식으로 탁본업자의 진술을 인용한 기록도 있지만, 1900년대 초반부터 석회를 계속 바르면서 비석 표면을 보강하고, 누가 제공한 문자텍스트를 기준으로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계속 새로 글자를 써넣었다는 당사자의 직접 증언이 기록된 사료가 확보됐다는 점에서 이진희의 비문 변조설의 재검토 필요성을 환기시키는 의미가 있다고 정 교수는 분석했다.

광개토왕비에 석회칠을 하며 탁본업을 했던 중국인 초붕도와의 면담기록을 요약한 메모. 1913년 10월 압록강변 집안의 고구려 유적지를 답사한 일본 고적조사단의 일원 야쓰이 세이이쓰가 기록한 것이다. 1913년 최초로 진행된 일본 학자들의 집안 유적과 광개토왕비 조사 기록 가운데 핵심자료로 꼽힌다.

또 하나 특이한 것은 현재 광개토왕비의 비문에서 한일 학계사이에 첨예한 논란이 일고있는 신묘년조에 해당하는 내용이 일체 없다는 점이다. 신묘년조는 광개토왕의 재위기인 391년 신묘년에 왜의 세력이 바다를 건너와 신라와 백제를 깨뜨리고 신민으로 삼았다는 구절, 이른바 ‘래도해파’(來渡海破) 구절인데, 당시 고대 일본의 대륙 진출 역사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던 총독부와 일제 식민사학계의 입장으로 보면, 이 구절을 전혀 사진으로 찍지 않은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정 교수는 “당시 석회칠을 한 비석의 상태가 자신들이 해석한 래도해파 구절을 보여줄 수 없는 컨디션이어서 커서 찍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정 교수가 공개한 사진들은 만주 고구려 유적과 한반도 북부의 유적들을 담은 것들로 모두 34개 항목으로 묶여있다. 광개토왕비는 항목 7로 묶어 18장이나 되는 비석 사진들을 찍어 현상한 것으로 나타난다. 원경을 찍고 우측면 근경, 탁본광경, 정면과 우측면, 각면의 상하 구분 사진들까지 찍은 것으로 나타나는데, ‘신묘년조’는 아예 빠져있다. 

이외에도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집안 유적의 당시 현장 도면이 두어점에 불과한 데 비해 야쓰이가 소장했던 원래 조사자료에는 70점 이상 들어 있어 당시 조사단의 실사 현황을 구체적으로 복원하는 것이 가능해졌다는 평가다.

공개된 1913년 조선 고적 조사 1차 사료는 다음주에 경북도 한국국외문화재연구원 명의로 펴낸 <한국고고학자가 다시 쓰는 「조선고적조사보고」 - 1913년의 조사내용>이란 자료집에 정 교수의 해제와 함께 실려 배포될 예정이다. 정 교수는 고대사학계와 함께 광개토왕비 관련 조사자료에 대한 공동연구 작업도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도판 자료 정인성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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