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노숙자와 빈 사무실만 남아"... 혁신도시 샌프란시스코가 어쩌다
사무실 공실률은 30%로 팬데믹 전 7배 수준
높은 생활비→노숙자 증가→치안 악화로 이어져
2일(현지시간) 미국 샌프란시스코 도심 한가운데 유니언스퀘어에 위치한 백화점 노드스트롬(Nordstrom)이 폐점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길 건너편 상설할인매장 노드스트롬랙(Nordstrom Rack)도 문을 닫는다.
노드스트롬은 캘리포니아주에서만 90개에 가까운 매장을 두고 있는 고급 백화점 체인. 그런 곳이 왜 핵심 도시의 최고 상업지역에서 철수하기로 한 걸까. 노드스트롬은 직원들에게 "샌프란시스코 시내의 활력이 지난 몇 년 동안 극적으로 변했으며(떨어졌으며), 이는 고객 방문과 매장 운영에 영향을 미쳤다"고 폐점 이유를 설명했다.
노숙자 천국 된 샌프란시스코 도심
'활기찬 혁신 도시'의 대명사였던 샌프란시스코의 활력이 떨어졌다고? 이 도시에 어떤 일이 생긴 것일까. 4일 오전 찾은 유니언스퀘어 인근 모습은 백화점이 왜 문을 닫을 수밖에 없는지를 여실히 보여줬다. 광장에서 백화점까지 걷는 5분 동안 많은 노숙자를 만날 수 있었고, 노숙자들의 잠자리로 보이는 텐트도 눈에 띄었다.
백화점 건물 입구 앞에서도 노숙자가 잠을 자고 있었다. 그가 누운 자리만 빼고 바닥을 닦고 있던 청소 담당자 모레노씨는 "깨워서 쫓아내도 다른 사람이 오니 이젠 포기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시비가 걸릴 수 있으니 노숙자들과 부딪히지 않으려 한다"며 "도시가 갈수록 불안해지고 있다"고 했다.
여기 도심에서 발을 빼는 유명 매장은 노드스트롬만이 아니다. 최대 번화가인 유니언스퀘어에서만 5개월간 폐점하거나 폐점 예고한 업체가 11곳이다. 지난달에는 유니언스퀘어 인근 대형마트 홀푸즈(Whole Foods)가 개점 1년 만에 문을 닫아 지역 사회에 충격을 줬다. 샌프란시스코 내 가장 큰 슈퍼마켓 중 하나였던 이 매장은 '직원 안전'을 이유로 운영을 중단했다.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이 매장 직원들은 13개월 동안 경찰에 568건의 비상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노숙자, 좀도둑, 마약 중독자 등이 들어와 흉기를 들고 직원·손님을 위협하거나, 음식을 던지고, 비명을 지르며, 배변을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온라인 쇼핑 급증 △원격근무 보편화의 영향으로 미국 전역에서 도심 공동화 현상이 나타났다. 그러나 샌프란시스코 도심의 몰락은 그중 유별날 정도로 심하다. 실리콘밸리로 향하는 관문이자 혁신의 상징이던 도시는 이젠 '사람과 기업이 등지는 곳'으로 전락했다.
노숙자 문제가 얼마나 심하기에
전문가들은 샌프란시스코 도심 몰락의 요인을 크게 두 가지로 짚는다. △비싼 거주비용과 노숙자 증가 등이 불러온 삶의 질 하락, 그리고 △높은 테크업체 비율에 따른 부메랑이다.
샌프란시스코의 집값과 생활비는 이미 악명이 높다. 지난해 10월 기준 월세는 미국에서 뉴욕, 보스턴에 이어 세 번째로 높고, 기름값 역시 샌프란시스코가 속한 캘리포니아주가 전국에서 가장 비싸다. 주 세율은 미국에서 제일 높다.
이처럼 먹고 사는 데 높은 비용이 들자 노숙자가 양산됐고, 이 노숙자들이 도심 치안을 불안하게 하는 요소로 작용했다. 지난해 말 지역지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의 설문조사에서 시민 70%는 노숙자 급증을 가장 시급한 현안으로 꼽기도 했다. 샌프란시스코의 문제는 멀쩡한 사람도 노숙자가 될 수 있다는 점. 컨설팅 기업 맥킨지앤컴퍼니는 "샌프란시스코 일대에서 100만 명이 지역 평균 소득의 30% 미만을 번다"며 "그들 중 상당수가 소득의 75% 이상을 임대료로 지출한다"고 했다. 노숙자도 많고, 노숙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도 많다는 뜻이다.
치안이 나쁘지 않았다는 것도 옛말이 됐다. 샌프란시스코 경찰국에 따르면 지난해 강도, 절도 등 재산 관련 범죄는 2020년보다 23% 증가했다. 특히 최근 스타트업 창업자 보브 리의 피살 사건 이후 안전에 대한 우려는 더 커졌다. 실리콘밸리 유명 창업자였던 그는 지난달 샌프란시스코 시내 한복판에서 흉기에 찔려 숨졌다.
사무실 10곳 중 3곳이 비었다
기술산업에 대한 의존도가 크다는 점도 부메랑으로 돌아오고 있다. 테크업계는 원격근무 비율이 높고 현재 대규모 해고를 하고 있어, 더 이상 넓은 사무공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 결과 샌프란시스코 사무실 공간의 30%가 비었다. 이 공실률은 전국 최고 수준이고, 팬데믹 전에 비해 7배 이상이라고 부동산 정보업체 CBRE는 밝혔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최근 유니온뱅크가 입주해 있던 샌프란시스코 상업지구의 22층 건물이 6,000만 달러(약 790억 원) 안팎에 매매될 가능성이 크다고 보도했다. 이 건물은 2019년 3억 달러(약 3,960억 원) 정도로 평가받았으나, 4년 만에 그 가치가 20%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부동산 가치 하락 탓에 샌프란시스코 세수가 급감할 가능성이 크고, 예산이 부족한 시 당국은 시민 안전이나 치안 등 현안에 소극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사업을 시작하는 스타트업들은 아예 실리콘밸리 등 샌프란시스코 대도시권(베이 에어리어)이 아닌 다른 도시에 둥지를 트고 있다. 마이애미, 시카고, 덴버 등이 대체 도시로 떠오르는 중이다. 다만 최근 테크산업을 견인하는 인공지능(AI) 관련 회사들이 대거 샌프란시스코에 본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실리콘밸리가 '테크 허브'의 입지를 쉽게 잃어버리지는 않을 것이란 전망도 있다.
실리콘밸리= 이서희 특파원 sh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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