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건보다 23년 앞선 ‘빨간 마후라’… 신영균 “내 보물은 흥행작 수백편 튼 영사기”

백수진 기자 2023. 5. 9.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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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현대사 보물] [4] 배우 신영균
‘빨간 마후라’ ’연산군’ ‘미워도 다시 한번’ 등 1960년대 대표 흥행작에 출연했던 신영균 한주홀딩스코리아 명예회장은 지난달 24일 출연작들의 포스터 앞에 서서 “1960년대엔 한 해 200편씩 영화가 쏟아지며 한국 영화의 첫 전성기를 맞았다”고 회고했다. 신 회장은 1950년대부터 서울 충무로 명보극장에서 수백편의 한국 영화를 쏘아 올린 영사기를 자신의 보물로 꼽았다./장련성 기자

“이것이 말로만 듣던 전설의 조선 탑건.” “톰 크루즈의 탑건보다 20년 이상 앞섰네요. 1964년에 우리나라에서 이런 영화가 나오다니.”

한국영상자료원 유튜브 채널에 올라와 있는 영화 ‘빨간 마후라’에는 이런 댓글들이 달렸다. 특수촬영 기법이 없던 시절, ‘빨간 마후라’는 공군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실제 F-86 전투기(1940년대 미 전투기)를 띄우고 기체에 카메라를 달아 촬영하는 등 한국 최초로 공중전을 촬영한 블록버스터급 영화였다. 1964년 개봉해 서울에서만 관객 22만5000여 명을 동원하며 그해 흥행 1위를 기록했고, 대만·동남아까지 수출되며 인기를 끌었다.

◇'빨간 마후라’ 상영한 영사기

‘빨간 마후라’의 주인공, 신영균(95) 한주홀딩스코리아 명예회장을 지난달 24일 서울 명동 호텔 28에서 만났다. 그의 출생연도 1928년을 따서 이름 붙인 이 호텔 1층에는 1950년대 수입돼 명보극장에서 사용했던 일본 후지센트럴 35㎜ 영사기가 전시돼 있다. 당시엔 대부분 영화관에서 일제 영사기를 썼다. 1980년대 국산 영사기가 나왔지만 보편화되진 못했다. 스크린이 여러 개인 지금의 멀티플렉스와는 달리 3층짜리 1200석 규모의 단관을 꽉 채운 관객들이 영사기에서 필름 돌아가는 소리만을 기다리곤 했다. 당시 영사기는 도난 기사가 사회면에 종종 실릴 정도로 귀한 물건이었다. 1962년 본지 조간신문에는 동두천 미군기지에 보관돼 있던 31만원짜리(당시 공무원 평균 봉급 5070원) 영사기를 도둑맞았다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미셸 72mm 모션픽쳐 카메라 옆에 선 신영균 회장./장련성 기자

1990년대 디지털 영사기가 도입되기 전까지 이 영사기는 ‘빨간 마후라’ ‘연산군’ 등 한국 영화사에 길이 남을 흥행작 수백 편을 틀었다. 탄소 막대(카본)를 태워서 그 불빛으로 필름을 비추는 ‘카본식 영사기’로, 여름이 되면 영사기에서 나오는 열기로 5평 남짓한 영사실이 찜통처럼 푹푹 쪘다. 5~6명의 기사들은 직접 손잡이를 돌려 탄소 막대를 조정하고 필름을 갈면서 영사기 옆을 꼼짝없이 지켜야 했다. 필름 재질이 좋지 않은 탓에 필름에 불이 붙거나 상영 도중에 필름이 끊기는 사고도 자주 일어났다.

신 회장은 “이 영사기 덕분에 배우 신영균이 태어난 것”이라며 낮고 굵은 목소리로 호탕하게 웃었다. “전부 필름으로 촬영하던 시대니까, 영화사가 돈이 떨어지면 필름을 못 구해서 난리가 났어요. 필름이 끊기면 촬영이 중단돼 낭패를 겪는 경우가 많았죠.” 그가 소장한 이 영사기는 신 회장과 한국 영화의 첫 전성기를 함께한 증거물인 셈이다.

1950년대부터 서울 충무로 명보극장에서 수백편의 한국 영화를 쏘아 올린 영사기(왼쪽)를 자신의 보물로 꼽았다. 그는 1990년대 한국 최초의 영화 박물관 건립을 위해 미국·프랑스·홍콩 등을 돌아다니며 세계 영화사에서 가치 있는 물건들을 수집하기도 했다. 오른쪽 사진은 그중 하나인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촬영한 미셸 70㎜ 모션픽처 카메라.

스턴트맨도 없이 배우가 맨몸으로 위험한 장면을 촬영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신 회장은 “‘빨간 마후라’ 촬영 때는 총알이 날아와 조종석 유리창을 뚫는 장면을 찍는데, 명사수를 불러서 내 등 뒤에서 실탄을 쐈다”고 했다. “‘5인의 해병’을 촬영할 땐 모래밭에 배우들을 뛰게 하고 뒤에다 대고 실탄 사격을 했어요. 총알이 박히면서 모래가 튀어 오르는 장면을 실감 나게 찍겠다면서요, 하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찍은 카메라

서울대 치의학과를 졸업한 신영균 회장은 치과의사로 일하면서 국립극단에 입단해 연극배우 활동을 시작했다. 1960년 영화 ‘과부’로 데뷔한 후 1962년 ‘연산군’으로 제1회 대종상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으며 톱스타가 됐다. 그는 “1960년대는 한 해에 200편 이상의 영화가 제작됐다. 한국 영화의 첫 번째 전성기였다”고 회고했다. “겹치기 출연으로 세 편을 동시에 찍던 시기도 있었어요. 오전에는 이 영화, 오후에는 저 영화, 밤에는 또 다른 영화. 밤에 잠도 못 자고 촬영을 했죠.”

서울 중구 한주홀딩스코리아에서 포즈를 취한 신영균 회장./ 장련성 기자

신 회장은 1999년 개인 재산 100억원을 들여 제주도 남원에 한국 최초의 영화박물관인 신영영화박물관을 설립했다. 일본의 국민 배우 이시하라 유지로(1934~1987)의 기념관을 보고, 한국 영화사에 중요한 사료와 소품들을 체계적으로 전시할 박물관을 짓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박물관을 채우기 위해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골동품들을 수집했다. 그중 가장 아끼는 물건 하나가 1939년 작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촬영한 미셸 70㎜ 모션픽처 카메라다. 신 회장은 “좋은 물건을 찾기 위해 미국·프랑스·홍콩 등 전 세계를 뒤졌다”고 했다. “할리우드 영화인들을 통해 수소문한 끝에 한 골동품 가게에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촬영할 때 사용한 카메라 중 한 대를 찾게 됐죠.”

◇충무로 시대 이끈 명보극장

신 회장은 1977년 명보제과 옆 건물, 자신의 대표작들이 상영됐던 명보극장을 인수했다. 명보극장은 1957년 개관해 1960~1980년대 스카라·단성사·대한극장 등과 함께 충무로 시대를 이끌었던 대한민국 대표 극장이었다. ‘성춘향’ ‘연산군’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미워도 다시 한 번’ 등 한국 영화사에 남을 흥행작들이 내걸렸다. ‘빠삐용’ ‘지옥의 묵시록’처럼 쉽게 보기 어려웠던 작품성 뛰어난 외화들도 선보였다. 신 회장은 “안성기·장미희 주연의 ‘깊고 푸른 밤’을 상영할 땐, 표를 사려고 기다리는 관객들의 줄이 극장 앞에서 을지로입구역까지 이어졌다”고 회고했다.

1996년 여름 서울 명보극장 모습./조선일보 DB

그러나 2000년대 멀티플렉스의 등장으로 극장 운영이 점점 어려워졌다. “단성사·피카디리·국도극장이 하나둘씩 문을 닫고, 호텔이나 오피스텔로 변해갔어요. 충무로는 영화인들의 집이나 마찬가지인데, 명보극장이라도 남아있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끝까지 버텨보려고 했죠.” 신 회장은 2010년 명보극장과 제주 신영영화박물관 등 500억원 규모의 재산을 한국 영화 발전을 위해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는 “건물을 팔지 말고 기부하자는 아들의 제안에 용기를 얻어서 재단을 설립했다”면서 “영화계를 위해 명보극장은 꼭 보존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고 했다. 현재는 신영균예술문화재단이 명보아트홀을 운영 중이다.

한국 영화계의 산증인인 그는 넷플릭스 등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의 범람으로 또 한 번 격변을 겪고 있는 한국 영화계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신 회장은 “영화관은 백 년 넘게 이어져 왔고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 문화”라며 “거대한 스크린으로 느끼는 전율은 스마트폰이나 컴퓨터 모니터에서 주는 재미와 비교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오히려 “앞으로 더 큰 변화가 올 것이고, 영상 예술은 그에 맞춰 발전할 것”이라면서 “영화계는 늘 인재들이 변화를 이끌어왔다”고 했다. “신상옥·유현목·이장호·배창호·강우석·임권택 같은 뛰어난 감독들이 전성기를 만들었고, 봉준호·박찬욱·황동혁 감독 같은 지금의 주역들이 ‘한국 영화의 세계화’라는 전환점을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우리 영화인들의 탁월한 재능이 한국 영화의 미래이고 희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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