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청도설] 원폭희생자위령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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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평화공원)에는 '한국인원폭희생자위령비(위령비)'가 있다.
당시 민단 측은 평화공원 안에 위령비 건립을 희망했다.
그렇게 위령비는 1999년 7월 21일 평화공원 안으로 옮겨졌다.
오부치 총리는 평화공원 행사에 참석했다 당일 민단 관계자로부터 위령비 이전 설치 사실을 듣고 일정을 바꿔 참배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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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평화공원)에는 ‘한국인원폭희생자위령비(위령비)’가 있다. 검은색 대리석 비석 뒷면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 있다. “1945년 8월 6일 원폭 투하로 2만여 명의 한국인이 순식간에 소중한 목숨을 빼앗겼다. 히로시마 시민 20만 희생자의 1할에 달하는 한국인 희생자 수는 묵과할 수 없는 숫자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히로시마에는 강제징용 등으로 일본으로 왔던 조선인 14만여 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 가운데 사상 최초의 미군 원자폭탄 투하로 5만여 명의 피해자가 발생했고, 2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 1967년 한국에서 결성된 원폭피해자협회는 일본 정부를 상대로 원폭 피해자 치료와 보상을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그 과정에서 원폭 피해자들이 히로시마 거주 재일한인의 뜻을 모아 히로시마 시장에게 위령비 건립 계획을 제출했다. 그리고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 히로시마 본부 주도로 위령비 건립 사업이 추진됐다.
당시 민단 측은 평화공원 안에 위령비 건립을 희망했다. 하지만 평화공화에는 이미 다른 위령비와 기념비가 많이 들어서 있기 때문에 더는 허가할 수 없다는 게 히로시마 당국의 입장이었다. 결국 평화공원 바깥에 세워졌다. 이후 재일한인과 일본 시민단체들이 나서서 평화공원 이관 설치를 꾸준히 제기해 1998년 12월 이전 승인을 얻어냈다. 그렇게 위령비는 1999년 7월 21일 평화공원 안으로 옮겨졌다. 우리나라에서 제작돼 히로시마로 운반된 위령비는 높이 5m, 무게 10t에 달하는 전형적인 한국식 비석이다. 거북이 모양을 한 받침대 위에 석주를 세웠으며, 그 위에는 쌍용 모양을 새긴 석관을 올렸다.
1999년 일본 총리 중에는 오부치 게이조 총리가 최초로 헌화했다. 오부치 총리는 평화공원 행사에 참석했다 당일 민단 관계자로부터 위령비 이전 설치 사실을 듣고 일정을 바꿔 참배했다고 한다. ‘평화주의’를 주창하는 공명당 대표 등은 2010년부터 매년 위령제에 참여하고 있다.
한국을 방문했다 어제 귀국한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오는 19일부터 21일까지 히로시마에서 열리는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 참석하는 윤석열 대통령과 함께 위령비를 참배하기로 했다. 일본 총리로서는 두 번째 위령비를 찾는 기시다 총리가 우리나라 대통령과 헌화한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 여전히 존재하는 한일 간 역사문제 등에 대한 인식의 간극을 좁혀나가고, 상호 발전적인 한일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강춘진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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