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프레소] 어떤 꽃은 9년만에 피어난다
입스·부상 딛고 마침내 첫 우승
인내로 쌓은 시간이 이젠 자부심
“우리가 저지르는 최악의 일은 포기”
한국 여자 프로골프 투어에선 1년에 30명 안팎 우승자가 나온다. 1995년생 이주미와 최은우는 나란히 스무 살에 데뷔해 9년 가까이 주인공 자리에 서본 적이 없었다. 트로피를 높이 들어 흔들거나, 챔피언을 상징하는 재킷을 입고 뜨거운 박수를 받아본 적이 없다. 그러다 지난달 이주미가 감격의 첫 우승을 하더니, 바로 그 다음주에 최은우가 우승하고 눈물을 쏟았다. 우승이 영광이자 의무이자 일생일대 과제로 여겨지는 프로 세계에서, 서른 문턱 두 선수가 9년이란 시간을 견뎌 2주 연속 우승컵을 들어올린 것이다.
이주미의 골프 인생은 롤러코스터였다. 남들보다 늦은 중1 때 시작했는데 고교 시절 국가대표 상비군에 뽑힐 정도로 성장이 빨랐다. 열심히 한 만큼 성적이 나오는 매력에 빠졌다. 하지만 프로 세계는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어프로치샷 입스(yips·샷 실패 불안 증세)가 찾아왔고, 압박감에 허덕이다 드라이버샷까지 번졌다. 2018년 21개 대회에서 단 한 번 컷 통과한 뒤 2부 투어로 떨어졌다. 뒷바라지해온 부모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2의 인생을 찾아보자고.
이주미는 “이왕 시작했고 지금까지 했는데, 뭐라도 이루고 그만두자”고 마음먹었다. 그 ‘뭐라도’는 처음엔 1부 투어 상금 랭킹 60위에 들어 다음 시즌 출전권을 지키는 것이었다. 이루고 나니 이번엔 ‘어떤 대회든 10위 안에 한 번은 들어보자’는 목표를 갖게 됐다. 그다음엔 ‘5위에도 들어보자’, 다음엔 ‘우승은 하고 끝내야지’…. “한때 바닥을 쳤지만 나름대로 한 단계씩 꾸준히 밟아 올라왔다”는 그는 “프로 데뷔 10년이 되어도 점점 더 성장할 수 있다는 걸 지금도 느낀다”고 했다.
최은우는 내내 꾸준했다. 매년 상금 랭킹 30~40위권을 지켰지만 그 이상은 올라가지 못했다. 우승 기회가 오면 안전하게 방어하는 경기를 하다 놓치곤 했다. 2018년 매치플레이 4강에서 세계적인 스타 박인비와 일대일로 맞붙어 졌다. 대선배를 가까이서 보며 많은 것을 배운 뒤로 뚜렷하게 상승세를 탔다. 이대로면 곧 우승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때쯤, 손가락을 다쳤다. “갑자기 브레이크가 걸리면서 많이 힘들었다”고 했다.
다치기 전까진 매주 시험 치른다는 생각에 대회장 가는 일부터 스트레스였다. 부상을 입고 쉬면서 “2·3부 투어에서 뛰더라도 공만 칠 수 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마음이 커졌다. 복귀 후엔 매주 대회를 기다리며 재미있게 다녔다. “데뷔 8~9년이 지나서야 부담감을 조금 덜었어요. 감사하면서 경기하다 보면 기회도 언젠가 한 번은 올 거라고요.”
오랫동안 상상만 해오던 우승을 막상 하고 나니 일상이 크게 달라지는 건 없더라고 한다. 다음 날 또 훈련, 다음 주 또 대회. 그래도 첫 우승까지 차곡차곡 축적해온 시간은 이제 자부심이 됐다. “버티고 인내하고 도전하면 가능하구나. ‘진짜 멋있다’는 얘기 주변에서 많이 들었어요.”(이주미) “지금까지 잘해왔다는 칭찬을 한순간 몰아서 받은 느낌이에요. 오랜 기간 잘 버텼다. 네가 해온 게 맞았구나. 오늘은 온전히 너만을 위한 날이다.”(최은우)
PGA 투어 73승의 ‘전설’ 잭 니클라우스조차 “우승 가뭄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아 두려웠다”고 했다. “우리가 저지르는 최악의 일은 포기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이주미와 최은우의 우승은 아직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 보지 못한 선수들에게 희망으로 퍼진다. 버텨야 할 이유 하나만 악착같이 붙들면 ‘뭐라도’ 이루는 그날이 온다. 다만 어떤 꽃은 해마다 피고, 또 어떤 꽃은 9년 만에 피어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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