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기빈의 두 번째 의견] 세입자는 ‘채권자’다

기자 2023. 5. 9.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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갭투자 피해자들의 손해는 금융시장 손실과는 성격이 다르다. 그들은 그저 ‘주거를 마련’하고자 했을 뿐이다
이들이 곤경에 처한 것은, 부동산 금융화와 한국 특유의 전세 제도가 결합된 독특한 행태가 제약 없이 기승을 부린 결과물이다
이들의 삶을 지켜주는 특단의 조치는 물론, 보다 근본적 차원에서의 제도 및 법률의 정비가 있어야 할 것이다

과도한 갭투자 행태의 집주인을 만나 전세금이 위태로워진 세입자들이 무수히 양산되고 있다. 한 조사에 따르면 그 잠재적인 피해자의 숫자가 5만가구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하루아침에 알토란 같은 전세금을 날리고 자칫하면 가족이 길바닥에 나앉을 위험에 처한 이들이 무척 많다는 이야기로, ‘사회적 재난’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더욱이 이들의 전세금 중 상당 비중은 전세대출에 의존하고 있었을 터이니, 살 곳이 막연해졌을 뿐만 아니라 서민들 입장에서 감당하기 힘든 거액의 빚까지 지게 된 이들이 많을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비단 ‘빌라왕’과 같은 엽기적인 갭투자 행태에 걸려든 이들만의 이야기가 아닐 수 있다.

홍기빈 정치경제학자

살고 있는 집이 ‘깡통주택’이 된 전세 세입자들이 전세금에 큰 피해를 보거나 아예 날리게 될 수 있는 위험이 있다. 우리나라의 주거 형태에서 전세가 차지하고 있는 큰 비중을 생각할 때, 지금의 사태는 그 자체로서 ‘사회적 재난’일 뿐만 아니라 더 크게는 잠재적으로 더 큰 혼란을 예고하는 ‘빙산의 일각’일 수 있다.

먼저 우리나라 전세 제도의 특징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전세는 한국에만 있는 제도’라는 통념은 절반만 맞는 말일 것이다. 민법에 규정된 물권의 각종 범주에 ‘전세(joense)’권이 들어 있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는 의미에서는 맞는 말이겠으나, 역사적으로 또 지역적으로 살펴보면 그 비슷한 제도를 찾을 수 있다는 점에서는 부족한 이야기이다. 우리나라 전세 제도가 역사적으로 갖는 보편성과 특수성을 따져 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

고대 그리스와 메소포타미아에서 시작되어 성행하던 ‘안티크레시스’라는 제도를 전세 제도의 원형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 제도는 비잔틴 제국에서도 성행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남미의 볼리비아에서 ‘안티크레티코’라는 제도로 내려오고 있다. 여기에서는 돈, 즉 전세금을 꾸어준 이가 채권자가 되며, 그 대가로 제공된 부동산은 채권자의 담보로 여겨진다. 고대 그리스에서 그 부동산은 주로 경작지와 같은 토지였고, 채무를 제대로 변제하지 못했을 때 그 토지의 소유권이 자동적으로 채권자에게 넘어가게 되어 있었다. 채무를 갚기까지의 기간 동안 그 토지를 경작하고 소출을 가져갈 권리가 채무자에게 계속 남아있는 경우와 그 권리를 채권자에게 넘기는 경우로 구분했는데, 후자의 ‘미스토시스’가 우리의 전세 제도와 흡사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이때 그 토지에서 나오는 소출은 채권자에게 지급되는 이자의 형태로 이해되었다. 즉 이러한 ‘안티크레시스’는 일종의 담보 대출이라는 금융 행위로 이해되고 있으며, ‘세입자’는 사실상 채권자로서의 여러 권리를 갖는 존재로 여겨졌다.

일제 이후 ‘갑을’ 관계 역전 뒤 고착

구한말에 나타났던 우리나라의 전세 제도 또한 ‘안티크레시스’와 마찬가지로 담보대출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었다. 세입자는 전세로 들어간 집의 주거권을 양도 매매할 수도 있었다. 집주인은 세입자의 동의 없이는 집을 함부로 매매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러한 ‘갑을’ 관계의 역전이 벌어지게 된 계기는 일제강점기에 전세 제도를 담보 대출이 아니라 (사물의) 임대차로 보는 관점으로 이뤄진 법 개정이었다. 요트나 자동차의 임대, 즉 리스와 마찬가지로 주택의 사용권을 일정 기간 내주는 대가로 일정 액수의 돈을 담보로 잡고 그 이자를 수취하는 행위로 이해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1920년대에 시행된 일제의 민사령에서는 세입자가 함부로 전세를 매매 양도하는 것을 금지했고, 1943년 조선고등법원의 판례는 아예 집주인에게 세입자의 동의 없이도 마음대로 집을 매매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했으며, 세입자는 새로운 집주인과 새롭게 전세 계약을 맺도록 했다.

해방 이후 여러 번 임대차 제도의 정비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이렇게 일방적으로 기울어져 불리한 위치에 선 세입자를 보호하기 위한 여러 장치가 마련되었지만, 이렇게 전세를 담보 대출이 아니라 임대차로 보는 관점이 우리나라에 고유한 ‘전세권’의 기본적 틀로 안착되었다. 집주인이 받는 거액의 전세금은 어디까지나 집을 담보로 잡은 대출금이 아니라 주택 임대차에 대한 사용료일 뿐이니, 세입자는 원칙적으로 집의 소유권 등에 대해 아무런 권리를 가질 수 없게 된 셈이다.

한편 1990년대의 금융 자유화와 함께 부동산 시장의 이른바 ‘금융화’는 전 세계적인 추세가 되었다. 더 이상 주택을 사람이 주거하는 ‘사용가치’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자산들과 마찬가지로 수익을 창출하고 시세 차액에 따라 거래되는 ‘교환가치’의 대상으로 보는 관점과 관행이 일반화된 것이다. 우리나라에만 있다는 ‘전세권’은 여기에서 아킬레스의 발꿈치가 된다.

전 세계의 보편적인 부동산 시장의 금융화 추세에 따라 자본 시장에서 사모펀드가 즐겨 행하는 기업 인수 방식인 차입 매수(leveraged buy-out) 거래가 아주 비슷한 형태로 복제되어 들어온 것으로 갭투자를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우리나라 부동산 시장에서도 아주 적은 자기자본을 근거로 ‘레버리지’를 이용하여 집을 매입하는 행태는 훨씬 전부터 있었다.

이른바 ‘전세 끼고 산다’는 방식은 1970년대 서울 강남의 부동산 투기 붐 가운데에서도 빈번하게 나타난 행태였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매입한 주택을 철저하게 금융 자산으로만 이해하여 연쇄적인 갭투자 행위의 근거로 삼는 행태가 본격적으로 행해진 것은 주택 가격이 급등하고 (초)저금리가 일상화된 2010년대 후반으로 보아야 한다.

정부, 세입자 피해 최소화 조치 외면

차입 매수나 갭투자는 대단히 리스크가 높은 투자 행위이다. 하지만 차입 매수에서 돈을 꾸어주는 주체인 은행과 갭투자에서 돈을 꾸어주는 주체인 세입자는 큰 차이가 있다, 전자는 화폐 형태로 이자를 수취하고, 추가적인 차입에 대해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전체 투자 계획에 대한 정보를 요구하여 전모를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세입자는 용익권 이외에 아무런 화폐 이자도 받지 못하며, 전세금의 일방적 인상에 사실상 응할 수밖에 없고, 집주인의 투자 계획은 물론 전세금 변제 능력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에 대해서까지 완전히 ‘깜깜이’인 상태에 놓여 있다. 즉 레버리지를 활용한 투자에 따르는 높은 리스크를 고스란히 떠안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 있는 것이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인가? 부동산의 금융화라는 전 세계적인 추세와 임대차 개념에 근거해 집주인에게 오롯이 소유권을 인정한 한국의 전세 제도가 결합되면서 벌어진 ‘잘못된 만남’이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갭투자 행태가 물의를 일으키기 시작한 2010년대 후반부터 정부와 당국이 해야 했던 조치는 분명하다. 전세 제도를 주택 제도의 일환으로 보아 갭투자와 같은 과도한 금융적 행위에 대해 제한을 가하든지, 부동산의 금융화를 보편적 경향으로 인정한다면 그에 맞게 세입자를 ‘채권자’로 보아 그에 걸맞은 여러 권리를 인정하든지 했어야 한다.

이러한 조치가 너무나 근본적이고 부담스러운 변화를 수반하는 것이기에 당장 취하기 어렵다면, 우선 예상되는 세입자들의 잠재적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을 했어야 한다. 한 예로, 몇 채 이상의 연쇄적 갭투자를 행하는 이들에게는 자기자본 등의 재무 정보를 (잠재적) 세입자들에게 공개하도록 의무화하는 조치를 들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뻔히 보이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정부와 당국은 어느 쪽으로든 이러한 규제와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갭투자 피해자들이 입은 손해는 일반적인 금융시장의 손실과는 성격이 다르다. 그들은 그저 ‘주거를 마련’하고자 했을 뿐, 주식이나 코인처럼 큰 리스크를 감수하며 이익을 노리는 투자 행위를 한 것이 아니었다. 이들이 지금과 같은 곤경에 처한 것은, 갭투자라고 하는 부동산의 금융화와 한국 특유의 전세 제도가 만나면서 나타난 독특한 행태가 별 제약 없이 기승을 부린 결과물이다. 이들의 삶을 지켜주는 특단의 조치는 물론, 지금이라도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제도 및 법률의 정비가 있어야 할 것이다.

가뜩이나 높은 우리나라의 가계부채에서 전세금이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하면 더욱 절박한 문제이다. 전세는 담보 대출인가, 임대차 행위인가? 부동산은 ‘교환가치’인가, ‘사용가치’인가? 집은 ‘금융자산’인가, ‘물건’인가?

■홍기빈

정치경제학자. 대안적 사회의 정치경제 질서를 설계하고 구축하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연구와 활동을 병행해 왔다. (재)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을 지냈으며, 국제칼폴라니 연구협회의 자문위원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위기 이후의 경제학> <비그포르스, 잠정적 유토피아와 복지국가>가 있으며, 역서로는 <도넛 경제학> <21세기 기본소득> <균형재정은 틀렸다: 현대화폐이론 입문> 등이 있다.

홍기빈 정치경제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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