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전세라는 사기

기자 2023. 5. 9.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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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전 지인이 전세사기를 당했다. 마주칠 때마다 타들어가던 얼굴이 잊히지 않는다. 고생스러웠지만 소송으로 전세금을 찾아 다행, 하필 이상한 사람한테 걸려 운도 없다고만 생각했다. 전세사기 피해 사례가 쏟아져나오는 요즘, 거꾸로였음을 깨달았다. 이사 나오는 날이면 꼬박꼬박 전세금이 통장에 들어왔던 내가 지독히 운이 좋았다.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전세는 돈을 빌려주고 집을 빌리는 계약이다. 임대인은 이자 없이 돈을 빌리고 세입자는 임대료 없이 거주하니 그럴싸하다. 그러나 채무자가 언제나 갑이다. 집이기 때문이다. 집주인은, 못 하나 박는 것까지 참견할 수 있었고, 전세금을 올리든 월세로 바꾸든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어렵다 하면 내보내면 그만이었다. 세입자는 내보내도 문제인데 못 나가도 문제였다. 다음 세입자를 구해놓고 나가라거나 법대로 하라거나, 채무자가 오히려 큰소리쳤다. 집에 발이 묶이거나, 복잡한 절차를 밟아 이사를 나가거나, 까딱 전세금을 잃게 되면 집을 잘못 구한 자기를 책망하는 수밖에 없었다. 세입자는 돈을 빌려준 채권자가 아니라 존엄을 저당 잡힌 세입자일 뿐이었다.

집이 없어 어쩔 수 없는 일로 여겼다. 역대 모든 정부가 내집 마련의 신화를 부추겼을 뿐 주거권 보장을 위해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다. 30년 만에 2년짜리 임대차계약이 4년까지로 늘어난 것이 전부다. 임대료를 규제하는 매우 평범한 자본주의적 제도도 정부는 시도하지 않았다. 세입자가 돈을 빌려줄 수 있게 방치했을 뿐이다. 그래도 전세는 한때 ‘주거 사다리’ 역할을 했다. 전세가 월세보다 낫다는 건 상식이었다. 물론 이익은 언제나 위로 향했다. 세입자는 빚을 내서 전세를 얻고, 임대인은 전세금을 끼고 집을 사고, 건설사는 짓는 족족 분양가를 갱신하고.

2010년대 들어 이미 사다리는 사라졌다. 전세로 몇번 이사 다니다가 집을 사는 건 요행이 됐다. ‘전세대란’ 문제도 불거졌다. 임대인은 은행 대출이 유리하면 갈아타면 됐다. 이미 높은 전세가를 기준으로 매겨지는 월세를 세입자들은 감당하기 어려웠다. 박근혜 정부는 임대료 규제 대신 전세자금 대출을 확대했다. 저리 대출은 혜택이었다. 신청이 줄을 이었다. ‘갭투기’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빚은 세입자가 지고 집은 임대인이 샀다. 전세는 이제 남의 돈으로 집을 살 수 있는 제도가 됐다. 전세가 사기가 되니 전세사기가 가능해졌다.

주택 거래량과 가격이 모두 하락하면서 전세금 미반환 사태가 손쓸 수 없는 지경으로 번지고 있다. 이미 전세금 반환 보증사고 건수가 급증하고 있으며 ‘깡통전세’ 위험 지역은 더욱 늘어나고 있다. 정부·여당은 고의성 짙은 임대인을 솎아내면 문제가 사라질 것처럼 말한다. 속아서 돈을 잃은 다른 사기 범죄와 다를 바 없고, 임대인에 대한 정보 접근성을 높여 예방하겠다고 한다. 문제를 잘못 짚었다.

은행은 대출이 투자다. 돈 빌릴 사람의 신용을 평가하고 대출 여부를 결정한다. 채무자가 갚지 못할 위험까지 가늠해 그것을 상회하는 이자를 매겨 이윤을 얻는다. 은행은 사기당하지 않는다. 세입자는 당한다. 돈 빌려주려고 거주하는 게 아니라 거주하려니 돈을 빌려줘야 했기 때문이다. 정보의 비대칭이 아니라 권리의 비대칭이 문제다. 전세사기는 주거권 보장에 실패한 결과에서 비롯된 ‘사회적 재난’이다. 전세사기 피해자들은 이례적으로 사기를 당한 것이 아니라 전세라는 사기가 만든 덫에 먼저 걸린 것이다. 피해자를 가려내 적당히 지원해서 해소될 위기가 아니다.

주거권은 집을 소유할 권리가 아니다. 소유 여부와 무관하게 안정적으로 점유할 권리고, 지불 가능한 수준의 비용으로 거주할 권리다. 단지 거주하기 위해 돈도 삶도 모두 걸어야 하는 구조를 바꿔야 한다. 전세사기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우리가 함께 권리를 다시 세워야 한다.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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