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가방에 담아온 유머
친구가 사는 이탈리아 피렌체에 다녀왔다. 친구가 있으니 숙박이 공짜다. 숙박비 대신 가방 속에 말린 건어물, 간편식, 라면, 고추장 등 한국 음식을 한가득 넣었다. 수화물 허용 기준치를 겨우 통과한 30㎏ 가까운 무거운 가방이다. 공항에서 택시를 탔다. 가방이 너무 무거우니 택시 기사님이 무게에 움찔하면서 묻는다. “가방에 몰래 남자친구 넣어 왔니?” 뒷좌석에서 한참을 웃었다. 내릴 때 “남자 친구 든 가방 잊지 말고 내려달라”고 나도 농담을 건넸다. 아저씨가 낑낑대면서 한마디 덧붙인다. “가방이 조용한데, 네 남자친구 지금 자는 것 같아.” 서로 깔깔대며 헤어졌다. 20시간 가까이 비행기를 갈아타고 찌든 피로가 금세 날아가 버렸다. 유머로 짐의 무게를 날려버리는 그의 여유 덕분에 웃으며 여행을 시작했다.
유머는 여유에서 나온다. 여유는 이탈리아에만 있는 건 아니다. 한국에서도 이런 경험을 여러 번 했다. 순천대학교 여대생 커리어센터 멘토링으로 수년간 순천을 방문했다. 당시 순천역에서 순천대학교까지는 4000원 안팎의 요금이 나왔다. 4100원이나 4200원이 나오면 택시 운전기사님이 잔돈은 됐으니 4000원만 달라고 하는 거다. 한 분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그랬다. 마음의 여유가 느껴졌다. 순천대학교 앞 커피숍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음료 주문이 잘못 들어가 아이스티를 시켰는데 미숫가루가 나왔다. 이런 경우 대부분 “다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하고 잘못 만든 음료를 가져간다. 하지만 이곳 사장님께선 이미 만든 거니 두 잔 다 드시라고 한다. “감사합니다” 하고 아이스티도 마시고 미숫가루도 마셨다. 그렇다. 버리지 않고 둘 다 마셔도 되지 않는가? 다른 장소에 가니 속도가 다르다.
어떤 차이가 있을까? 회사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효율이다. 도시의 삶도 마찬가지다. 빨리, 정확히, 많이 해야 한다. 내가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도 도시가 내 여유를 뺏고야 만다. 사람의 잘못이 아니다. 속도가 모든 걸 결정하는 도시가 그렇다. 정신 차리고 숨을 돌리지 않는 한 도시가 우리를 바쁘게 몰아치게 만든다. 그래서 부러 숨 돌릴 여유를 찾아야 한다. 아침 출근길에도 정신없이 핸드폰을 보며 걷는 대신 가로수를 보고 하늘을 보고 자연을 만나면서 숨 쉴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 또 모르지 않는가. 이렇게 찾은 여유가 잃어버린 유머 감각까지 되찾아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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