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준의 포스트잇] [2] 지식인과 사기꾼
과거 지독한 사회주의 혁명가였던 한 언론인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그는 흘러흘러 소련까지 갔는데 우연히 거기서 갱지에 러시아어로 번역 등사(謄寫)한 자유주의 경제학자 하이에크의 ‘치명적 자만’을 읽고는 ‘머리가 깨졌다’고 한다. 그 ‘치명적 자만’이 너덜너덜한 해적판이었던 건 소련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그게 지하운동권 서적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운명이 장난을 치는가 싶었다. 그렇게 계몽, 전향될 거라면 그때까지 갖다 바친 청춘은 뭐란 말인가. 투쟁 중에 그는 한쪽 눈까지 잃었다. 개인이 제 삶을 불태워 버리는 데는 여러 마약적(痲藥的) 레시피가 있고 이는 대중도 마찬가지다. 그것들을 딱 한 줄로 요약하면 사람은 ‘사실보다는 사실로 포장된 거짓에 매혹된다’일 것이다. 반면 그의 저 고백에는 모파상의 ‘목걸이’ 마지막 장면에서 느끼게 되는 ‘허망한 해탈(解脫)’이 있다. 그가 진실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에 저항하세요. 상사에게 이유 없이 시비를 걸고 퇴사하세요.” 진짜로 이렇게 가르치는 베스트셀러 철학자가 있다. 한국 TV만 틀면 그런 지식인들이 종류도 다양하게 우글거린다. 자유 시장경제에 대한 기본 소양은 근대 지식의 안전장치다. 이게 없거나 고장 나면, 자칭 타칭 각 분야 전문가가 마오쩌둥처럼 “참새는 나쁜 새다. 죽여라” 하는 식으로 말하는 걸 보게 된다. 한 뇌과학자는 비행기 비즈니스석은 양심에 어긋난다는 말과 비슷한 얘기를 했는데, 양심이란 자신의 전공이 1조8000억원짜리 국책 사업 총괄 책임자에 어울리는지를 숙고하는 데 필요한 것이다.
마이클 샌델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로 떼돈을 벌어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까지 산다. 자본주의는 욕하면서 가장 비싼 판권과 가장 비싼 강연 티켓을 판다. 정의란 ‘정의란 무엇인가’ 속에서 관념 놀이로만 존재하기에 그 정의를 연극할 수 있는 사람은 위선자뿐이다. 저들의 ‘착한 척’은 무지를 넘어선 ‘욕망’의 문제다. 착한 척할 때 부신에서 아드레날린이 분비되고, 이성을 담당하는 전두엽이 아니라 욕망을 실행하는 편도체가 작동했을 거다. 욕망하니까 불안하고 이를 달래는 술이나 섹스의 역할을 위선이 대신해 도파민이 분출됐을 것이다. 이게 ‘천동설 지식인’들의 생리(生理)이자 생계(生計)다. 저들은 청춘을 바치지도 않고 눈을 잃지도 않는다. 그런 일을 당하는 건 저들에게 속는 대중이다.
“그 목걸이, 가짜였어. 그거 때문에 인생을 낭비한 거야?” 이런 소리에 깨어지는 날이 있다면 그나마 다행일까? 양심이나 정의 같은 단어처럼 모호한 흉기이자 표시 많은 화투 패가 없다. 지식인에게는 정확한 지식을 바랄 뿐이다. 지식인과 바보를 구별하기 힘든 사회는 ‘그래도’ 희망이 있다. 그러나 지식인과 사기꾼이 동의어인 사회는 ‘절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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