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 5월, 모든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공교롭게도 5월1일 노동절에 건설노조 간부에 대한 영장실질심사가 진행되었다. 자칫 구속이라도 되었다면, ‘불법’ ‘폭력’ 노동조합이라는 기사 제목이 달렸을지 모른다.
그런데 현실에선 이것보다 훨씬 더 가슴 아픈 일이 발생했다. 심사 대상자였던 양모 간부(민주노총 전국건설노조 강원건설지부 소속)가 심사 직전 분신을 시도하였고, 다음날 유명을 달리했다. 그의 유서에는 “자랑스러운” 노조 활동이 업무방해 및 공갈로 폄하되는 등 자존심이 처참히 짓밟힌 심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지난 2월21일 윤석열 대통령은 국무회의 자리에서 건설 노조의 불법행위를 뿌리 뽑겠다며 ‘건폭’이라는 표현(건설 현장 폭력의 줄임말)을 사용했다. 이 표현 하나로 건설노조는 금품요구, 채용강요, 공사방해를 일삼는 폭력단체로 ‘정의’되어 버렸다. 마치 영화 속 용역깡패가 되어버린 셈이다.
사망한 간부가 몸담았던 노조는 ‘자랑스러운’ 연대 공동체였다. 이 연대 활동의 가치는 자살 유도보다 오히려 자살 예방에 가깝다. <자살론>의 저자 에밀 뒤르켐은 노조를 아노미 같은 현대사회에서 자살을 예방할 수 있는 사회조직으로 꼽았다. 그는 “사회적 관념과 감정을 발전시키는데 이(노조)보다 더 좋은 사회 집단이 없다”고 보았다.
그런데 한국사회에서는 노동절 당일 합법적인 노조활동이 폭력적인 불법 행위로 지목되며 안타까운 죽음이 발생했다. 뒤르켐이 지적했던 ‘지나친 육체적, 정신적 압제’가 유도하는 ‘숙명론적 자살’이 바로 고인의 죽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었을까.
5월 하면 노동절 외에도 으레 ‘5·18 민주화운동’을 떠올리게 된다. 그런데 5·18 생존자들 중 약 46명이 이른바 군집자살을 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김명희 교수(경상대 사회학과)는 이들의 군집자살이 ‘진실을 알 권리’ ‘정의를 실현할 권리’ ‘피해를 회복할 권리’가 묵살당하는 현실 앞에 일종의 저항이자 대의를 위한 희생으로 자살-일명 ‘저항적 자살’-에 이르렀다고 강조한다.
일찍이 신승철 교수(연세대 정신과)팀의 <한국인의 자살(1965~1988)> 논문(1990년)에서 지적하듯 한국사회의 자살현상 증가 시기는 사회적·정치적 불안기 및 경제적 궁핍기와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예를 들어 1960년대 중반, 1970년대 초 유신체제, 1980년대 초 5공화국 출범 등). 당시 급격한 그래프 기울기의 변화는 숙명론적 자살과 저항적 자살이 왜 개인이 아닌 사회적 문제인지를 뚜렷이 보여준다. 그런데 2023년 5월 왜 다시금 그 불씨를 되살렸단 말인가.
극단적 선택에는 사회·정치·경제적 영향 이외에도 문화적 요인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흔히 공개된 장소에서 이루어지며 높은 치사율을 가져오는 분신의 경우는 더더욱 그러하다. 이란에서는 많은 여성이 남성 중심의 성규범 앞에 여전히 분신자살을 선택한다. 미국에선 정신질환자 및 마약중독자가 헤어 나올 수 없는 고통 끝에 분신자살을 한다. 극단적 선택 자체를 불명예스럽게 생각하는 중국에선 자신의 죽음을 차별화하기 위해 분신을 선택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한국에서의 분신은 어떠한 문화적 역학 속에서 유도된 것일까.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의 일본에 대한 설명처럼 나는 한국도 ‘죄’보다는 ‘수치’를 기조로 하는 문화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회에서 대의명분과 정의를 중요시하는 노동조합원에게 정치권력과 법을 통해 폭력적인 공갈범이라는 공개적 낙인을 찍는 것이야말로 말 그대로 ‘치명(致命)’적 고통일 것이다. 이것은 브렛 리츠(미국 정신과 교수)가 지적한 ‘도덕적 상처(moral injury)’에 가깝다. 리츠는 권력에 의해 누군가가 믿었던 도덕적 가치가 훼손당할 때 극심한 심리적 고통을 겪게 된다고 보았다.
수많은 노조원들이 겪는 고통은 지금껏 그들이 지켜온 도덕적 가치가 비난받고, 믿었던 법과 사회의 최소한의 도덕성마저도 무너지고 있음을 목격하는 데서 오는 것일지 모른다. 거리 위 노조의 한 맺힌 절규가 시민들의 공감보다는 ‘불편한 소음’과 ‘폭력성’으로 받아들여지게 될 때 노조는 진짜 마녀가 된다. 이것은 도덕과 법을 앞세운 고문이자 일종의 저주인 셈이다.
남는 의문은 정치권력과 자본세력 중 어느 쪽이 노조의 힘이 확장되는 걸 더욱 강렬히 반대하는 것일까라는 것이다. 어느 쪽에 의해서든 매년 5월에는 명복을 빌어야만 하는 수많은 고인들이 존재한다. 미처 다 부르지도 못한 이름들. 그들의 명복을 또 한 번 진심으로 빌어본다.
김관욱 덕성여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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