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귀은의멜랑콜리아] 외교 담론의 반작용, 비판 담론의 부작용

2023. 5. 9. 0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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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 ‘방미 외교’ 나이브한 평가에
일부 투자·핵 분야 격정적 비판
정부 과잉대응 되레 악영향 초래
중요한 건 국민들의 지속적 관심

외교에 대해 일반 국민이 말할 수 있는 부분은 별로 없다. 외교는 국가 간 미묘한 권력 역학과 이해관계 속에서 작동되는 것이고, 각 국가의 수장은 말할 것과 말하지 않을 것을 선택하여 담론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담론 또한 외교다. 대통령이 국민에게 전하는 말이라 할지라도, 이 상황 전체는 상대국에게 전달되고 이것 자체가 또 하나의 외교가 된다. 외교 담론은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되, 이 사실에는 강조와 삭제, 편집이 따를 수밖에 없다.

지난 4월 대통령 방미 외교에 대한 비판은 ‘투자’와 ‘핵’에 집중됐다. 투자한 금액과 투자받은 금액의 차이가 성토됐고, 북한의 핵 위협에 대해서 확실한 안보 약속을 미국으로부터 받아오지 못했다는 비판이 이어졌다. 투자 금액, 그 정량화한 수치로 국익을 가늠할 수 없다. 투자를 받은 것이 더 큰 이익을 남길지, 투자한 것이 오히려 더 큰 이득으로 돌아올지 아직은 모른다. 비판을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경제적 투자가 반드시 경제적 이득만을 위한 것도 아니다. 핵 방위 조약에 대해서도 단 한 문장, “북한이 쏘면 미국도 쏜다”는 식의 확정을 바라는 것은 오히려 핵의 심각성을 못 느낀다는 증거다. ‘핵’을 마치 SF 영화, 전쟁 영화의 소재처럼 소비한다는 증거인 것이다.
한귀은 경상국립대 교수·작가
방미 외교 결과에 대한 대통령의 순진해 보이는 담론은 오히려 복잡한 진실을 숨기기 위한 장막일 수도 있고, 대통령의 담론이 ‘나이브(순진)하다’며 ‘나이브한 비판’을 쏟아내는 인사들의 반응을 미리 예측한 정략적인 것일 수도 있다. 빗나간 의제를 조장하는 일차원적인 비판이 막무가내로 진행될 때 권력은 오히려 그 소란스러운 목소리에 숨어 더 권위적으로 작동할 수도 있다.

일부 정치인이나 정치비평가의 단순하고 격정적인 비판은 대중에 의해 쉽게 소모된다. 이 유통 시스템을 가동하는 것은 인정 욕구다. 대중의 귀는 확성기 같은 단정적인 담론에 열려 있고, 이 귀를 향해 외치면 자신의 환산가치를 쉽게 높일 수 있다. 이들의 피드백은 국민을 정치에 참여시키는 것이 아니라 정치를 환멸하게 만든다. 이들이 단순 논리로 문제를 환원할 때 자본주의 시스템을 악용하여 초법적으로 이득을 챙기는 자들은 활보하고 초양극화는 더 심화한다. 초양극화를 비판하면서 투사의 모습을 했던 선동가가 결국 이 초양극화의 조력자가 되는 셈이다.

이런 인사를 좌파라고 규정짓고 색출하려는 것은 오히려 이들의 인정 욕구를 더 부추기는 결과를 낳는다. 이들은 이제 단순하고 맹목적인 선동가가 아니라 정권에 의해 억압받는 투사가 된다. 정부의 과잉 대응이 이들을 정의로운 투사로 만든다. 매체 시장에서 그들의 환산가치는 더 높아진다.

글로벌 신자유주의 대통령은 최고경영자(CEO)가 될 수밖에 없다. 윤석열 대통령이 스스로 ‘영업사원’이라고 칭하는 것은 신자유주의 대통령의 CEO 정체성에 대한 겸양적 표현일 것이다. CEO 대통령은 국익을 챙기면서 국가 간 긴장을 관리하는 중재자이자 기술관료(테크노크라트)가 될 수밖에 없다.

문제가 있다. 시장 자유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묶여 있던 규제를 풀어야 하니 강제할 때보다 더 집약적인 권력을 행사하게 된다. 규제를 풀면 국민 전체가 이득을 보는 것이 아니라 거대 기업과 거대 자산가가 독점적 이득을 본다. 낙수효과는 미미하다. 서민의 경제는 더 위축된다. CEO 대통령은 서민의 삶보다 사회적 부(파이)를 키우는 데 집중하게 된다. ‘주 62시간제’도 그런 이유다. 주 62시간제는 분명 효율성을 높이고 사회적 부를 키우겠지만 그 역효과로 서민의 삶은 박탈될 수 있다.

CEO 대통령이 미국 순방 중일 때 전세사기 피해자의 고통이 극에 달했다. 대통령이 돈 매클레인 노래를 부르고 있을 때 피해자들은 언제든 쫓겨날 수 있게 집을 비워둘 수밖에 없었다. 집이 경매에 넘어가자 그 집은 또 다른 이의 투자·투기의 과녁이 되었다. 대통령과 피해자와 투자·투기자는 같은 시간, 전혀 다른 세계에 있었다. 그 세계 바깥에는 전세사기로 자살한 청년의 영정이 놓여 있었다. 국토부 장관은 국민의 혈세로 이들을 지원할 수는 없다고 했다. 장관의 뒤에는 전세사기꾼에게 무제한 대출을 해 준 은행이 여전히 건재했다. 사기꾼은 제도를 이용하여 합법적으로 사기를 쳤다. 그렇다면 전세사기 피해는 사기꾼과 제도, 은행이 함께 공모한 결과다.

어렸을 때 매일 저녁 칼국수를 먹은 적이 있다. 실처럼 겨우 몇 줄 풀린 계란이 아쉬웠지만, 맛있었다. 엄마가 사기를 당했기 때문이었다. 사정을 딱하게 여긴 동네 할머니가 밀가루 두 포대를 엄마에게 줬고, 엄마는 쌀값을 아끼느라 일 년 내내 밀가루를 반죽해 칼국수를 만들었다. 어린 나는 그 할머니에게 고마워한 적 없었고, 지금, 고마움을 느끼지 않게 해 준 그 할머니에게 감사함을 느낀다. 할머니는 마치 처치 곤란한 거대한 물건을 내맡기기라도 하듯 밀가루 포대를 내려놓고 가셨기에 부채감과 수치감 없이 칼국수를 먹을 수 있었다.

정부가 제도를 개선하고 피해자 구제책을 만들게 하는 건 그 밀가루 할머니 같은 이웃일 것이다. 피해자를 도우라는 말이 아니다. 피해자에 대한 관심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일부 인사의 선동적인 담론이 아니라 국민의 지속적인 시선이 제도를 바꾼다. 국민의 시선이야말로 정부가 더 이상 합법적 사기를 묵과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한귀은 경상국립대 교수·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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