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귀은의멜랑콜리아] 외교 담론의 반작용, 비판 담론의 부작용
일부 투자·핵 분야 격정적 비판
정부 과잉대응 되레 악영향 초래
중요한 건 국민들의 지속적 관심
외교에 대해 일반 국민이 말할 수 있는 부분은 별로 없다. 외교는 국가 간 미묘한 권력 역학과 이해관계 속에서 작동되는 것이고, 각 국가의 수장은 말할 것과 말하지 않을 것을 선택하여 담론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담론 또한 외교다. 대통령이 국민에게 전하는 말이라 할지라도, 이 상황 전체는 상대국에게 전달되고 이것 자체가 또 하나의 외교가 된다. 외교 담론은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되, 이 사실에는 강조와 삭제, 편집이 따를 수밖에 없다.
일부 정치인이나 정치비평가의 단순하고 격정적인 비판은 대중에 의해 쉽게 소모된다. 이 유통 시스템을 가동하는 것은 인정 욕구다. 대중의 귀는 확성기 같은 단정적인 담론에 열려 있고, 이 귀를 향해 외치면 자신의 환산가치를 쉽게 높일 수 있다. 이들의 피드백은 국민을 정치에 참여시키는 것이 아니라 정치를 환멸하게 만든다. 이들이 단순 논리로 문제를 환원할 때 자본주의 시스템을 악용하여 초법적으로 이득을 챙기는 자들은 활보하고 초양극화는 더 심화한다. 초양극화를 비판하면서 투사의 모습을 했던 선동가가 결국 이 초양극화의 조력자가 되는 셈이다.
이런 인사를 좌파라고 규정짓고 색출하려는 것은 오히려 이들의 인정 욕구를 더 부추기는 결과를 낳는다. 이들은 이제 단순하고 맹목적인 선동가가 아니라 정권에 의해 억압받는 투사가 된다. 정부의 과잉 대응이 이들을 정의로운 투사로 만든다. 매체 시장에서 그들의 환산가치는 더 높아진다.
글로벌 신자유주의 대통령은 최고경영자(CEO)가 될 수밖에 없다. 윤석열 대통령이 스스로 ‘영업사원’이라고 칭하는 것은 신자유주의 대통령의 CEO 정체성에 대한 겸양적 표현일 것이다. CEO 대통령은 국익을 챙기면서 국가 간 긴장을 관리하는 중재자이자 기술관료(테크노크라트)가 될 수밖에 없다.
문제가 있다. 시장 자유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묶여 있던 규제를 풀어야 하니 강제할 때보다 더 집약적인 권력을 행사하게 된다. 규제를 풀면 국민 전체가 이득을 보는 것이 아니라 거대 기업과 거대 자산가가 독점적 이득을 본다. 낙수효과는 미미하다. 서민의 경제는 더 위축된다. CEO 대통령은 서민의 삶보다 사회적 부(파이)를 키우는 데 집중하게 된다. ‘주 62시간제’도 그런 이유다. 주 62시간제는 분명 효율성을 높이고 사회적 부를 키우겠지만 그 역효과로 서민의 삶은 박탈될 수 있다.
CEO 대통령이 미국 순방 중일 때 전세사기 피해자의 고통이 극에 달했다. 대통령이 돈 매클레인 노래를 부르고 있을 때 피해자들은 언제든 쫓겨날 수 있게 집을 비워둘 수밖에 없었다. 집이 경매에 넘어가자 그 집은 또 다른 이의 투자·투기의 과녁이 되었다. 대통령과 피해자와 투자·투기자는 같은 시간, 전혀 다른 세계에 있었다. 그 세계 바깥에는 전세사기로 자살한 청년의 영정이 놓여 있었다. 국토부 장관은 국민의 혈세로 이들을 지원할 수는 없다고 했다. 장관의 뒤에는 전세사기꾼에게 무제한 대출을 해 준 은행이 여전히 건재했다. 사기꾼은 제도를 이용하여 합법적으로 사기를 쳤다. 그렇다면 전세사기 피해는 사기꾼과 제도, 은행이 함께 공모한 결과다.
어렸을 때 매일 저녁 칼국수를 먹은 적이 있다. 실처럼 겨우 몇 줄 풀린 계란이 아쉬웠지만, 맛있었다. 엄마가 사기를 당했기 때문이었다. 사정을 딱하게 여긴 동네 할머니가 밀가루 두 포대를 엄마에게 줬고, 엄마는 쌀값을 아끼느라 일 년 내내 밀가루를 반죽해 칼국수를 만들었다. 어린 나는 그 할머니에게 고마워한 적 없었고, 지금, 고마움을 느끼지 않게 해 준 그 할머니에게 감사함을 느낀다. 할머니는 마치 처치 곤란한 거대한 물건을 내맡기기라도 하듯 밀가루 포대를 내려놓고 가셨기에 부채감과 수치감 없이 칼국수를 먹을 수 있었다.
정부가 제도를 개선하고 피해자 구제책을 만들게 하는 건 그 밀가루 할머니 같은 이웃일 것이다. 피해자를 도우라는 말이 아니다. 피해자에 대한 관심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일부 인사의 선동적인 담론이 아니라 국민의 지속적인 시선이 제도를 바꾼다. 국민의 시선이야말로 정부가 더 이상 합법적 사기를 묵과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한귀은 경상국립대 교수·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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