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 계약 시작한 자율주행 ‘레벨 3’ 차량…국내 도로 풍경 바뀌나
고속도로 등 조건 충족 때 AI에 운전 주도권…손과 눈 모두 자유로워져
관련 법은 이미 준비됐지만 ‘자기 인증절차’ 따르는 안전 규제 불안도
지난 3일 기아가 공개한 EV9의 30초 분량 광고 영상에는 운전자가 운전대에서 손을 떼는 장면이 나온다. EV9 GT 라인에 탑재될 예정인 자율주행 레벨 3 기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레벨 3 단계에선 고속도로 같은 일부 조건에서 자동차가 주도권을 갖고 스스로 운행한다. 운전자의 손과 발 그리고 눈은 자유를 얻게 된다. 운전자는 스마트폰을 만지거나 영화를 볼 수도 있다. 국내 자동차 시장에서 압도적 점유율을 가진 현대차그룹이 레벨 3 자율주행을 본격 도입하면서 ‘운전’이라는 개념이 한 차원 달라지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 가시화한 레벨 3 자율주행 시대
현대차그룹은 EV9과 EV9의 고성능 모델인 GT 라인의 사전 계약을 지난 3일부터 시작했다. EV9 GT 라인에는 자율주행 레벨 3 기능이 탑재된다. EV9 GT 라인의 출시 시점은 확정되지 않았지만, EV9 일반 모델 이후에 나올 예정이다. EV9 GT 라인 출시는 자율주행 레벨 3 기능을 갖춘 다수의 자동차가 본격적으로 국내 도로를 다니는 시대가 된다는 의미다.
다만 현대차그룹 기준으로 자율주행 레벨 3 기능을 최초 탑재하는 차는 EV9이 아닐 수도 있다. 제네시스 G90이 주인공일 수 있다. 현대차그룹은 당초 플래그십이자 고급 브랜드로 상징성을 갖춘 제네시스 G90에 자율주행 레벨 3를 탑재하겠다고 밝혔다. G90은 지난해 4분기 출시 예정이었지만, 한 차례 연기돼 지난 3월 말 출시됐다. 하지만 이번 G90에는 레벨3 기능은 빠졌다.
현대차그룹은 어느 쪽 모델에 먼저 레벨 3를 넣을지는 확정하지 않았다는 입장이다. 어느 쪽이든 자율주행 레벨 3 모델이 출시되고 안정되면 현대차그룹 차 전반으로 적용이 확대될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되면 한국의 일부 고속도로에서는 사람이 아닌 자동차 스스로 운전하는 차들이 점차 늘어나게 된다.
자율주행 레벨 3 기술이 이미 다가와 있는 상황이지만, 아직까지 시점은 장담할 수 없다. 현대차그룹은 지난 3월에도 G90에 자율주행 레벨 3가 들어가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속도를 높이면서 기술을 검증하는 시간이 더 필요해졌다”고 밝혔다.
레벨 3 적용 속도를 시속 60㎞에서 80㎞로 상향하면서 추가적인 기술 검증 과정이 필요해졌다고 한다. 고속도로 주행에 한정되는 레벨 3 시속 60㎞ 적용은 오히려 위험할 수도 있고, 실용적이지 않을 수 있다. 이에 따라 속도를 높이면서 기술 검증에 들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시험 중인 기술로만 보면 이미 자율주행 레벨 4 단계에도 접어들었다. 현대차가 2021년 9월부터 시범 서비스로 운영 중인 ‘로보셔틀’에는 레벨 4 자율주행이 적용돼 있다. 로보셔틀은 2021년 8~9월 두 달간 세종시에서 시범 운영을 통해 승객들을 태운 바 있다. 스스로 주행하는 것은 물론이고 승객들이 앱을 통해 호출하면 해당 위치로 이동한다.
■ 레벨 3는 어떤 모습일까
사실 레벨 3는 업계나 전문가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자율주행 단계로 보진 않는다. 영화처럼 운전자가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로 보조석에 앉은 승객으로 지낼 수 있는 단계는 레벨 4 단계부터다. 즉 레벨 3는 레벨 4의 전 단계지만 상징적 의미만 갖는다.
미국 자동차공학회(SAE)는 자율주행 단계를 0단계에서부터 5단계까지 총 6단계로 나누는 데 레벨 3는 이 중에서 4번째 단계다. 절반 이상을 넘어온 단계라는 의미다. 특히 3단계부터 뚜렷하게 달라지는 점은 조건부이긴 하지만 운전자가 운전대에서 손을 놓을 수 있다는 점이다. 주도권이 인간에게 있느냐, 자동차에게 있느냐의 차이로 볼 수 있다.
이미 많이 보급된 레벨 2는 ‘스마트 크루즈 컨트롤’ 기능을 연상하면 된다. 일정 속도를 정해주면 자동차가 알아서 주행하고 앞차와의 간격에 맞춰 속도를 조절하고 멈추기도 한다. 차선을 옮겨 다니지는 않지만 같은 차선 내에서는 이탈하지 않도록 조정도 해준다. 하지만 이 모든 과정에서 운전자는 발을 뗄 수는 있지만 손과 눈을 뗄 수는 없다.
레벨 3 단계는 운전자가 고속도로 같은 일정 조건을 충족하면 발은 물론 손과 눈까지 모두 자유롭게 쓸 수 있다. SAE가 규정하는 레벨 3는 ‘조건부 자율주행’으로 부른다. 인공지능(AI)이 운전대를 조작하고 속도도 조절한다. 주변 환경도 파악한다. 고속도로 같은 일부 조건에서 차가 스스로 운행한다. 운전자는 조건이 충족되는 상황에선 운전대를 잡을 필요조차 없다. 차선 변경도 알아서 한다는 의미다.
다만 고속도로가 끝나거나 고속도로로만 목적지로 갈 수 없을 경우에는 중간중간 인간의 개입이 필요하다. 국토가 넓지 않은 한국을 기준으로 보면 실효성이 높지 않을 수 있다는 평가도 있다.
■ 법은 이미 준비돼 있지만
법을 보면 레벨 3가 완전히 다른 운전 환경이란 점을 느낄 수 있다. 지난해 4월20일 시행된 도로교통법 제2조는 ‘운전’의 정의를 새롭게 했다. ‘운전이란 도로에서 차마 또는 노면전차를 그 본래의 사용방법에 따라 사용하는 것(조종 또는 ‘자율주행 시스템을 사용하는 것’을 포함한다)을 말한다’고 돼 있다. 운전의 개념에 직접 조종 외에도 자율주행 시스템 이용이라는 새로운 선택지가 포함됐다.
여기에 더해 도로교통법 제50조 2항은 자율주행차 운전자의 준수사항 등을 규정하고 있다. 이 조항에는 운전자 준수사항을 신설하면서 “자율주행 시스템을 사용하는 경우, 운전 중 휴대전화 사용금지 등 일부 운전자 주의의무가 완화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국토교통부 관계자는 “레벨 3에선 휴대전화를 보거나 영화를 볼 수도 있지만 수면을 취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자율주행 레벨 3가 탑재된 자동차가 늘어나면 고속도로에는 운전 중에 스마트폰을 조작하고 영화를 보는 운전자가 타고 있는 차들이 늘어난다는 의미다.
우려되는 지점도 있다. 국내 자동차 안전 규제는 ‘자기 인증’ 절차를 따른다. 일단 제조사가 책임을 지고 먼저 출시하고, 향후에 국토부 산하 자동차안전연구원 같은 기관에서 사후 점검하는 방식이다.
자기 인증 절차는 자율주행 단계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자동차 제조사가 스스로 판단해 레벨 3 기능을 갖췄고, 안전하다고 판단되면 출시한다. 자기 인증 방식은 효율성이 높지만, 사전 예방의 의미에선 불안감도 줄 수 있다. 자율주행처럼 새로운 기술이 도입될 때는 더욱 그렇다.
다만 안전한 차를 내놓지 못했을 경우 제조사가 그 책임을 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신중하게 출시할 거란 관측도 있다. 업계 관계자는 “현대차그룹의 자율주행 레벨 3 출시가 늦어지는 건, 그만큼 안전성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박순봉 기자 gabgu@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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