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사드의 시리아, 국제무대 돌아온다
내전 ‘정부군 우세’ 현실론에 사우디 등 아랍국들 셈법 작용
서방 “끔찍한 범죄에 면죄부”…미 ‘중동 영향력’ 약화 확인
‘중동의 학살자’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사진)이 이끄는 시리아가 국제무대로 돌아온다. 내전 발발과 반정부 인사에 대한 잔혹한 고문, 무고한 민간인을 겨냥한 독가스 공격 등 갖은 만행으로 2011년 아랍연맹(AL)에서 퇴출당한 지 12년 만에 재가입 길이 열린 것이다.
알아사드 대통령은 사우디아라비아를 중심으로 중동 질서가 급격히 재편되는 틈에 사실상 면죄부를 부여받았고, 오히려 중동 주요국의 구애를 받기 시작했다. 반면 시리아 반군을 지원하며 알아사드 대통령 축출을 시도했던 미국은 중동에서 약해지는 영향력에 당황하는 모습이다.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7일(현지시간) 아랍연맹 22개 회원국은 이집트 카이로에서 외교 수장 회의를 열고 시리아의 아랍연맹 재가입 찬반 투표를 진행했다. 과반인 13개 회원국이 찬성표를 던지며 시리아의 아랍연맹 복귀가 확정됐다.
아랍연맹의 발 빠른 움직임엔 사우디의 힘이 작용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수니파 종주국인 사우디는 2011년 시리아에서 내전이 발발하자 반군을 지원했다. 범시아파인 알아사드 대통령과 그를 뒷받침하는 시아파 맹주 이란을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전쟁은 쉽게 끝나지 않았고, 그사이 사우디 실권자인 무함마드 빈살만 왕세자는 석유 위주 산업 구조 재편과 네옴시티 건설 등 내부 개혁에 힘쓰기 시작했다. 불안정한 외부효과를 줄이기 위해선 앙숙 이란과 관계 개선이 필요했고, 지난 3월 중국의 중재로 결국 손을 잡았다.
내전이 정부군 승리로 기울고 있다는 현실론도 작용했다. NYT는 “알아사드 대통령이 최소 수년간 정권을 지킬 가능성이 커지면서 아랍국가의 계산법이 달라졌다”고 평가했다. 특히 시리아에서 쏟아진 내전 난민을 상당수 수용한 레바논과 요르단의 경우 시리아가 하루빨리 아랍연맹에 복귀해야 이들을 시리아로 돌려보낼 명분이 생기고, 경제적 부담을 덜 수 있다는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 지난 2월 시리아를 강타한 규모 7.8 대지진을 계기로 구호 물품이 대거 투입되면서 자연스럽게 국제사회 제재가 풀렸다는 점도 알아사드 대통령에겐 호재였다는 평가가 나온다.
인권단체와 서방은 반발했다. 국제인권단체인 시리아캠페인은 “아사드가 처벌받지 않고 끔찍한 범죄를 계속 저지를 수 있도록 승인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외신에 따르면 미 국무부와 영국 정부도 “알아사드 정권은 여전히 무고한 시민을 구금, 고문, 살해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반면 알아사드 정권을 지원해 온 러시아 정부는 “아랍국가들이 세계 무대에서 독자적인 정책을 수행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행동”이라고 평가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이번 사례가 중동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약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했다.
시리아 내전은 2011년 3월 시리아 남부 소도시 다라의 한 학교 담벼락에 ‘민중은 정권의 퇴진을 원한다’고 쓰여진 낙서에서 시작됐다. 알아사드 대통령은 반정부 시위대와 반군에 대해 전기 고문과 성폭행 등 만행을 일삼았고, 2014년엔 수도 다마스쿠스 근처 반군 지역에 화학무기를 살포하는 잔혹함을 보였다. 내전으로 사망한 사람은 최소 40만명으로 추산되지만, 최대 100만명에 이를 것이란 주장도 있다.
손우성 기자 applepi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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