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와 공감에 인색한 정부…위로받지 못하는 ‘사회적 아픔’

김세훈·전지현·이홍근 기자 2023. 5. 8. 21:16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안전·노동·여성 문제 등 ‘불통의 시대’
윤석열 정부의 지난 1년은 각계각층에서 불통을 호소한 한 해였다.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 활동가들이 지난 1월13일 서울 중구 파이낸스빌딩 앞에서 정부의 강제동원 피해자 구제 방안에 반대하는 촛불집회를 하고 있다(위 사진). 국회 여성가족위원회에서는 지난해 10월25일 용혜인 기본소득당 의원이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의 사퇴를 촉구하는 손팻말을 붙이고 있다(가운데). 서울경찰청 강력범죄수사대가 지난 1월19일 서울 영등포구 민주노총 서울경기북부지부를 압수수색하고 있다. 권도현·한수빈 기자·국회사진기자단

민주주의의 핵심은 ‘소통’이다. 소통을 통해 이해관계와 갈등을 조정하는 것이 정치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정운영도 마찬가지다. 소통이 부재한 곳에 나부끼는 것은 ‘법을 통한 지배’의 앙상한 자취요, 무모한 결단이요, 설익은 역사와의 대화이다. 공동체의 통합은 사라지고 편가르기가 횡행한다. 얄팍한 정치 전략이 정치의 본령을 대체한다. 불통과 갈라치기는 선후와 인과를 따지기 어렵게 뫼비우스의 띠처럼 얽혀 있다. 이 둘은 악순환의 연쇄고리를 형성하면서 공동체를 적극적으로 해체한다. 그 폐허에 남는 것은 공동체 구성원 간 상호 불신과 적대의 증폭이다.

시민과의 소통이란 시민의 삶에 대한 ‘공감’ ‘이해’ ‘책임’이 전제될 때 비로소 가능한 정치행위이다. 대표적인 예가 사과이다. 정부의 사과는 피해자에 대한 공감과 이해, 책임감의 발로이자 정부가 피해자에 대해 그런 자세를 가지겠노라고 공식적으로 알리는 결의의 표시다. 그런 점에서 정부의 사과는 말 한마디로 끝내는 일회성 행위가 아니라 후속 실천까지 아우르는 일련의 행위 목록이다. 이태원 핼러윈 참사에 대한 참된 사과는 사태의 책임자에게 합당한 정치적, 법적 책임을 지우는 것까지를 포함한다.

윤석열 정부의 불통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 바로 사과에 인색했다는 점이다. 경향신문이 윤석열 정부 1년을 돌아보며 ‘사과받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본 이유이다.

누구도 개인 안전에 책임 안 져
이태원 참사 후 각자도생 심화


이태원 참사 희생 고 문효균 아버지 문성철씨



문성철씨(57)는 이태원 참사로 아들 효균씨(31)를 잃었다. 문씨는 참사 직후부터 6개월간 일을 하지 못했다. 서울의 한 정보기술(IT) 회사를 다니며 지난해 팀장으로 승진했다고 기뻐하던 아들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려 일상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문씨는 아들의 죽음에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에 좌절했다. 많은 인파가 몰릴 것으로 예상된 참사 현장에 왜 경찰을 사전배치하지 않았는지 문씨에게 설명해주는 사람도 없었다. 문씨는 “이태원 참사 후 대한민국은 누구도 개인의 안전을 책임져주지 않는 각자도생의 사회로 보인다”고 했다.

문씨는 참사 직후 국가의 도움을 기다렸다. 그러나 참사 수습도 유가족들의 몫이었다. 그는 “참사 직후에 심리적으로 너무 지쳐 있는 상황에서도 온갖 서류 작업을 위해 직접 발로 뛰어다녀야 했다”며 “대형 재난이 터졌을 때 개인을 보호해야 할 정부는 유가족들을 방관했다. 지금까지 이뤄진 것들도 모두 유가족들이 정부에 매달리며 요구해서 받아낸 것들”이라고 했다.

참사 후유증에 시달리는 유가족을 ‘정쟁을 유발하는 존재’로 몰아가는 정부의 모습에 문씨는 참담함을 느꼈다. 그는 “참사 직후에 위패도, 사진도 없어 누구를 추모하는지도 모를 분향소를 며칠 세워놓고 속전속결로 추모를 끝냈다”며 “제대로 된 사과 한번 없이 진상규명을 원하는 유가족들에게 ‘정쟁을 유발한다’고 낙인찍었다”고 했다.

정부의 무책임한 태도는 2차 가해로 이어졌다. 문씨를 포함한 유가족들은 돌아가면서 시민분향소를 지키고 있다. 시민분향소 앞에서 일부 시민들은 ‘왜 그날, 그 골목에 있었냐’고 소리치기도 한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문씨는 숨이 턱 막혔다고 했다. 그는 “국가가 국민을 지켜야 할 의무를 저버리니 이제는 개인의 사고는 모두 개인의 책임으로 돌아가는 사회가 된 것 같다. 버스, 지하철을 타다 사고가 나도 ‘왜 그 버스, 지하철에 탔냐’고 말하게 되는 사회가 될까 봐 무섭다”고 했다.

문씨는 정부에 책임자 처벌과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있다. 그는 “정치지도자는 형사적 책임뿐 아니라 대형 재난 앞에서 책임지는 자세를 보여야 하는데 현 정부에서는 그런 사람이 한 명도 없다”고 했다.
목소리 안 들어줘 노동자 분신
노동 현장엔 비통함만 쌓여가


건설노조 강원건설기계지부장 박만연씨



박만연씨(54)는 노동절이던 지난 1일 분신한 고 양회동 지대장(50)과 강원도에서 건설노조 활동을 해왔다. 동료의 죽음 이후 지난 8일 강원도의 한 건설현장을 찾은 박씨는 현장 관계자에게 대화를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현장 관계자는 “건설노조원은 안 쓸 거고, 만날 이유가 없다. 노동조합을 탈퇴하면 생각해보겠다”고 했다. 지난 4일부터 서울에 차려진 양씨의 빈소를 쭉 지키다 잠시 강원도 현장에 내려온 박씨는 빈손으로 빈소로 돌아가야 한다.

박씨는 양 지대장이 ‘조용하고 묵묵한 사람’이었다고 했다. 지난 1년 현장에서는 ‘건설노조원은 고용 안 한다’는 분위기가 심화됐다고 한다. “남한테 욕 한마디도 못하는 성격”이었다는 양 지대장은 조합원을 먼저 고용시키기 위해 현장 교섭에 앞장섰다. 박씨는 “정작 본인은 일을 거의 못했다. 지난 4월에도 딱 하루 일했다고 하더라”고 했다.

박씨는 대부분 일용직인 건설노동자들은 취업과 실업을 반복한다고 했다. 박씨는 “노조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건설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찾아다녀야 했다”고 했다. 건설노조 지역별 지부가 ‘조합원을 채용해달라’고 교섭하는 것은 건설노동자들이 지역에 자리 잡고 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현 정부의 ‘반노동’ 강경 기조에 경찰이 정당한 노조활동까지 ‘공갈’로 규정하면서 현장의 분위기는 얼어붙었다. 박씨는 “이전까지는 커피 한 잔이라도 마시면서 대화를 했다. 그런데 윤 정부 들어서는 수사관들이 수시로 ‘몇월 며칠에 누가 왔다 가지 않았냐, 두려움을 느꼈냐, 그런 부분 있으면 연락하라’고 물으니 건설사에서 아예 만나주지 않는 상황”이라고 했다.
이젠 북녘 가족 만나리라는 기대를 접었다


이산가족 신인철씨

신인철씨(95)는 남한에 정착한 이산가족이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할 때 북한에서 징집됐다. 신씨는 가족에게 인사할 겨를도 없이 끌려가 전선에 투입됐고, 1·4후퇴 때 남한에 남겨졌다. 북한에 남은 가족을 만나고자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소득은 없었다. 그럼에도 신씨는 아직 희망을 버리지 못했다. 그는 “북한에 사촌동생과 6촌 가족이 남아 있다. 이산가족 상봉을 신청했지만 선정된 적이 없다”며 “동생의 생사라도 확인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신씨의 남은 소원은 죽기 전에 고향 땅을 밟아보는 것이다. 세월이 흘러 신씨의 검은 눈썹은 희어졌지만, 마음속에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여전하다. 그는 “살던 집터라도 있을 테니까 가보고 싶었던 거다. 가봐야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안다”며 “그렇지만 시간이 흘러도 고향은 고향이다. 거기에 있는 부모의 산소에 술 한잔이라도 따르고 싶다”고 했다.

요즘 신씨는 조금씩 기대를 버리고 있다. 지난 1년간 남북관계가 급격하게 나빠졌기 때문이다. 신씨는 “고향에 가려면 (남북한 간) 사이가 좋아야 하는데, 좀 좋아지려다 사이가 나빠지니까 (어렵다)”며 “지난 정부에서 분위기가 좋을 때는 우리 같은 이산가족에게도 ‘한 번 갔다 올 수 있겠구나’ 하는 희망이 있었다. 그런데 올해부터는 완전히 틀어져 버렸다”고 했다.

장경준씨(89)도 신씨처럼 1·4후퇴 때 남한에 남은 이산가족이다. 1995년 장씨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접했다. 누나와 시각장애인이었던 조카의 생사는 알지 못한다. 이산가족을 신청해도 번번이 떨어졌다. 장씨는 “이제는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도 접고 있다. 내 나이가 90이 다 돼 가는데 (시간이) 얼마나 남았겠나. 가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며 “지난 정부 때는 분위기가 좋아서 될 줄 알았는데 이제는 점점 안 좋아지고 있으니 아쉽다”고 했다.

지난 2월 통일부 발표에 따르면 2022년 생존 이산가족 수는 약 4만2000명이다. 매년 숫자가 가파르게 줄고 있다. 지난해에는 3647명의 이산가족이 사망했다.
제3자 변제안 후 토론 한 번뿐
당국은 우리와 소통하려 안 해


‘강제동원 피해’ 양금덕 할머니 아들 박회운씨



‘강제동원 피해자’ 양금덕 할머니(94)의 아들 박회운씨(63)는 어머니의 든든한 조력자였다. 양 할머니가 일본 법원에 강제동원(징용)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할 때 소송 원고를 직접 썼다. 그는 지난 30년간의 법적 싸움을 “어머니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들의 싸움은 수포가 될 위기에 처했다. 정부는 지난 3월 일본 전범기업의 배상을 배제한 ‘제3자 변제’ 강제징용 해법안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1944년 13세이던 양 할머니는 ‘수준 높은 교육을 받게 해주겠다’는 말에 속아 일본으로 갔다. 양 할머니가 도착한 곳은 학교가 아니라 미쓰비시 나고야 비행장이었다. 이곳에서 하루 12시간씩 페인트칠을 했다. 늘 유독물질에 노출되는 환경이었지만 마스크, 장갑 등 안전용품은 주지 않았다. 이듬해 한국으로 돌아올 때까지 17개월을 일했지만 임금은 한 푼도 받지 못했다.

혹독한 노동은 양 할머니의 삶에 깊은 상흔을 남겼다.

박씨는 “1960년대에 민방위 사이렌이 울리면 어머니가 불안해하시는 모습을 여러 번 봤다. 강제동원 당시 항공장에서 사이렌 소리를 들으며 일한 트라우마 때문”이라며 “어머니처럼 정신력이 강하신 분이 그런 모습을 보여 놀랐다”고 했다.

양 할머니는 1992년 일본 법원에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제기했지만 패소했다. 양 할머니는 2012년 한국 법원에 다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고, 2018년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 판결을 받았다. 박씨는 “판결이 있고 나서 ‘드디어 싸워서 이겼구나’ 하는 성취감이 들었다. 어머니도 일본의 사죄·배상이 이뤄질 것이라는 기대를 하고 계셨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미쓰비시중공업은 판결을 이행하지 않았다. 박씨는 “일본이 또다시 시간 끌기에 나섰다는 말을 듣고 어머니가 ‘그럼 그렇지’라고 말하며 크게 실망하셨다”고 했다.

박씨는 정부가 일방적으로 ‘제3자 변제안’을 발표하는 것을 보고 분노를 느꼈다. 그는 “요식행위로 한 차례 토론회만 열었을 뿐 정부는 한 번도 우리와 제대로 소통을 한 적이 없었다”며 “피해는 일본 전범기업에 받았는데 우리나라 기업의 돈을 걷어서 피해자에게 준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예고편에 불과한 ‘여성 지우기’
점점 더 심해질 것만 같아 불안


여가부 ‘버터나이프크루’ 프로젝트 참가 조혜원씨



‘버터나이프크루’ 사업에 참여했던 조혜원씨(23)에게 지난 1년은 “열심히 쌓아 올린 것들이 한 번에 무너질 수도 있다는 걸 깨달은 한 해”였다. 버터나이프크루는 일상에서 성평등 의제를 찾아내는 청년 프로젝트를 지원하는 사업이다. 2019년 여성가족부 주관으로 시작됐다. 조씨는 ‘뿌리탐사’라는 이름으로 대학 내에서 성평등 활동을 하는 이들의 심리지원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버터나이프크루 사업은 지난해 7월 예고도 없이 폐지됐다. 김현숙 여가부 장관이 발대식에 와서 사업을 응원하겠다는 축사까지 하고 간 뒤였다. 조씨는 “정부가 페미니즘에 우호적이지 않다는 건 알았지만 사업이 폐지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고 했다.

갑작스러운 사업 폐지 뒤에는 정부·여당의 입김이 있었다. 권성동 당시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버터나이프크루 사업을 두고 “세금 낭비성 사업” “남녀갈등을 증폭한다”고 했다. 여가부의 대응에 조씨는 더 큰 상처를 받았다. 그는 “정부 부처의 수장으로서 사업을 보호해야 할 장관이 오히려 정치인의 말에 동조해 우리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사업을 철회한 것에 너무 화가 났다”고 했다.

조씨는 지난 1년이 이어질 4년에 대한 예고편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불안하다고 했다. 그는 “대통령은 구조적 성차별이 없다고 말했고, 김 장관은 신당역 스토킹살인 사건을 ‘여성혐오 범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며 “1년간 이들의 인식은 달라지지 않았다. 앞으로 사회 전반에서 여성들의 목소리가 점점 지워지는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고 했다.

김세훈·전지현·이홍근 기자 ksh3712@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