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슬픈 카네이션
이태원 참사 희생자 김지현씨는 가족들을 두루두루 챙기던 딸이었다. 어버이날엔 외할머니에게도 카네이션을 선물했다고 한다. 김씨가 블로그에 올린 ‘2022년 버킷리스트’에는 자격증 따기, 겨울바다 보기, 핼러윈 분장하기 등이 적혀 있었다고 한다. 지난해 10월29일, 백설공주 옷을 입고 이태원에 간 지현씨는 버킷리스트를 다 지우지 못하고 하늘의 별이 됐다.
이태원 참사 후 처음 맞는 어버이날인 8일, 서울 중구 서울광장 희생자 분향소 앞에서 이영헌 진보대학생넷 서울인천 대표가 편지를 읽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함께하겠습니다.” 이날 이 단체에서 활동하는 지현씨 또래 대학생들은 참사 피해 유가족들의 가슴에 붉은 카네이션을 달았다. 먼저 떠난 자식들이 사무치고, 더없이 슬픈 카네이션이었다. 청년들을 꼭 끌어안은 채 눈물을 흘린 유가족들은 희생자를 상징하는 별 모양 배지를 주며 고마움을 전했다. 이정민 유가족협의회 대표직무대행은 “해마다 이맘때면 우리 아이들이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아주고 선물을 사 와서 부모를 기쁘게 해주었다”면서 “그러나 오늘은 우리 손에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피켓이 들려 있다”고 울먹였다.
오는 16일은 이태원 참사로 159명이 억울하게 숨진 지 200일째 되는 날이다. 그런데도 진상은 제대로 규명되지 않았고, 지금껏 책임지고 물러난 고위공직자도 없다. 10·29 이태원참사 유가족협의회와 시민대책회의는 이날 서울광장 분향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집중추모주간을 선포했다. 이들은 16일까지 ‘10·29 이태원참사 피해자 권리보장과 진상규명 및 재발방지를 위한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행동을 이어가기로 했다. 특별법은 지난달 20일 야4당의 발의로 첫발을 뗐지만 국민의힘이 국회 국정조사를 했다는 이유로 반대하고 있다. 서울광장 분향소도 서울시는 퇴거 요청을 한 터다.
일어나지 않아야 할 참사가 일어났는데 잊으라고만 하면 슬픔은 분노가 된다. 왜 사과하는 이도 책임지는 이도 없는가. 2022년 10월29일, 그날을 되돌릴 수는 없을까. 몸 가누기조차 힘든 어버이날, 수만번 곱씹은 그리움과 자책으로 돌이 됐을 유가족들의 가슴에 카네이션 대신 하늘로 간 아이들이 달렸다.
이명희 논설위원 minsu@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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