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최초 ‘장기 과제 집중형’ 대통령의 등장
만기친람형 전임자들과 달리
일상 정책 장관·총리에 맡기고
국가적 대형과제에만 집중 뜻
동북아·정부혁신·균형발전…
3개 국정과제위 신설 발표에
정부부처들 치열한 참가 경쟁
12개 위원회·20개 정부부처가
종횡으로 엮인 매트릭스 조직
새로운 국정운영 방식의 출현
고무된 노 대통령 연설
“어렵지만 성공할 수 있다…
그 어떤 혁명보다 더 큰 혁명”
노무현 대통령은 일상적 정책은 장관이나 총리에게 맡기고 부처 단위에서 해결하기 어려운 구조적, 장기적 난제를 푸는 것이 대통령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양극화, 저출산, 인구고령화, 균형발전 같은 장기과제를 해결하려면 정부부처 틀을 넘어서는 국정과제위원회 조직이 필요하고, 이것을 챙기는 게 대통령이 할 일이라는 것이다. 이는 지난번에 이야기했듯이 노 대통령이 박세일·김병국 교수가 공저한 <대통령의 성공조건>을 읽고 얻은 생각이었다.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은 대개 만기친람형이었다. 즉 대통령은 대한민국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를 파악하고 해결한다는 사고방식인데, 이는 일종의 강박관념이다. 실현불가능할 뿐 아니라 국소적인 데 매이다 보면 큰 걸 놓치게 된다. 그래서 일은 열심히 하는데 지나고 보면 남는 게 없다.
역사적으로 만기친람의 대표 군주로 청나라 5대 황제 옹정제를 꼽을 수 있다. 그는 매일 전국에서 올라오는 수백건의 보고를 밤늦게까지 꼼꼼히 살피고 일일이 붉은 글씨로 지적 사항을 써서 내려보냈다. 이를 주비유지(朱批諭旨)라고 한다. 또 비밀경찰을 동원해 신하들을 끊임없이 감시했다. 신하들이 전날 밤에 모여 골패놀이한 걸 아는 황제가 “어젯밤 골패놀이할 때 무슨 이상한 일 없었소?” 하고 묻는다. 신하가 대답하기를 “글쎄요. 도중에 골패가 한개 없어졌습니다.” 그러자 옹정제가 골패를 하나 꺼내며 “혹시 이거 아니오?” 이런 식이다. 신하들이 질겁할 수밖에. 옹정제는 옥좌 뒤에 ‘爲君難’(군주 노릇하기 어렵다)이라고 써서 걸어 놓았는데 신하들은 ‘臣亦不易’(신하 노릇도 쉽지는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옹정제는 과로 끝에 56세로 세상을 떠나 아버지 강희제나, 아들 건륭제만큼 오래 살지 못했고 업적도 한참 뒤진다.
소수 과제 집중형. 이 점이 노 대통령과 다른 대통령들의 근본적 차이다. 나는 그때까지 <대통령의 성공조건>을 읽지 않았지만, 인수위 마지막 날 대통령에게 ‘심심한 대통령이 되시라’고 권한 것은 그와 일맥상통했다.
심심한 대통령의 정반대가 이명박 대통령이었다. 그는 사업가 출신답게 매우 부지런해서 새벽부터 밤까지 일했고, 주말에도 쉬지 않아 ‘월화수목금금금’이란 신조어를 낳았다. 그러나 지나고 보니 내세울 만한 업적이 없음은 참으로 아이러니다.
2004년께 김대중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전윤철 전 경제부총리가 내게 물었다. 혹시 노 대통령이 주말에 참모들에게 전화하거나 불러내는지. 내가 그런 일은 거의 없다고 대답하니 부러워하면서 자기는 비서실장을 하던 시절 주말에도 시도 때도 없이 호출을 받아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고 했다. 나는 운이 좋구나 생각했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하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국정운영에는 부지런함과 세심함이 해롭고, 게으름과 대범함이 필요하다(영국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의 <게으름 찬양>을 읽어보기 바란다). 중요한 것은 부지런함이 아니라 아이디어이며, 좋은 아이디어는 여유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참여정부가 시간이 흐른 뒤 차차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은 노 대통령이 일상 정책을 장관, 총리에게 맡기고, 국정과제위원회를 지휘해 국가적 장기과제와 씨름한 덕분이라고 본다.
노 대통령은 참여정부 출범 초기 정책실장에게 국정과제위 출범 임무를 맡겼다. 내가 위원회 출범 준비를 하면서 중간보고를 하지 않았더니(학자 출신의 특징이다. 관료 출신은 동작이 빠르고 중간보고를 잘한다), 답답해하던 대통령은 3월 21일(금) 9시 대통령 주재 수석회의에서 “정책실장은 일부러 일상 정책을 면제해 주는데….”라면서 국정과제위 발족이 늦어지고 있다고 질책했다. 기존 위원회들을 정비한 뒤 새 위원회들을 발족하라는 지시도 있어 시간이 걸렸고, 사실 준비가 다 돼 있었는데 수석회의에서 지적받으니 조금 억울했다. 오후에 보고하겠다고 답하고 실제로 오후 2시 인수위 정무분과 간사였던 김병준 교수, 기획조정분과 위원이었던 성경륭 교수, 조재희 비서관과 함께 진척 상황을 보고했더니 대통령이 만족해했다.
3월25일(화) 12시 본관 백악실에서 대통령과 나, 정책실 이병완·정만호·조재희 세 비서관이 함께 식사하며 국정과제위 운영계획을 의논했다. 대통령은 위원회 일 이외 나머지 일은 모두 장관, 총리에게 위임하겠다고 했다. 만기친람형 대통령이 되지 않겠다는 중대 선언이다. 위원회는 장관들과 학자들로 구성하기로 했다. 대통령은 주 1회 위원회 회의를 주재하겠다고 놀라운 의욕을 보였는데, 무리라는 느낌이 들었는지 10분 뒤 월 1회로 수정했다. 그러나 나중에 보니 실제로 그보다 훨씬 많은 월 2~3회 국정과제 회의를 소화했다. 노 대통령은 워낙 토론을 좋아하니 대단히 많은 회의를 주재했다. 역대 대통령 중 단연 ‘회의의 제왕’이지 싶다. 수석회의만 해도 매주 2~3회, 월 10회 정도 주재했는데 월 1회 수석회의를 주재한 전두환 대통령의 10배다.(김성익, <전두환 육성증언>)
3월30일(일) 춘추관에 나가 기자들에게 국정과제위 출범 준비상황을 설명했다. 국정과제위 윤곽이 드러나자 각 위원회에 어떤 부처가 들어오느냐를 놓고 부처 간 경쟁이 벌어졌다. 관가에 대통령이 위원회에 관심이 많다는 소문이 났는지 부처들이 서로 위원회에 들어오겠다며 기를 썼다. 흔히 언론에서 대통령 위원회를 가리켜 형식적이라며 ‘옥상옥’이라고 비판하는데, 이는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문제는 대통령의 의지, 관심이다. 대통령이 무관심하면 위원회는 옥상옥이 된다. 그러나 대통령이 관심을 가지면 위원회는 엄청난 위력과 효능을 발휘한다. 참여정부가 이를 실증했다.
4월1일(화) 오전 9시부터 낮 12시10분까지 길게 열린 국무회의에서 동북아, 정부혁신, 균형발전 3개 국정과제위를 놓고 부처간 참가 경쟁이 벌어졌다. 통일부와 과학기술부는 동북아위에, 교육부는 정부혁신위에, 환경부는 균형발전위에 참여하겠다고 밝히는 등 신청이 빗발쳤다. 국정과제위 진입에 실패한 법무부는 불만을 표시했다. 노 대통령은 일단 위원회를 출범하고 나중에 고쳐 나가자고 장관들을 설득했다.
4월16일(수)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과천 중앙공무원교육원에서 국정과제 워크숍이 열렸다. 내가 사회를 보면서 참여정부 12대 국정과제를 ‘신에게는 아직 열두척 배가 있습니다’(今臣戰船 尙有十二)는 이순신 장군의 장계에 비유해 설명했다. 실제로 참여정부 국정과제위원회는 초기에 7개로 시작해서 차차 늘어나 나중에 12개가 됐다. 12개의 위원회와 약 20개 정부 부처가 종횡으로 엮이는 일종의 매트릭스 조직, 이것을 통해 중요한 국가적 장기과제를 해결한다는 전혀 새로운 국정운영 방식이 출현한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위원회 출범에 고무된 표정으로 연설을 했다. “국가 균형발전은 말은 쉽지만 행동은 어렵다. 종합적 접근이 필요하다. 이번에는 꼭 한번 해보자. 여러 위원회 안에 최고 전문가들이 모여 있어 성공할 수 있다. 이게 성공하면 어떤 혁명보다 더 큰 혁명이 될 것이다. 7개 국정과제가 잘 풀리면 나라가 달라질 것이다.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겠다. 1~2년만 고생하면 국민이 알아줄 것이다. 범정부적인 전략 구도를 짜달라.” 이런 취지로 대통령 연설이 있었다. 국정과제위의 역사적 출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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