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없는 그들의 ‘귀여운 한국’
[숨&결][대일본 굴욕외교]
[숨&결] 이주희 |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윤석열 대통령과 일본은 제대로 된 사과를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유사해 보인다. 그런데, 권력자나 국가가 사과를 안 하면 잘못이 정당화될까? 이런 논리라면 가장 강력한 패권 국가인 미국은 절대로 사과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미국은 사과를 잘한다. 미국 의회가 1988년,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계 시민을 강제 수용한 사건과 관련해 제정한 시민자유법이 그 예이다. 감금당한 뒤 당시까지 생존한 8만명이 넘는 사람에게 각 2만달러의 배상이 이뤄졌고, 이 사건을 알리고 교육하기 위한 기금도 마련됐다. “그러나 그 어떤 물질적 배상도 잃어버린 세월을 보상할 수 없습니다. 이 배상은 자산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명예의 회복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잘못을 인정합니다. 법에 기초해 평등한 정의를 지키는 국가로서, 도리를 다할 것을 약속합니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말이다. 사과란 이렇게 하는 것이다. 2021년 조 바이든 대통령도 이 일을 다시 사과했다.
국가 내부에서 발생한 일에는 이처럼 도덕적인 미국은 그러나 한국과 일본의 굴곡진 역사 앞에 철저하게 자국의 이익만을 챙겨왔다. 일본계 미국인 미키 데자키의 다큐멘터리 <주전장>을 보면,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일본의 재군비를 위해 에이(A)급 전범 혐의자이자 인종차별주의자인 기시 노부스케를 스가모 감옥에서 찾아내 석방하고 총리 선거를 위한 비자금을 지원해 그의 소속당인 자유민주당(자민당)을 집권당으로 유지시켜준 이야기가 나온다. 그의 외손자는 평화헌법을 부정하고 천황제를 부활하여 군사대국화를 지향하는 극우단체 ‘닛폰카이기’(일본회의) 의원연맹의 최고 고문이었던 아베 신조 전 총리이다. 중국의 영향력 증대를 우려한 오바마 정부의 압력과 함께 박근혜 정부의 섣부른 위안부 합의가 나왔다. 미키 데자키는 이런 미국의 경솔한 국익우선적 행위가 역사수정주의를 야기했다고 일침을 가한다.
윤석열 정부의 첫 한해가 저무는 이즈음, 또 한명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지켜주지 못한 조국을 영원히 떠나 이제 생존하는 피해자는 겨우 아홉명이다. 강제동원 피해자도 우리 곁을 빠르게 떠나고 있다. 사과하지 않는 것은, 강함이 아닌, 약함의 징표이다. 얼마나 자신이 없고 취약하길래 사과조차 하지 못하는 것일까? 전쟁 중 범죄를 일관성 있게 사과하지 않는 일본은 경제 대국이든 아니든 결코 도덕적인 리더십을 갖춘 선진국의 반열에 오르지 못할 것이다.
이런 일본을 상대로 공식적인 사과를 받아내지 못한 우리 정부의 문제도 크다. 우리는 이제 미국의 원조에 기대어 연명하던 가난하고 힘없던 나라가 아니다. 국익 앞에선 무슨 짓이든 하는 미국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지정학적 중요성에 걸맞은 현명한 외교가 필요하다. 대다수 국민은 일본의 사과와 배상을 원하고 있다. 지난 3월 한-일 정상회담을 계기로 물밀듯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시국선언들이 이를 증명한다. 가해국에 몸을 지나치게 낮춰 국민에게 수치심을 불러일으키고, 피해자 국민을 보호하지 못하는 국가가 역사에 설 자리는 없다. 보수가 왜곡된 역사관과 그에 의존한 정치를 계속 지지한다면, 그런 보수가 설 자리도 점점 더 사라져갈 것이다. 지난 1년, 윤석열 대통령의 정치는 그가 외치는 공허한 ‘자유’와 ‘공정’의 프리즘을 통해 기득권의 화려한 포장지를 벗겨 그 거친 민낯을 드러내 보였다.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하다는 면에서 참으로 일관성 있는 현 정부의 공손한 외교는 대외적으로는 무시되고 대내적으로는 심판받을 것이다.
<주전장> 후반부에는 가세 히데아키라는 ‘일본회의’ 간부인 극우 인사가 등장한다. 그는 위안부 문제에 관한 질문에 불쾌해하며 혹시 ‘포르노’ 같은 매력을 느끼는 것인지 반문한다. 그는 또한 중국이 무너지면 한국은 일본에 의지할 수밖에 없고 그때부터 한국은 가장 친일적인 훌륭한 나라가 될 것이라 기대한다. “한국이라는 나라는 정말 귀여운 나라예요. 버릇없는 꼬마가 시끄럽게 구는 것처럼. 정말 귀엽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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