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이 묻는다…우리가 외면한 세계의 진실을… [고승희의 리와인드]

2023. 5. 8.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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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극단 연극 ‘키스’
허를 찌르는 반전의 충격
잘 만든 연극의 존재가치 증명
연극 ‘키스’ [서울시극단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사전 정보 미리 읽고 가지 마세요.”

서울시극단의 공식 SNS에선 연극 ‘키스’의 게시물을 올리며 이 한 줄의 문장을 덧붙였다. 구구한 설명들이 극의 묘미를 떨어뜨릴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칠레의 젊은 작가 기예르모 칼데론이 쓴 이 작품은 2014년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초연됐다. 창작진은 이 작품을 무대에 올릴 때, “그 어떤 힌트도 줘서는 안된다”고 당부했다.

서울시극단을 이끄는 고선웅 단장은 작품에 대해 “허를 찌르는 반전이 큰 충격을 안길 것”이라고 했다. “반전이라는 말을 써도 안되지만, 그조차 쓸 수 없다면 작품을 설명할 길이 없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사용했다”고 그는 귀띔했다.

‘반전’엔 여러 의미가 있다. ‘일의 형세가 뒤바뀐다’는 의미의 반전(反轉), ‘전쟁을 반대한다’는 의미의 반전(反戰). 국내 최대 티켓 예매 사이트 인터파크엔 ‘키스’에 대해 “반전(反轉)을 통한 반전(反戰)”의 외침이라는 한 줄 평을 내놨다.

이야기는 시리아의 수도 ‘디마스커스’에서 시작된다. 화면에 떠오른 ‘디마스커스, 2014’라는 자막이 의미심장하나, 금세 장면이 바뀐다. 시작은 평범하다. 황당무계한 ‘상황의 연속’이 관객의 도덕성을 테스트한다. 난장판에 가까운데,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이어지니 결국 웃음이 터지고 만다.

연극 ‘키스’ [서울시극단 제공]

평범한 가정집의 거실. 나사가 하나씩은 빠져버린 네 남녀가 있다. 네 사람은 커플끼리 자주 만나왔던 친구 사이다. 그런데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일까. ‘친구의 친구를 사랑했던’ 이들의 엇갈린 막장극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친구의 연인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서로를 탐하려다 현실과 욕망 사이에서 널뛰는 감정을 적나라한 대사로 쏟아낸다. ‘몰래한 사랑’을 염탐하는 관객은 내내 조마조마하다. 곧 벌어질 네 남녀의 ‘참사’가 불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전개는 빠르다. TV 막장드라마 못지 않다. 모든 일은 이 사람에게서 시작한다. 무릎까지 내려오는 가죽재킷을 휘날리며 뭔가에 단단히 홀려버린 시선을 한 유세프. 그의 연인은 배우 바나. 하지만, 친구 아메드의 여자친구인 하딜을 마음에 품었다. 유세프는 하딜에게 고백하고, 하딜은 그 마음을 받아들이려다 청혼하는 아메드의 반지를 허락한다. 뒤늦게 이 집을 찾은 바나는 “다른 사람과 키스했다”며 이 치정극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하딜은 난데없이 가슴을 부여잡고 속을 끓이다 쓰러져버리고 만다. 연극은 그렇게 끝이 난다. 곧 커튼콜이 이어지자 난감한 상황이 벌어진다. 관객들은 애꿎은 손목 시계를 들춰보며 박수를 러닝타임을 확인한다. 박수를 쳐야할지 말아야할지 눈치싸움이 계속 된다.

그 때 무대로 우종희 연출이 등장한다. 극본을 썼다는 시리아의 여성 작가와 어렵사리 연락이 닿았다며, 영상통화로 ‘작가와의 대화’를 시작한다. 우종희 연출가의 이름을 한 배우라고 해도 믿을 만큼 자연스러운 연기에 관객들은 더 헷갈린다. 연극이 끝이 난 것인지, 아니면 이조차 연극의 일부인 것인지에 대한 혼란이다.

하지만 대화가 이어지며 진실은 드러난다. 막장 치정극으로 생각했던 ‘키스’는 전쟁의 한복판으로 관객을 데려간다. 어처구니 없어 헛웃음이 나왔고, 기가 차서 키득거린 장면들의 잔상은 관객에게 해머급 펀치를 날린다. 그 때부터 연극은 다시 시작된다.

연극 ‘키스’[서울시극단 제공]

같은 이야기도 저마다의 환경과 상황에 따라 달리 읽힌다. 우리를 둘러싼 세계는 너무도 견고해 ‘나의 세상’ 너머로 시선을 돌리기란 쉽지 않다. 다시 시작된 연극은 거대한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극장의 분위기를 바꿔 놓는다. 정신 나간 네 사람의 막장극이 참담한 비극이었다는 사실을 마주하면 그제야 ‘반전’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무대는 선동도 폭로도 없이 세계의 진실을 까발린다. 내가 인지하는 세계의 허약함을, 달콤한 환상 뒤에 가려진 진실의 무게를 드러낸다. 믿고 싶은 대로 믿고, 보고 싶은 대로 본 세계 너머에서 벌어지는 참혹한 이야기는 쓰라린 죄책감으로 밀려온다. 방관과 무관심으로 쌓아올린 성곽 안의 안온함이 산산이 부서진다. 연극의 여운은 길다. 극장을 벗어나 일상으로 돌아오는 내내 마주치는 세계에서 외면한 진실을 찾게 된다. 우리는 어떻게 세상을 마주해야 할지 스스로 묻고 또 묻게 된다.

무대의 끝에선 연극이라는 예술 장르의 가치를 만나게 된다. 대체 ‘연극이란 무엇일까’. 잘 만들어진 하나의 무대는 관객의 세계를 송두리째 휘젓는다. 무대가 던지는 고차원의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 관객은 성찰을 거듭할 수밖에 없다. 고 단장은 올해 서울시극단의 주제를 “연극성 회복을 통한 인간 탐구”라고 했다. 첫 작품이었던 ‘키스’는 좋은 출발이었다. 무대는 스스로 연극의 가치와 존재 이유를 증명했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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