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원의 경제 프리즘 <12>] “어부냐, 새우냐?”…미·중 무역전쟁 속 한국의 선택
#1│지구상에서 가장 큰 동물인 고래는 그들의 육지 조상이 바다로 들어가서 진화를 거듭한 끝에 오늘날과 같이 됐다고 한다. 과학계의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네이처’ 최신 호에는 고래가 하루 먹는 양이 기존에 알려진 것보다 세 배 이상이며 크릴새우를 주식으로 하는 대왕고래의 경우 그 양이 16t에 달한다는 논문이 실렸다. 이렇듯 고래가 새우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탓인지 속담도 생긴 듯하다. 17세기 후반 문인 홍만종은 그의 책 ‘순오지(旬五志)’에 당시 속담 130여 개를 실었는데 그중 하나로 ‘경전하사(鯨戰鰕死)’가 소개돼 있다. 고래 싸움에 새우가 죽는다는 것은 두 큰 것들 싸움에 끼어 작은 것이 화를 입는다는 말이다. 오늘날 경천하사라는 말보다는 일본에서 들어온 것으로 보이는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라는 말이 더 널리 쓰인다.
#2│한(漢)나라 시절 유향(劉向)이 저술한 ‘전국책(戰國策)’은 전국시대 모사가들의 책략 모음집이다. 이 책에 그 유명한 ‘어부지리(漁父之利)’가 언급되어 있다. 전국시대 연(燕)나라에 기근이 들자, 이웃 조(趙)나라의 혜문왕은 이를 기회로 삼아 침공을 준비했다. 연나라 왕은 소대(蘇代)라는 신하를 보내 혜문왕을 설득했다.
소대는 혜문왕에게 가서. 조갯살을 쪼아 먹으려던 도요새가 조개가 입을 다무는 바람에 꼼짝하지 못하게 되자 지나가는 어부에게 둘 다 잡혔다는 일화를 말해줬다. 연나라는 조개, 조나라는 도요새, 어부는 이웃 강대국인 진(秦)나라를 가리킨다고 덧붙이니 조나라는 침공을 포기했다.
#3│2013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취임하고 나서 한 인물이 주목받았다. 탄허는 1913년 김제에서 태어나 22세에 이미 유학, 불교, 도교에 대한 공부가 깊은 상태에서 출가했다. 그는 1961년부터 10년간에 걸쳐 ‘화엄경’을 완역했다. 원고지 수만 6만2500장에 달하는 대작이다. 그런데 그는 주역에 근거해 여러 예언을 남겼고, 그 상당수는 제자들이 정리해 ‘탄허록’이라는 책으로도 나왔다. 그의 예언 중 아마도 가장 유명한 것은 “월악산 영봉(靈峰) 위로 달이 뜨고, 이 달빛이 물에 비치고 나면 30년쯤 후에 여자 임금이 나타난다”일 것이다. 1975년 그가 월악산 덕주사 주지 스님과 세상 이야기를 하다가 말했다고 한다. 1978년 충주댐 공사가 시작돼 1983년에는 아직 미완성이었지만 댐 안에 물이 차서 생긴 호수에 달이 비치게 됐다. 과연 이로부터 30년 후에 여성이 대통령이 됐다. 그런데 탄허록에는 요즘 미·중 관계를 예견하는 말도 나온다.
“주역에서 중국은 진방(震方: 정동방)이요 장남이다. ⋯중략⋯ 소녀(셋째 딸)인 미국과 장남인 중국은 후천(後天)의 원리에 의해 한동안은 관계가 지속되겠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못한다.”
실제로 1972년 국교를 회복한 미·중, 양국 관계 초기에는 매우 좋았다. 동·서 냉전이 치열했던 상황에서 미국은 소련을 견제할 카드로 중국을 활용하려 군사기술을 포함한 기술 및 자본을 아낌없이 제공했고, 중국도 1978년 덩샤오핑 집권 이후 시장경제를 택해 미국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80년대 말 소련 붕괴와 톈안먼 사태 이후 양국의 외교 관계가 서먹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양국의 경제 관계는 오히려 더욱 돈독해졌다. 미국 민간 기업들은 커진 내수 시장과 저렴한 양질의 노동력을 보고 중국 내 투자를 지속했다. 중국도 이들에게 시장을 내어주는 대가로 기술을 습득하는 정책으로 산업고도화에 나서 경제발전을 더욱 촉진했다. 이렇듯 중국을 세계 제2의 경제대국으로 키워준 미국은 그 대가로 중국이 제공하는 저렴한 제품으로 자국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을 잡을 수 있었고 1990년대 호경기에도 물가가 오르지 않는 소위 ‘신경제 효과’를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시진핑 집권 이후 중국은 덩샤오핑이 강조했던 ‘도광양회(韜光養晦)’ 즉 ‘50년간 발톱을 드러내지 말라’는 유훈을 버리고, 커진 힘을 자랑하는 ‘대국굴기(大國屈起)’를 표방하게 됐고, 양국 간의 관계는 경제 면에서도 급속히 경직되기 시작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민주당, 공화당을 막론하고 일관된 미국의 외교정책이 자신의 패권국 지위에 도전하는 2위 국가를 ‘밟는’ 것과 관련이 있다. 1980년 초반에는 소련, 후반에는 일본이 그 예다. 결국 전자는 공산 정권의 몰락과 연방 해체, 후자는 30년 이상의 깊은 침체의 늪에 빠져 버렸다. 몇 년 전 유럽연합(EU) 전체에 큰 타격을 준 ‘브렉시트(Brexit·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도 그 배후에는 미국이 있다는 의심이 제기되고 있다. 이제는 그 대상이 중국인 것이다. 결국 조 바이든 대통령의 전임자인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시절 미국은 고율 관세로 미·중 무역전쟁을 시작했다.
미국의 ‘중국 밟기’는 중국의 기술 습득 통로를 차단해 국가혁신 역량을 고사시키겠다는 것이 요체다. 바이든 행정부 들어 이것이 구체화한 수단은 ‘인플레이션 감축법(IRA)’과 ‘반도체 칩과 과학법(칩스법)’이다. 그리고 가장 핵심이 되는 대상은 전기차 및 배터리, 반도체다. 그런데 미국은 여기에서 욕심을 더 낸다. ‘중국 밟는 것’ 이외에도 차제에 관련 분야의 생산 시설 및 기술을 미국 내로 이전해 자국의 다음 세대 먹거리를 마련하겠다는 의도도 보인다. 심지어 이들 법안의 내용 중에는 관련 기업에 사실상의 기술 공개와 관련 인재 육성 의무까지 지우는 등 외국 기업들이 가진 첨단 기술의 토착화도 노리고 있다.
그런데 이 대상이 되는 외국 기업들 중 한국 기업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에 우리 기업들이 큰 피해를 볼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는 진작에 나왔다. 두 고래 싸움에 낀 새우의 형국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에 반해 전혀 겁먹을 필요가 없다는 주장도 있다. 우리 기업들의 대응이 빠른 데다, 독보적인 기술을 가진 것이 많아 이 법안들의 시행 단계에서는 되레 미국이 아쉬운 소리를 할 여지가 많다는 것이다.
실제로 최근 발표된 이들 법안의 시행령을 보면 한국의 요구가 크게 반영돼 실제 피해는 생각보다 훨씬 적을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면에서 한국은 기업들 덕택에 이미 또 하나의 고래가 될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실제로 영국 킹스칼리지 교수인 라몬 파 체코 파르도(Ramon Pacheco Pardo)는 최근 ‘새우에서 고래로’라는 책을 내며 “한국은 더는 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새우가 아니다. 싸움의 승패를 가르는 역할을 할 제3의 고래가 됐다”라고 썼다. 이는 대부분의 차세대 첨단 기술에서 한국 기업들이 길목을 지키고 있고 세계 문화의 흐름까지 좌우하는 세계 10대 경제의 위상을 확인한 것이다. 그런데 더 나아가 이를 잘 이용하면 우리가 새우, 고래가 아니라 어부의 위치에 설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현재 미국이 원하는 첨단 응용 기술은 한국이 가지고 있고, 한국이 원하는 첨단 원천 기술은 미국이 가지고 있다. 한국이 이러한 점을 지렛대 삼아 미국의 강한 첨단 원천 기술을 얻어낼 수 있다면 미국과 함께 명실공히 첨단 분야의 세계 G2(주요 2개국)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문득 탄허의 다른 예언도 생각난다. 한국은 미국의 도움으로 인류사의 열매를 맺고 세계사의 새로운 시대를 열 것이다. 하지만 이런 어부의 지위는 그냥 주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기업들에 대한 국가적인 지원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반도체만 해도 그렇다. 세계 각국은 앞다퉈 지원책을 내놓았고 한국도 얼마 전 뒤늦게 ‘반도체 지원법’이 통과됐다. 그런데 이 내용이 주요국 중 가장 약하다. 한국 정치권 특유의 ‘특혜’ 타령이 이번에도 힘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이러다가는 어부는커녕 다시 새우가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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