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광훈의 산인만필(散人漫筆) <25>] 봄날의 구름 바라보며 멀리 있는 벗을 그리워하는 마음
삼국시대 위(魏)의 혜강(嵇康)은 ‘증수재입군(贈秀才入軍)’이란 연작시에서 “내 좋은 벗 생각에, 목마른 듯 배고픈 듯. 말하려도 하지 못해, 가슴 아파 슬프구나(思我良朋, 如渴如飢. 願言不獲, 愴矣其悲)”라고 읊었다.
완적(阮籍)과 함께 죽림칠현(竹林七賢)의 대표로 꼽히는 혜강은 같은 칠현의 하나인 산도(山濤)에게 보낸 절교 선언 편지로도 유명하다. ‘문선(文選)’에 실려 있는 ‘여산거원절교서(與山巨源絕交書)’다. ‘거원’은 산도의 자(字)다. 관직에 있던 산도가 실권자 사마소(司馬昭)의 참모로 옮길 때 그 후임에 혜강을 추천했다. 이를 불쾌하게 여긴 혜강이 이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자신은 타고난 성품이 게으르고 예법에 얽매이기 싫어 더 이상 벼슬할 뜻이 없는데도 이를 존중해 주지 않아 부득이 결별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게으름을 그는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얼굴은 한 달에 보름이나 씻지 않는다. 크게 가렵지 않으면 머리는 안 감는다. 소변도 늘 참다가 도저히 견디지 못하면 할 수 없이 일어난다.” 그는 또 “사람들의 사귐에 그 천성을 알아주는 것이 중요하다(人之相知, 貴識其天性)”면서 “그래야 관계가 오래 이어지고 바른 사귐이 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가 산도의 추천을 거부한 까닭은 사실 따로 있다. 위 황실의 부마였던 그는 사마씨(司馬氏)가 실권을 잡은 뒤에 벼슬을 그만두고 칩거하던 터였다. 그런데 친한 벗이 다른 길을 가자 반감을 가진 것이다. 그 뒤 어이없는 모함을 당한 그는 사마소의 명으로 40세에 처형됐다. 죽기 전에 갓 열 살의 아들 혜소(嵇紹·253~304)에게 말했다. “거원이 있으니 너는 외롭지 않을 것이다.”
혜소는 장성한 뒤 사마씨의 새 왕조 진(晉)에서 벼슬할 생각이 없었다. 그를 산도가 설득해 관직에 추천했다. 승진을 거듭한 그는 마침내 조정대신이 됐다. ‘학립계군(鶴立鷄群)’ 또는 ‘군계일학’이란 고사성어도 젊은 시절의 그를 두고 한 말이다. 후일 황족들의 권력 다툼에서 외지로 몽진(蒙塵)한 황제를 시종하던 그는 백관들이 다 흩어진 뒤에도 의연히 황제를 지키다가 반란군에게 살해됐다. 그 피가 황제의 옷을 적셨다. 사태가 평정된 뒤 황제는 피 묻은 옷을 씻지 말라고 명했다.
이러한 혜소를 두고 흔히 충신의 표상으로 칭송하지만, 한편에서는 불효자식이라고 지탄하기도 한다. 과연 곡절 많은 혜강과 산도의 이 우정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도연명(陶淵明)의 전집(全集) 맨 앞에는 ‘정운(停雲)’이라는 4장의 사언시(四言詩)가 실려 있다. 그 첫 장은 다음과 같다.
“뭉게뭉게 멈춘 구름, 부슬부슬 때맞춘 비. 온 천지가 어두워져, 평탄한 길 험해지네. 동쪽 마루에 조용히 기대어, 봄 술잔 홀로 어루만진다. 좋은 벗 아득히 멀리 있어, 머리 긁적이며 멍하니 섰네(靄靄停雲, 濛濛時雨. 八表同昏, 平路伊阻. 靜寄東軒, 春醪獨撫. 良朋悠邈, 搔首延佇).”
제2장의 후반은 이렇게 이어진다. “술이 있어 술이 있어, 동쪽 창가에서 한가로이 마신다. 그리운 사람과 말하려도, 배와 수레가 따르지 않누나(有酒有酒, 閑飲東窗. 願言懷人, 舟車靡從).” 마지막 장은 다음과 같이 마무리된다. “훨훨 나는 새들, 내 뜰 나뭇가지에서 쉰다. 날개 접고 한가로이 앉아, 좋은 소리로 화답한다. 다른 사람 없겠나만, 그대 생각 실로 많아. 말하려도 하지 못해, 품은 한이 어떠하랴(翩翩飛鳥, 息我庭柯. 斂翮閑止, 好聲相和. 豈無他人, 念子實多. 願言不獲, 抱恨如何)?”
혜강 시의 영향이 엿보이는 이 작품은 싱그러운 신록의 계절에 전원의 초려(草廬)에서 홀로 술잔을 기울이며 벗을 그리워하는 정경을 그렸다. 벗과 만나고 싶은 마음에 서로 지저귀는 새까지 부러운 상황이다. 작품의 앞에는 짧은 서문이 있다. “‘정운’은 친구를 생각하는 시다. 술통엔 새로 담근 술이 찰랑거리고 뜰엔 새싹들이 갓 돋아났다. 친구와 말하려도 할 수 없어 한숨만 옷깃에 가득하다(‘停雲’思親友也. 罇湛新醪, 園列初榮, 願言不從, 歎息彌襟).”
남송(南宋)의 신기질(辛棄疾)은 만년에 지은 별장의 정자를 ‘정운(停雲)’이라 이름 붙였다. 어느 날 정자에 홀로 앉은 그는 “평생의 벗들이 스러져감을 슬퍼하노니 지금 몇이나 남았느뇨”라고 탄식했다. 그리고 “한잔 술로 동쪽 창가에서 머리 긁적이니, 도연명의 ‘정운’ 시가 바로 이때의 풍미이리라”고 옛 시인의 정취를 그리워했다. ‘하신랑(賀新郎)’이란 사(詞)에서다.
세상살이에 친구가 소중하다. 조식(曹植)이 벗 양수(楊修)에게 보낸 편지에 “며칠 보지 못해 그대 생각으로 애가 타니, 그대도 같으리라 생각하오(數日不見, 思子爲勞, 想同之也)”라는 말이 있다. 이 정도면 가족이나 연인에 못지않다. 그래서 중국인은 “집에서는 부모에게 기대고, 문을 나서면 친구에게 기댄다(在家靠父母, 出門靠朋友)”는 말을 자주 쓴다. 관포(管鮑), 지음(知音), 막역(莫逆), 금란(金蘭) 등 우정을 미화한 말도 그만큼 많다.
문제는 그 좋은 관계를 얼마나 잘 이어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정운’은 도연명이 40세에 쓴 시다. 62세까지 산 그가 그 뒤로도 그 벗을 계속 그리워했을까? 그 벗도 도연명을 보고 싶어 했을까? “길이 멀면 말의 힘을 알 수 있고 날이 오래면 사람의 마음이 보인다(路遙知馬力, 日久見人心)”는 말처럼 세월이 가면 여러 사정으로 사이가 틀어질 수 있다.
두보(杜甫)의 ‘빈교행(貧交行)’은 이 점에서 의미 있다. “손을 뒤집으면 구름이 되고 엎으면 비가 되니, 그 많은 경박함을 어찌 셀 수 있을까! 그대 관중과 포숙의 가난할 때 사귐을 보지 못했나? 이 도를 지금 사람들은 흙처럼 버린다네(翻手作雲覆手雨, 紛紛輕薄何須數! 君不見管鮑貧時交? 此道今人棄如土).”
장이(張耳)와 진여(陳餘)는 전국시대 말의 위(魏)에서 ‘문경지교(刎頸之交)’가 됐다. 염파(廉頗)와 인상여(藺相如)처럼 죽음도 함께 할 깊은 의리로 맺어졌다는 말이다. 그러나 뒷날 둘 사이가 벌어졌다. 제후들의 합종연횡 과정에서 질시와 반목 끝에 진여는 조(趙)에 남고 장이는 유방(劉邦) 편에 붙었다. 유방이 항우(項羽)를 치기 위해 연합을 제안하자 진여는 “장이를 죽이면 따른다”고 답했다. 유방이 장이와 닮은 사람을 찾아 목을 베어 진여에게 보냈다. 진여는 대군을 파견해 유방을 도왔으나 장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고 바로 등을 돌렸다. 이듬해에 장이는 한신(韓信)과 함께 조를 쳐서 진여를 참수했다. 사마천(司馬遷)은 ‘장이진여열전’의 말미에서 이렇게 평했다. “전에는 서로 흠모하고 신용하던 성실한 사이였는데 어찌하여 나중에 서로 배반함이 그토록 혹독해졌나! 바로 권세와 이득으로 사귀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何郷者相慕用之誠, 後相倍之戾也! 豈非以勢利交哉)!”
1955년에 나온 정한숙(鄭漢淑)의 단편 ‘전황당인보기(田黃堂印譜記)’도 우정을 반추(反芻)해 볼 좋은 자료다. 아호가 수하인(水河人)인 전각가 강명진(姜明振)은 오랜 벗이 높은 공직에 나아갔다는 소식을 듣자, 축하를 위해 이리저리 궁리한다. 그러다가 자그마한 전황석(田黃石) 하나를 싼값에 입수, 정성스레 도장을 새기고 예쁘게 포장해 친구의 집을 방문한다. 친구가 늦게 귀가한다고 하여 그 아내에게 도장을 전해주고 돌아왔다. 청탁을 위해 금붙이 같은 귀한 선물을 가져왔을 것이라 짐작한 친구의 아내는 포장을 풀어보고 실망한다.
남편이 돌아오자 볼품없는 물건을 가져온 친구를 흉본다. 그 말에 동감한 남편도 지인에게 도장을 건네며 돈을 더 주고 직인으로 쓸 큰 도장으로 바꿔오라고 한다. 도장을 받은 도장집 주인은 수하인의 제자여서 바로 스승의 작품임을 알았다. 결국 도장이 다시 수하인의 손으로 돌아왔다. 그는 버릴 수 없는 친구에게 버림을 받은 듯싶어 한없이 섭섭했다.
전황석이 금보다 열 배 이상 비싸다는 사실을 친구 부부가 알았다면 이 이야기는 성립되지 않는다. 한쪽은 과거와 다름없이 ‘흠모하고 신용하던 성실한 마음’으로 대했으나 한쪽이 ‘세리(勢利)’의 눈으로 친구를 본 것이다.
여느 인간관계와 마찬가지로 친구 사이 또한 서로 이해하고 존중해야 오래 지속될 수 있음은 물론이다. “벗이란 그 덕을 벗하는 것(友也者, 友其德也)”이라는 ‘맹자’의 말은 오늘날에도 새겨들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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