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과 담 쌓은 청와대…“역대 정부와 달라도 너무 달랐다”
[길을 찾아서] 참여정부 천일야화 13화 파격의 나날
장안 화제 된 ‘검사와의 대화’
청와대 앞 도로 시민에 개방…
회의 없이 노 대통령이 결정
유인태 “참여정부는 후천개벽”
언론과 술자리 문화는 물론
취임 뒤 언론사 예방도 폐지
‘정부와 언론의 긴장관계’
유행어 되고 건배사 활용도
그 어느 때보다도 많았던
대구 출신 장관들과 저녁자리
대구상의회장 황금열쇠 선물
장관들과 얘기해 일괄 돌려줘
파격 대통령 하면 노태우 대통령이 먼저 떠오른다. 대통령은 의레 입에 힘주고 권위를 내세우던 모습이 익숙했는데 ‘보통 사람의 시대’라는 구호 아래 와이셔츠 차림으로 회의를 하는가 하면 가방을 직접 들고 다녀 신선한 느낌을 받았다. 일종의 쇼이겠지만 쇼치고는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그 뒤 조갑제와 인터뷰에서 원래 군에 있을 때부터 그랬다고 하니 놀랍다(<노태우 육성 회고록> 조갑제닷컴, 2007).
파격이라면 참여정부가 어느 정부에도 뒤지지 않는다. 유인태 정무수석 말마따나 참여정부는 ‘후천개벽’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파격의 선봉장이었다. 2003년 3월9일(일) ‘검사와의 대화’만 해도 그렇다. 과거 같으면 평검사들이 대통령 만날 일은 아예 없었을 텐데 언감생심 토론이라니. 대통령이 검사들과 토론을 벌인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라 문희상 비서실장에게 누구 발상인지 물었다. 대통령 생각이라는 것이다. 만약 수석회의에 안건으로 올라왔으면 나는 반대했을 것이다. 문 실장도 같은 생각이었다. 비서실장이 대통령을 말렸는데 안 되더라는 것이다.
“이쯤 되면 막가자는 거지요”라는 대통령의 말은 사람들 기억에 남았지만, 과연 토론이 득이 됐는지 의문이다. 이튿날 수석회의에서 이해성 홍보수석이 보고하기를 ‘검사와의 대화’ 시청률은 33.6%를 기록했고, 대통령이 완승을 거뒀으나 위엄이 손상됐고 앞으로 여기저기서 대통령 토론을 요청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걱정했다. 노 대통령은 “검찰은 특수조직이고 현재 심각한 국면이어서 예외적으로 토론한 것”이라고 답했다. 대통령의 검찰 불신 발언에 김각영 검찰총장은 토론회 직후 항의성 사표를 냈다. 문재인 민정수석은 나중에 쓴 회고록 <운명>(2011)에서 이날 토론에 나온 검사들의 오만방자한 태도를 비판하며 목불인견(차마 눈뜨고 볼 수 없다)이라고 썼다.
시민 통행이 제한돼 있던 청와대 앞길 개방도 파격이었다. 이 또한 수석회의 토론을 거쳐 나온 게 아니라 노 대통령의 결정이었다. 뭐든지 안보, 안보 하던 시절 시민 통행 제한은 당연한 듯 보였다. 그래서 오랫동안 청와대는 왕조시대 궁궐보다 더 깊은 구중궁궐이었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 초 청와대 앞길을 개방해 시민들의 자유로운 통행을 허용하라고 지시했다. 그렇다고 대통령 안위가 문제될 일이 뭐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지금은 별거 아니게 여기겠지만 당시 청와대 앞길 개방은 파격이었다. 2003년 4월에는 대통령 별장인 청남대를 국민에게 돌려주기도 했다.
제10화에서 자민련을 찾아가 김종필(JP) 대표를 만났던 이야기를 썼다. 김종필 대표는 차 한잔하면서 독특한 그 쉰 목소리로 “술 잘합니까? 앞으로 가끔 술도 한잔하고 그럽시다”라고 제의했다. 그러나 그 뒤 JP와의 술자리는 없었다. 술 한잔 했으면 깊이 감춰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을까.
참여정부 청와대의 특징은 술을 멀리한 것이었다. 내 차를 모는 기사는 청와대에만 16년을 근무한 베테랑이었는데, 역대 정부와 참여정부는 일하는 방식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고 말했다. 전 정부에서는 청와대 수석들의 심야 술자리 참석이 1주에 두서너차례 있었다고 한다. 술자리 상대는 주로 언론 쪽이었고 귀가시간은 대개 자정 전후였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국민의정부 시절 정책기획위원 50명이 청와대에 가서 김대중 대통령과 점심을 먹던 날이 생각난다. 내 옆자리에 앉은 박지원 비서실장은 전날 밤늦게까지 모 신문사 사람들과 마신 술이 덜 깨 정신이 몽롱하다고 하소연했다.
그래서 ‘밤의 대통령’도 존재하고, ‘역사는 밤에 이뤄진다’는 말이 나온 것일까. 그와 달리 참여정부 청와대는 술과 담쌓은 정부였다. 청와대 회식에서도 포도주 한잔이 고작, 술 권하고 따르고 이런 게 아예 없었다. 술 마실 일이 없으니 나처럼 태생적으로 술이 약한 사람도 생존이 가능했다. 과거 정부 같으면 나 같은 비주류는 며칠도 못 버텼을 것이다. 이 점에서 노 대통령에게 감사한다.
파격과 반골이라면 나도 별로 빠질 생각이 없다. 새로 부임한 청와대 참모들은 언론사들을 예방하는 것이 오랜 관례였다. 예전에는 ‘아무개 수석 본사 예방’, 이런 짤막한 기사가 신문 2면에 자주 나곤 했다. 참여정부 초기 수석회의에 언론사 예방이 안건으로 올라왔다. “다른 나라는 이런 거 안 할 겁니다. 하지 맙시다” 하며 내가 반대하니 여러 수석이 동조해 관례를 깨고 언론사를 찾지 않았다. 언론사들이 괘씸하게 여겼을 것이다. 그 바람에 언론의 참여정부 공격이 더 심해졌을지도 모르겠다. 참여정부는 5년 내내 언론 공격에 시달렸고 하루도 잠잠한 날이 없었는데 내 책임도 있을 것 같다. 노무현 대통령이 강조한 정부와 언론의 긴장관계, 이것이 당시 유행어가 됐다. 촌철살인의 대가 유인태 정무수석은 청와대 기자들과의 친목모임에서 ‘긴장’이라고 건배사를 해 좌중의 폭소를 끌어냈다.
3월25일(화) 저녁 조해녕 대구시장, 이의근 경북도지사, 김달웅 경북대 총장, 임대윤 대구 동구청장과 나중에 시민사회수석이 된 이강철, 그리고 정부 쪽에서 윤덕홍, 이정재, 권기홍, 이창동 장관과 내가 참석해 회식을 했다. 과거 티케이(TK) 정권이 오래갔지만 대구 출신 장관 숫자에 관한 한 2003년이 역대 최다이지 싶다. 오랜만에 고향 사람들이 모여 분위기가 아주 좋았다. 대구지하철 참사, 유니버시아드대회 유치, 문화수도 등이 화제에 올랐다. 이의근 지사는 경주, 안동이 있는 경북이 당연히 문화수도가 돼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창동 장관이 수긍했다. 광주가 문화중심도시로 지정된다고 하던 때였다. 모임이 파할 때 대구상의회장이 장관들에게 선물을 하나씩 주기에 받아서 집에 와 열어 보니 제법 큰 황금열쇠가 들어 있었다. 당시는 김영란법이 없었지만 선물치고는 과했다. 내가 이튿날 장관들에게 전화해 만장일치 의견으로 일괄 돌려줬다. 이런 것도 오랜 관행인지 모르겠으나 타파해야 할 관행이다. 인정과 부패는 경계가 모호하고, 이 경계선에서 발을 헛디뎌 망하는 사람이 많다.
4월9일(수) 아침 7시30분 코엑스 컨벤션홀 3층에서 열리는 제35회 국가조찬기도회에 참석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나는 신자가 아니지만 관례라고 해서 참석했다. 주최 쪽 안내를 받아 헤드테이블에 앉았다. 옆 테이블의 황우여, 박진 등 국회의원들과 악수했다. 조금 뒤 정대철 민주당 대표가 와서 내 옆에 앉았다. 악수하긴 하는데 내가 누군지 모르는 것 같았다(석달 전 인수위 때 넷이서 장시간 저녁식사를 했는데). 조금 뒤 박희태 의원이 나타나 앉을 곳을 찾아 헤매니 정 대표가 박희태 의원을 불렀다. 나를 보고 “자네 저기 가서 좀 앉지” 하는 게 아닌가. 이런! 나를 후배 국회의원쯤으로 여겼나 보다.
행사 개시 직전이고 3천명 참석자가 헤드테이블로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내가 누구라고 설명하기도 그렇고 해서 옆 테이블에 가서 앉으려는데 빈자리 두개는 김영진 농림부 장관과 미국대사 몫이라 했다. 순간적인 판단에 그냥 나가는 게 맞겠다 싶어 밖으로 걸음을 옮기니 정대철 대표와 박희태 의원이 미안해하며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동작을 취했다. 괜찮으니 그대로 앉아 계시라고 손짓하고 퇴장했다. 모양새가 이상하게 됐지만 팔자에 없는 설교 안 듣고 시간 절약하니 전화위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사무실에 출근해 경위를 설명하고, 나는 무교이므로 앞으로 종교행사에는 이름을 넣지 말라고 했다. 그 뒤 종교행사에는 일절 가지 않았다. 그것도 관행 타파라면 타파였다. 그날 오후 정대철 대표한테서 사과 전화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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