챗GPT에 밀린 메타버스? 게임 속에서는 환상의 커플
올 상반기 가장 주목받은 기술 테마는 단연 '인공지능(AI)'이다. 연초부터 챗GPT가 돌풍을 일으키면서 이용자의 특정한 요구에 따라 결과를 생성해내는 '생성형 AI'가 산업의 판도를 뒤흔드는 '게임체인저'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대세가 됐다. 이와 함께 지난해 테크 분야에서 가장 뜨거운 화두였던 메타버스·웹3.0·블록체인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줄어든 모양새다. 빅테크를 중심으로 관련 사업을 대폭 축소하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과연 메타버스·블록체인 기술은 거품이고 이대로 사라질 것인가. 이와 관련해 테크 업계에는 여전히 '거품은 꺼질지언정 기술은 남는다'고 믿는 이들이 존재한다. 탈중앙화를 기치로 내세운 미래의 웹(웹3.0)이 AI 기술 발전으로 더 빨리 실현될 수 있다는 것. 특히 '킬러 서비스'가 없다는 지적을 받아온 메타버스, 블록체인 기술이 AI와 만나 제대로 꽃필 수 있다는 낙관론도 있다.
게임 업계는 메타버스와 생성형 AI의 접목에 큰 관심을 두고 있다. 주요 게임회사들은 AI 관련 연구개발(R&D)을 오래전부터 준비해왔고, 이용자가 직접 느끼는 것보다 더 빠르게 AI를 도입하고 있다. 이들은 이미 AI를 활용한 가상인간을 만들어냈고, 콘텐츠 제작 기술을 외부에 시연하는 단계에까지 기술력을 끌어올린 상태다. 이를 바탕으로 차원이 다른 이용자 몰입감을 선사하는 게임이 다수 제작될 것으로 예상된다. AI를 기반으로 한 디지털 휴먼은 상호작용이 가능하기 때문에 수천, 수만 번의 시나리오에서 다른 반응을 내놓을 수 있다. 가상현실(VR)과 AI가 결합한 게임의 결과물이 상상을 뛰어넘는 수준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실제로 게임은 메타버스 그 자체로 불리기도 한다. 이에 대해 매일경제와 만난 힐마 패터슨 CCP게임스 최고경영자(CEO)는 "게임에서 e스포츠가 발생한 것처럼 메타버스도 게임에서 나올 것"이라며 "게임 관련 소셜네트워크에서 소셜네트워크, 디지털 경제, 정서적 리얼리티가 하나로 합쳐질 때 발생하는 어떤 것이 메타버스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 시점에 메타버스라는 용어는 더 이상 필요가 없게 된다"고 강조했다. 2004년부터 CCP게임스의 수장을 맡고 있는 패터슨 CEO는 유럽 게임 업계에서 거물로 통하는 인물이다.
아이슬란드 게임개발사인 CCP게임스는 전 세계 4000만명 이상의 이용자를 확보하고 있는 글로벌 히트 게임 '이브온라인'을 개발한 회사다. '현존하는 가장 큰 공상과학 작품'으로 불리는 이 게임은 19년 동안 계속해서 이용자가 늘고 있는 희귀한 작품이다. 특히 거대한 게임 속 세계관에서 일찍부터 디지털 경제, 민주적인 커뮤니티 정부, 무료 기계장치 등 탈중앙화 개념을 도입해 웹3.0의 선구자적 게임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패터슨 CEO는 웹3.0의 실현 가능성과 관련해 "웹1과 웹2가 다양한 트렌드에 맞게 개조된 것처럼, 웹3 같은 포괄적인 용어도 결국 그 의미 중 일부에 맞게 개조될 수 있다"면서 "플레이어의 참여가 더 중요해지고 플레이어가 결국 크리에이터가 되는 추세가 포트나이트 크리에이티브 프로그램, 로블록스, 마인크래프트 등에서 실제로 확인된다"고 말했다. 그는 "AI는 거품이 일다가 사라졌지만 얼마 후 챗GPT가 등장했고 사람들이 열광했듯 웹3.0 역시 킬러 앱에 의해 주도될 것"이라면서 "다만 많은 사람이 포지션을 두고 경쟁하고 있으며 아직 그게 뭔지 결정을 내리기엔 이르다"고 진단했다.
최근 게임(메타버스)과 AI의 접목이 새로운 트렌드로 떠오르는 추세다. 로블록스, 포트나이트 등은 글로벌 메타버스 게임(플랫폼)의 대표 격이다. 팬데믹을 거치면서 이들은 2억~3억명의 가입자를 확보했다.
로블록스는 올해 세계 최대 게임 개발자 축제인 'GDC 2023'에서 '코드 어시스트'와 '머티리얼 제너레이터'라는 이름의 생성형 AI 기반 게임 제작 도구를 공개했다. 코드 어시스트는 챗GPT처럼 원하는 문장을 입력하면 코드를 자동 생성해주는 AI이고, 머티리얼 제너레이터는 게임 아이템이나 배경 질감을 보다 사실적으로 만드는 데 AI가 활용된 개발 도구다. 실제로 이용자가 게임 속 승용차 3D 모델을 불러온 뒤 입력 창에 '빨간색 페인트, 유광 도색'이라고 입력하면 차량 외관이 입력한 대로 바뀌고, 코드 창에 'H 키를 누르면 헤드라이트를 켬'이라고 영어로 입력하자 AI가 이에 걸맞은 코드를 알아서 작성한다. AI를 활용해 누구나 메타버스 세계관 속에서 게임을 만들 수 있는 길을 제시한 셈이다.
글로벌 게임 엔진 기업 유니티는 생성형 AI를 이용해 게임 개발을 신속하게 하는 제품을 내놓았다. 캐릭터 개발 속도를 높이기 위해 표정과 몸짓을 자동화하는 AI 기반 프로그램을 상용화한 것이다. 유니티는 "인간과 같은 디지털 휴먼의 표정을 만드는 데 그동안 아티스트 6명이 4∼5개월 작업해야 했다면 AI로는 몇 분 만에 가능하다"고 밝혔다.
패터슨 CEO는 게임과 가상세계의 발전이 환경오염 저감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흥미로운 의견도 제시했다. 그는 "현재 지구를 파괴하고 있는 모든 경제 활동의 80%는 우리의 감정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라면서 "가령 패션 산업은 인류의 탄소발자국의 약 8%로 추정되는데, 이만큼의 탄소가 우리의 육신, 아바타를 꾸미는 목적으로 소비되는 셈"이라고 말했다. 그는 "에베레스트 등반을 예로 들면 사람들이 자신의 감정적인 만족을 위해 등반에 참여하고 있고 지구를 파괴하고 있다"면서 "이브온라인과 같은 게임은 에베레스트산을 오르는 것과 비슷한 흥분감을 줄 수 있다"고 강조했다.
블록체인 분야에 대한 게임업계의 글로벌 투자는 서서히 반등할 조짐을 보인다. 블록체인 서비스 시장조사업체인 댑레이더가 최근 공개한 '댑레이더-블록체인 게임 얼라이언스(BGA) 게임 리포트'에 따르면 블록체인 게임 산업 투자액은 지난해 4분기 6억5400만달러(약 8757억원)에서 올해 1분기 7억3900만달러(약 9895억원)로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댑레이더는 "3월 한 달간 투자액이 1분기 전체의 66%인 4억3400만달러(약 5820억원)에 달한다"며 "펄어비스의 자회사인 CCP게임스의 투자 유치도 포함돼 있다"고 소개했다.
지난달 CCP게임스는 실리콘밸리 벤처캐피털인 앤드리슨 호로위츠(a16z)가 주도한 클럽딜 투자를 통해 4000만달러를 유치했다. 이번 투자에는 넥슨이 동참해 이목을 끌었다. 게임업계 관계자는 "CCP게임스가 블록체인 기술을 기반으로 개발 중인 초대작(AAA)급 신작에 (넥슨이) 투자사로 참여한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황순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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