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뇌전증·조현병…질병명 속 완곡어법
국내 엠폭스(MPOX) 확진자가 3일 현재 누적 50명을 돌파하자 방역당국이 경계심을 바짝 끌어올리고 있다. 엠폭스의 예전 이름은 ‘원숭이두창’이다. ‘두창’은 요즘 잘 쓰지 않는 말이지만, 한 세기 전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제일 무서운 질병이었다. 1920년 조선일보는 7월 14일 자에서 6월 한 달간 경기도의 전염병 발생 현황을 자세히 전했다.
부정적 인식 바로잡기 위한 노력
“장질부사 발생이 165인 내에 사망한 자 25인이요, … 창홍열 발생이 35인 내에 사망한 자 9명이요, 지부데리아 발생이 58인 내에 사망한 자 10명이요, 발진지부스 발생이 27인 내에 사망한 자 8명이요, 두창 발생이 2047인 내에 사망한 자 539명이요, 천연두 환자 제일 다수하다더라.”
100년 전 질병 이름으로 쓰던 우리말 모습이 낯선 듯하지만, 전혀 생소하진 않다. 당시 ‘두창’이 압도적 발병률과 사망률(25%가 넘는다)로 치명적 전염병이었다는 점도 눈에 띈다. 두창을 ‘천연두’라고 했다는 것도 덤으로 알 수 있다.
‘장질부사(腸窒扶斯)’는 ‘장티푸스(腸typhus)’를 가리키던 말이다. 지금은 외래어를 현지 발음에 맞춰 한글로 적으면 되지만 과거엔 한자음을 빌려 쓰던 시절이 있었다. 이른바 ‘음역어’다. 이 병이 얼마나 무서웠던지 나중에 ‘염병’의 대명사가 될 정도였다. 염병(染病)은 두 가지로 쓰인다. 하나는 글자 그대로 전염병을 뜻하고, 다른 하나는 장티푸스를 가리킨다.
‘창홍열(猖紅熱)’은 국어사전에 없는 말인데, 당시 신문에선 ‘성홍열(猩紅熱)’과 뒤섞어 썼다. 성홍열은 발진이 생긴 피부의 붉은색이 원숭이의 일종인 오랑우탄(성성이)의 색과 비슷하다고 해서 이름 붙었다. 지부데리아는 디프테리아(diphtheria), 발진지부스는 발진티푸스(發疹typhus)를 옮긴 말이란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치매=어리석다’는 뜻…대체어 필요
‘두창(痘瘡)’은 발진을 일으키는 전염병이다. 痘가 ‘마마 두’, 瘡은 ‘부스럼 창’ 자다. 이때 ‘마마’가 ‘천연두(天然痘)’를 뜻한다. 당시에도 두창과 천연두를 같은 말로 썼다는 게 보도에서도 확인된다. 이 ‘마마()’는 우리말에서 독특한 위치에 있는 단어다. 하나의 말로 서로 다른, 극단적 대상을 나타낸다는 점에서다. 상감마마, 중전마마 할 때도 쓰이고, 걸리면 치명적 죽음에 이르는 질병을 가리키는 데도 쓰인다. 원래 마마는 임금과 그의 가족에 붙여 극존칭의 뜻을 담는 말이었다. 그런데 두창에 걸리면 살아날 길이 없으니 극존칭을 표해서라도 어서 물러나기만을 바라는 마음에 마마라고 부르게 됐다는 게 정설이다. 일종의 반어법인 셈인데, 넓게 보면 이 역시 완곡어법을 활용한 말 다듬기에 해당한다.
우리말 중엔 특히 질병 이름에 완곡어 수법을 활용한 게 많다. ‘뇌전증’과 ‘조현병’이 그런 과정을 거쳐 생겨난 대표적 사례다. 뇌전증은 예전에 ‘간질’이라 하던 것을 바꿨다. 속된 말 중에 ‘지랄염병’이란 게 있다. 순우리말인 ‘지랄’이 간질(癎疾)을, 염병(染病)은 장티푸스를 가리킨다. 우리나라는 간질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바로잡기 위해 2014년부터 질병명을 ‘뇌전증’으로 바꿨다. ‘조현병’도 같은 이유로 2011년 정신분열병을 대체한 용어다.
뇌전증의 전 용어에는 간질 외에도 ‘전간(癲)’이 비교적 널리 알려졌다. 이 말의 일본식 발음이 ‘덴칸(てんかん)’이다. 한국에서 “땡깡(생떼를 속되게 이르는 말) 부린다”고 할 때의 땡깡 또는 뗑깡은 바로 이 ‘덴칸’이 된소리로 바뀌어 굳은 말이다. 온전한 우리말이 아니므로 쓰지 않는 게 좋다.
급속한 고령화로 우리나라 치매 환자가 급증한다는 소식이다. ‘치매’는 ‘어리석을 치(癡), 어리석을 매()’ 자다. 아픈 것도 서러운데, 환자한테 어리석다고 하니 적절치 않다는 지적이 오래전부터 있었다. 일본에선 이미 20여 년 전부터 인지증으로 바꿔 쓰고 있다. 우리나라도 지난 1월부터 보건복지부를 중심으로 용어를 바꾸려는 움직임이 빨라졌다. 관련 학회와 함께 ‘인지저하증’ 등 대체어를 놓고 고민 중이라 하니 곧 결과가 나올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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