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 펴보지 못한 외국어 교재…그는 왜 지게차에 올랐나 [취재후]
지난해 한 대기업의 물류회사에 신입사원으로 입사한 30살 A 씨.
오랜 준비를 통해 정규직 사원으로 어렵게 입사한 곳이었지만, 출근 6개월 만에 난 사고로 A 씨는 집으로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처지가 됐습니다.
취업 이후 꼬박꼬박 모은 돈으로 친구들과의 첫 해외여행을 앞두고 있던 때였습니다.
즐거운 해외 여행을 꿈꾸며 구입했을 외국어 교재는, A 씨가 세상을 떠난 후에야 집으로 배송됐습니다.
A 씨가 일한 곳은 경기도 이천에 있는 대기업 물류센터.
사무관리직으로 입사한 만큼 현장의 물류와 재고 상황 등을 전반적으로 체크하고 조정하는 게 A 씨의 업무였습니다.
■ '하청업체 직원'에서 '본사 정규직'으로…
A 씨는 사실 정규직 입사 전에도 해당 물류센터에서 일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대신 당시는 본사의 사무직 신분이 아니라, 하청업체 소속으로 사무업무와 더불어 지게차를 운전하는 일을 했습니다.
지게차 면허를 땄던 것도 그때였습니다.
하청업체 직원 신분으로 본사 지시를 받아가며 1년 간 성실하게 일을 해오다, 주변의 권유로 1년여 간 준비를 한 끝에 본사의 정규직 시험에 합격한 겁니다.
■ 지게차로 경사로 내려오다 발생한 사고…연석 들이받아
A 씨가 사고를 당한 건 지난 3월 27일, 오후 1시 30분쯤이었습니다.
점심시간이 끝난 A 씨는 반품 물품을 입식 지게차(서서 운전하는 지게차)로 옮겨 창고에 가져다 놓은 뒤 경사로로 돌아오는 중이었습니다.
내리막길을 내려오던 도중 지게차가 균형을 잃고 도로 경계석(연석)을 들이받으며 넘어졌고, A 씨는 전도된 지게차에 깔려 숨졌습니다.
회사에서 관련 지게차 안전교육도 받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연관기사] “사무직인 줄 알았는데…” 지게차 몰다 숨진 대기업 직원 (KBS 뉴스9, 2023. 5. 4)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7668149
■ 현장에는 뒤늦게서야 '경고 문구'들이 설치됐다
본래 입식 지게차는 바퀴가 작아서 전도 위험이 큰 문제 등으로 경사로 이용이 금지돼 있습니다.
바닥이 평평한 건물 내부 등에서만 사용돼야 합니다.
실제로 KBS 취재진이 방문했던 사고 지점은, 제법 가파른 경사를 갖고 있어 비전문가가 언뜻 보기에도 위험해 보였습니다.
현장 바닥에 지게차 보행금지를 알리는 문구 등이 설치돼 있었지만, 모두 A 씨가 숨진 뒤에야 설치됐다고 동료들은 말했습니다.
(※왼쪽 사진은 사고 후 4일 뒤 / 오른쪽 사진은 최근 모습입니다. 사고 당시엔 지게차가 다니면 안 된다는 경고 문구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사고 이후에야 도로에 안전방지턱과 '입식지게차 운행금지' 등 문구가 생겼습니다)
고용노동부에서 중대재해처벌법 및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등에 대한 조사를 이어가면서 회사 측에 조치를 요구해, 모두 사고 이후에야 설치된 겁니다.
■ '사무직'이었던 A 씨는 왜 지게차를 직접 운전해야 했나
하지만 A 씨가 입식 지게차를 타고 경사로를 오르내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사고 이전에도 수 차례 지게차를 타고 경사로를 오가는 장면이 내부 CCTV 등에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사전에 재해를 예방할 수 있는 몇 차례의 기회가 있었던 셈입니다.
하지만 '지게차 운행 금지' 문구가 사고 이후에야 설치됐듯, 지게차 사고예방 안전조치들은 사고 이후에야 이뤄졌습니다.
■ '안전교육 사각지대' ... 회사 측은 책임 회피
사고 이후, 직접 회사를 방문한 유족은 회사에 사고 경위를 거듭 물었지만, 속 시원한 답변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사측은 "A 씨에게 지게차 업무를 시킨 적이 없고, A 씨가 지게차를 운전하는 지도 몰랐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본사 사무관리직으로 채용됐던 A 씨가 왜 직접 지게차를 운전해야 했는지가, 이번 사고의 책임을 가리는 핵심 쟁점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안전교육이 있었냐'는 유족 질문에 대한 사측의 대답 역시 유족을 답답하게 했습니다.
"사무직 업무에 (지게차 업무가) 속하지 않아 안전교육이 없었다"는 겁니다.
회사는 지게차를 운행하며 물건을 싣고 내리는 하역작업은 하청업체에서 전담해 맡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A 씨는 본사 소속이고, 지게차 업무 담당도 아니라 교육이 필요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만약 A 씨가 본인의 업무도 아닌데 지게차를 몰았다면, 사측에서는 해당 업무가 아닌 만큼 막아야 하는 게 원칙일 겁니다.
하지만 사측은 "A 씨가 그 일을 하는 줄 몰랐다"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 '지게차를 타고 나간다' 그러면 업무가 아니라 그러면 말려야 되는 거 아니냐"고 (회사 측에) 그랬더니 대답을 못 합니다."
-피해자 아버지 인터뷰 중-
A 씨의 동료는 "물류회사에서 관행적으로 사무직도 지게차를 몰아야 하는 구조와 상황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를 들은 유족이 거듭 회사에 입장을 물었지만, 회사는 묵묵부답으로 답했습니다.
■ 지게차 탑승 "관리·감독할 시스템 없어"
A 씨가 지게차 운행을 했을 때, 이를 말리거나, 관리·감독할 시스템이 없었다고 회사는 말합니다.
지게차가 여러대 움직이니 시동이 항상 켜져 있는 상황이고, 누구든 운전하려면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사업장 내에선 누군가 지게차를 탔을 때 현장에서 바로 피드백을 줄 수 있는 (시스템이) 짜여져있는 사업장이 아니다 "
"사망자가 탑승하는 걸 누가 일일이 관리·감독할 시스템은 없다"
-회사 측-
회사 측은 실제 유가족과의 대화에서 관리·감독이 소홀했던 부분은 일부 인정하기도 했습니다.
"저희(회사)가 관리를 하고 더 관심 있게 보고 했으면은 이런 사고가 안 났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피해자 유족과 회사 측 대화 중-
■ 경찰과 고용노동부는 수사 중
경찰은 해당 업체 및 관련자를 업무상과실치사 혐의로 입건 전 조사 중입니다.
고용노동부는 중대재해처벌법에 적용되는 기업으로 보고 중대재해처벌법 위반,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을 했는지를 수사 중입니다.
회사 측의 지시 및 방조가 있었는지도 함께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솔직하게 얘기하고 미안하다, 잘못됐다, 하고 다시 그런 재발이 안 되도록..."
-피해자 아버지 인터뷰 중-
유족은 회사 측이 관리·감독 시스템의 미비점을 진심으로 사과하고,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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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민 기자 (toyou@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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