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삶의 참 빛이여!”…베토벤 교향곡 ‘합창’ 우리말로 듣기까지
“자유, 삶의 참 빛이여! 하늘 고운님이여!” 7일 오후 5시,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우리말로 부른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이 울려 퍼졌다. 제목부터 ‘환희(기쁨)의 송가’가 아니라 ‘자유의 송가’였다. ‘환희’나 ‘기쁨’으로 번역해온 가사도 모두 ‘자유’로 바꿔 불렀다. 국내에서 우리말로 부른 ‘합창’ 교향곡 공연은 이번이 처음이다.
공연은 시작 전부터 곡절을 겪었다. 예술의전당 쪽이 제목을 문제 삼아 팸플릿 배포를 중단시킨 것. 우리말 번역 가사와 상세한 배경 등을 담은 54쪽 자리 무료 책자였다. 원래 포스터와 달리 ‘자유의 송가’로 표기돼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원래 포스터도 독일어로 ‘Ode an die Freiheit’로 돼 있으니 똑같이 ‘자유의 송가’란 뜻이다. 공연을 기획한 구자범 지휘자는 “겉표지를 뜯어 속 내용물이라도 청중에게 배포하겠다는 뜻을 예술의전당 쪽에 전했으나 이조차 불허됐다”며 “청중에게 우리말 번역 의미 등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해 매우 아쉽다”고 말했다. 이 공연에 참여한 참필하모닉오케스트라 임형섭 지휘자는 “예술의전당 관계자가 대구에서 이 곡의 종교 편향성이 논란이 됐다는 점 등을 거론하며 팸플릿 내부 내용도 검열해야 한다며 배포를 막았다”며 “예술의전당이 합창 교향곡 가사를 검열하겠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답답해했다. 결국 팸플릿 1000권을 담은 10개 박스는 개봉조차 하지 못했다. 예술의전당 쪽은 “검열이 아니라 제목이 바뀐 것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시간이 좀 걸렸다”며 “공연 도중에 배포를 허용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대다수 청중은 팸플릿을 받지 못한 채 귀가했다.
공연이 시작되자 맨 먼저 합창단이 입장했는데 240명에 이르는 대규모였다. 근래 공연된 베토벤 ‘합창’의 합창단은 대체로 100명 안팎이었다. 오케스트라 단원도 91명(4관 편성)에 이르렀다. 솔리스트 성악가 4명과 지휘자를 포함해 336명이 참여했으니 관현악으로선 엄청난 ‘물량’을 쏟아부은 공연이었다. 청중석도 빈 자리 없이 3층석까지 꽉 들어찼다.
1~3악장은 팀파니를 두드러지게 하는 등 나름의 차별성 있는 연주였지만 평소 듣던 ‘합창’과 아주 큰 차이는 없었다. 악장마다 박수가 터지자 지휘자 구자범은 긴 휴지기를 두며 달뜬 기운을 가라앉히려 했다. 하지만 성악과 합창이 나오는 4악장에 들어서자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베토벤이 독일 시인 실러의 시를 재구성해 가사를 붙인 악장이다. 초대형 합창단이 부르는 합창은 ‘볼륨’부터 압도적이었다. 합창단과 성악가들이 부르는 우리말 가사와 자막이 일치하면서 의미가 귀에 쏙 들어왔다. 기존 공연에서도 한글 자막이 나왔지만 전체적인 의미와 맥락을 파악하는 게 쉽지 않았다. 이번 공연에선 자막에 (시인), (인간), (자유) 등으로 바뀌는, 말하는 주체를 명시했다. ‘베토벤이 꿈꾸는 세상’과 ‘다른 세계’, ‘현 세계’ 등 가사의 단락을 구분해 청중이 가사의 흐름을 알 수 있게 했다. 철학을 전공하고 독일에서 공부한 지휘자 구자범이 운율과 리듬을 맞춰 번역했는데, 시의 행간에 담긴 의미를 살리려 했다.
우리말로 바꾼 ‘합창’에 대해선 의미가 쉽게 와 닿는다는 긍정적 반응이 많았다. 현장에서 공연을 지켜본 작곡가 김형석은 “‘합창’ 교향곡은 들을 때마다 감정이 벅차오르는 곡인데, 듣다가 눈물 흘려보긴 이번이 처음”이라며 “가사의 의미가 제대로 전달돼 감정이입을 하게 된 것 같다”고 했다. 맨 앞 좌석에서 공연을 지켜본 바이올리니스트 한수진도 “원어인 독일어 딕션(발음)도 좋지만 우리말로 부르는 걸 들어보니 어색하지 않고 의미가 잘 들어온다”며 “앞으로도 우리말 공연을 자주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클래식 동호회 등에서도 우리말로 부른 합창이 공감을 불러일으켰다는 반응이 많다. 다만, 워낙 많은 연주자가 모인 연합 오케스트라여서인지 매끄럽지 못한 부분도 있었다. 4악장에선 악장 도중에 박수가 터져 나왔고, 4중창 부분에서는 연주가 엉키면서 지휘자가 연주를 잠깐 멈춰 세우고 뒤로 되돌아가 연주하기도 했다.
베토벤이 1824년에 완성해 5월7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초연한 이 작품의 본디 표제는 ‘환희(기쁨)에 부치는 송가’다. “‘실러의 시에선 ‘기쁨을 위해 기쁘게 달리라’는 이해 못 할 논리도 보여요. 기쁨이란 단어를 자유로 치환하면 모든 의문이 풀리죠.” 지휘자 구자범이 ‘환희’(Freude)를 ‘자유’(Freiheit)로 번역한 이유다. 실러가 원래 ‘자유의 송가’로 썼지만 군주정 시절 검열을 피하려고 ‘환희’로 단어를 고쳤을 것이란 주장은 이전부터 꾸준히 제기돼 왔다. 전례도 있다. 독일 베를린 장벽 붕괴 직후인 1989년 11월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은 베를린에서 ‘자유의 송가’란 제목으로 이 곡을 연주했다. 구자범은 “심혈을 기울였지만 번역에 아쉬움이 많다”며 “이번 시도가 누군가에게 자극이 되어 더 좋은 번역이 나오고 더 많은 이들이 베토벤의 정신성을 더 잘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독일 하노버 국립오페라극장 수석지휘자를 거쳐 광주시향, 경기 필하모닉을 이끌었던 지휘자 구자범에게도 ‘합창’ 교향곡은 이번이 ‘생애 첫 지휘’였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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