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가 글로벌 대안문화로 살아남으려면
제1회: 글로벌 시대의 한류와 세계 속 의미
국가 발전의 장기비전과 전략을 모색해온 ‘정책공간 포용과 혁신’이 단기적인 정책 쟁점뿐 아니라 향후 2050년까지 중장기적인 미래 어젠다를 발굴하고 제시하는 글을 <한겨레>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포용과 혁신은 2021년 창립된 민간 싱크탱크로서 진보와 보수의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 대한민국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위해 120여명의 진보적인 교수와 연구자들이 모인 정책공간입니다. 게재 글은 격주로 열리는 목요포럼의 발제와 지정토론을 중심으로 임채원 포용과 혁신 정책기획위원장(영국 에딘버러대 방문학자)이 맡습니다.
한류는 아시아 지역뿐만 아니라 유럽과 남미 등에서 상상 이상의 거대한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서구가 1960년대에 시작된 포스트 모더니즘 이후 새로운 담론을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글로벌 시대를 아우르는 새로운 문화 흐름의 가능성을 한류가 보여주고 있다. 영화, 드라마, 음악 등에서 한류가 시작되었지만, 앞으로 한류는 미술, 문학, 역사, 철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동아시아 르네상스로 새로운 세계적인 흐름을 형성할 것으로 조심스럽게 전망되고 있다.
지난 5월4일 줌 세미나를 통해 홍석경 서울대 교수(언론정보학)가 ‘글로벌 시대의 한류에 대한 의미와 전망’을 주제로 발표하고, 양현미 상명대 교수와 김영미 영국 에딘버러대 교수가 논쟁에 참여했다.
홍석경 교수
“한류현상, 즉 한국대중문화의 외국에서의 큰 인기와 그에 대한 현지 매체의 반응으로 한류라는 단어가 태어난지 23년이 넘었다. 한류를 이루는 미디어 산업의 발전이 1990년대 내내 활발했음을 고려할 때, 한류의 역사는 짧게는 25년, 길게는 30년에 이른다. 이 시간은 역사적으로는 매우 짧은 시간인데, 이 기간에 이루어진 놀라운 성과를 지나치게 확대하거나 부당하게 활용하고 어부지리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도 늘어가고 있다. 많은 해외 매체들은 이러한 빠르고 높은 성공엔 분명히 특별한 이유가 있으리라 전제하고, 정부의 문화산업 지원과 수출지원책이라는 손쉽고 부당한 설명을 찾아내어, 마치 소프트파워의 우수한 사례이고 공공외교 성공의 모델인 것처럼 그 특별한 비법을 알고자 한다. 이와 동시에 엔터테인먼트 기업의 지나친 매니지먼트와 경쟁상황이 젊은 연예인들의 인권을 위협한다고 비판한다. 이도 저도 아니면 오래된 황화의 담론에 기대어 아시아의 굴기를 못견디는 인종주의적 비판을 쏟아내기도 한다.
한국 대중문화가 보여주는 빌보드와 넷플릭스의 화려한 성적을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고, 드러난 모습으로만 한류를 접근해서는 그 메커니즘과 세계 속 의미가 잘 보이지 않는다. 지상파 방송의 매개로 동아시아에서 발생한 초기 한류 시기를 제외한 모든 것이 인터넷과 디지털문화 속에서 벌어졌기 때문에, 세상의 권력을 지닌 기성세대 엘리트들의 눈에는 한류가 갑자기 땅에서 솟아오른 무엇처럼 항상 의문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현실보다는 현실에 대한 희망을 담고 있는 정부의 여러 정책발표와 사후에 배달되는 경제수치들을 인과관계로 보면서 손쉽게 한류 정부지원설과 소프트파워를 논하고 있다.
글로벌 풀뿌리 현상으로서 한류
동아시아를 벗어난 세계 속 현상으로서의 한류는 철저히 풀뿌리 현상이다. 제도적 매개자들이 한국의 문화물을 자국으로 실어나르고 해설하고 소개한 것이 아니라 인터넷이 만들어낸 전지구적인 디지털문화 환경 속에서 세계의 시청자들이 자발적으로 자막을 달고 취향 공동체의 해설과 매개를 통해 전세계가 수용한 것이다. 이 과정의 주체는 당연히 세계화 과정 속에서 생성된 다문화 친화적인 감수성과 언어능력을 지닌 청년세대였다. 따스한 한국 드라마의 사람사는 이야기와 취향공동체를 구성하고 열렬하게 소비할 수 있는 최적의 종합선물세트를 제공하는 케이팝은 이 세계를 좀 더 잘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힘과 자원을 제공해 주었다. BTS가 이끈 케이팝의 대중화와 넷플릭스와 같은 글로벌 콘텐츠 플랫폼을 통해서 이 청년세대를 중심으로 했던 수용자 층이 점점더 확대되가고 있다. 비서구 글로벌 대중문화인 일본의 만화나 애니메이션과 달리 한류는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기존 서구산 대중문화가 제공하지 않는 새로운 인간관계를 구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인종과 젠더차원에서 보다 포용적인 담론을 제공하고 있다. 한국 대중문화의 혼종적 특성 또한 한류 창의산업이 세계의 여러 문화 트랜드를 적극적이고 포괄적으로 수용하고 표현할 수 있는 자유를 제공하고 있기도 하다.
한국 현대사의 맥락에서 한류가 이해되는 지점들
한국 대중문화의 성공에 숨겨진 레시피가 있을 것이라는 외국 언론과 학자들의 태도만큼이나, 한국 대중문화의 성공이 한국과 한국인의 우수성의 증거인 것처럼 이해하려는 움직임도 문제가 있다. 이것은 마치 미국 대중문화의 인기와 지배력이 그 헐리웃 문화의 우수성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것만큼이나 문화의 작동방식에서 먼 사고방식이다. 한국 대중문화의 성공은 독립된 스토리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스토리, 즉 식민지 경험을 지닌 개도국 출신의 분단된 작은 나라가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을 동시에 이루는 과정에서의 피, 땀, 눈물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세계사 속에 유니크한 한국의 위상을 맥락으로 한다. 한국의 대중문화는 빠른 경제성장의 상흔과 부작용, 모순들과 그것을 비판하고 극복하려는 태도를 담고 있다.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여러 해악을 미리 겪었으면서도 무디어진 서구사회에게도, 여러 가지 악에 신음하는 세계의 대다수 개발도상국 모두에게 압도적이지 않은 위안과 따스함과 스펙터클을 제공한다. 게다가 한국은 충분히 부와 군사력을 지니면서도 하드파워를 사용하려는 의지가 없는 소프트파워의 국가이다.
창의적 문화산업, 상호호혜성을 지닌 글로벌 대안문화로 성장해야
끝없는 노력과 경쟁 속에 생산되는 시끌벅적하고 따스하고 화려한 한국대중문화의 스펙터클이 현재 상승기운을 타고 있다. 한류역사의 초기에서부터 꾸준하게 여러 위기설이 생산되고 있지만, 이 성공은 한국인에게 표현의 자유를 가져다 준 민주주의의 성취와 창의적 문화산물 생산의 필수 조건인 한국인의 문화적 호기심과 고양이 유지되는 한 지속될 수 있을 것이다. 한류가 수용 현상이라는 점은 이 성공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가 겸허하고 상호호혜적이어야한다고 말한다. 지배적인 미국 대중문화를 향해 문화제국주의라고 외쳤던 우리의 경험을 잊지 않고, 한류가 제국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지 않는 대안적 문화로 남기 위해서 정부의 공공외교는 신중해야하고 문화 대기업들의 지나친 상업주의 위협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홍 교수의 주장에 대해 지정토론에 나선 양현미 교수는 정책차원에서 한류의 방향을 짚었다.
“한류는 기존 정부가 주도했던 경쟁과 선별 방식의 지원이 아닌, 문화 산업 자체의 저변이 넓어질 수 있도록 하는 장기적인 관점에서의 포괄적 지원책이 요구된다. 전 세계의 재능있는 작가와 문화예술인들이 한국을 거점으로 모여서 새로운 가치와 콘텐츠를 창출해내는 글로벌 탤런트 플랫폼이 되어야만 한류의 재생산이 가능할 것이다. 정부가 한류를 외교적이고 경제적 관점에서 활용하는 방식, 가령 정치인의 일방적 아티스트 동원, 케이팝 해외공연을 한국 경제와 관광 증진의 노골적인 홍보기회로 삼는 방식에서 벗어나, 품격있는 문화의 양식을 확산할 수 있는 세련된 방식이어야 한다. 한류가 지닌 고유한 가치와 존엄이 스스로 빛을 발할 수 있도록 하는 정부 차원에서의 장기적이고 문화하부구조 건설 방향의 적극적 지원이 현재 민간 영역이 이루어낸 한류의 높은 성과를 지속가능한 문화산업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
이에 대해 영국 에딘버러대에서 한국학을 가르치는 김영미 교수는 보다 직접적인 해외의 시각을 전했다.
“해외 대학에서 한국학을 가르칠 때 지금까지는 어려움을 많이 겪었지만, 한류 붐이 일어나면서 다양하게 도움을 받고 있다. 기존의 과목보다 아직 제도화되지 않는 음악, 영화, 드라마 등에 영국 학생들이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출입국 공무원들도 간단한 한국말로 입국하는 한국인들에게 호감을 보이고 있다. 해외에서 한국학을 연구하는 경우에 영어권 자료들이 가장 흔하게 범하는 오류가 한류가 한국정부의 주도적인 지원 정책의 결과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는 기존 영어 논문들이 이런 오류를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류에 관한 제대로 된 영어 자료가 보다 많이 만들어지고 배포되기를 바란다.”
한류는 유럽 등 세계 각지에서 뚜렷한 흐름을 형성하기 시작했지만, 이 흐름이 지속가능할 지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의문들이 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한류는 처음부터 정부 주도적인 사업이 아니라 아래부터 시작된 풀뿌리 문화현상이며, 관주도의 문화정책은 덕이 아니라 독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한류는 영화, 드라마, 음악 등의 대중 문화에서 시작되었지만, 미술, 문학, 역사, 철학 등으로 확대되어 갈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이 개발독재 시대와 같은 정부주도의 정책이 아니라, 다양한 아티스트가 글로벌 팬덤과 함께 자발적인 세계적 조류를 형성해야 한다는 점이다. 21세기 글로벌 시대에 대한민국의 국가전략도 산업화 시대와 근본적으로 다른 접근이 시대적인 요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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