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 외환보유액 4266억달러는 대외 충격을 막기에 충분할까
작년 외환보유액 459억달러 급감 ‘사상 최대’
이창용 “IMF서 韓 외환보유액 적다는 사람 없다”
경상수지 적자에 한·미 금리차 역대 최대
“외환시장 불안 요인 많아 예의주시해야”
최근 달러 대비 원화 환율이 1340원까지 뛰면서 우리나라가 경제의 방파제 역할을 하는 외환보유액을 충분히 보유하고 있는지를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달 기준 우리나라 외환보유액은 4266억8000만달러다.
일각에서는 한국의 외환보유액이 국제통화기금(IMF)이 권고하는 적정 수준을 3년째 밑돌고 있다면서 외환보유액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난해 외환보유액이 연간 기준으로 역대 최대인 458억6700만달러 줄어들자 일부 시장 관계자들은 ‘환율 방어의 총탄’으로 불리는 외환보유액이 말라가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를 제기했다. 이에 대해 한국은행과 기획재정부는 “IMF는 한국 외환보유액 규모가 외부 충격 대응에 적정하다고 평가했다”면서 지금도 충분한 수준이라고 반박해왔다.
양측 모두 IMF의 권고나 평가를 인용했지만, 적정 외환보유액에 대한 의견은 서로 다르다. 외환보유액이 위기 상황에서 안전판 역할을 제대로 하려면 어느 정도 규모가 적당할까.
◇ 외환위기 때 순식간에 바닥난 외환보유액…2018년 4000억달러 돌파
8일 한국은행 등에 따르면 외환보유액은 중앙은행이나 정부가 국제수지 불균형을 바로잡거나 외환시장 안정을 위해 언제든 사용할 수 있도록 보유 중인 대외지급준비자산이다. 정부는 원·달러 환율이 급등할 때 시장에 달러를 매도하는 방식으로 원화 가치 방어에 나서는데, 이때 외환보유액을 실탄으로 활용한다. 일종의 ‘외화 비상금’이다.
외환보유액은 재정건전성과 함께 국가신인도를 떠받치는 양대 축이기도 하다. 외환보유액이 넉넉하면 그만큼 국가의 지급능력이 좋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국가신인도가 높아진다. 국가신인도가 올라가면 기업과 금융기관의 해외 자본 조달 비용이 낮아지고, 외국인 투자를 촉진하는 효과가 나타난다.
한국은 ‘외환위기 트라우마’로 외환보유액 감소에 유독 민감하게 반응하는 경향이 있다. 1997년 외환위기도 외환보유액이 바닥나면서 발생했다. 당시 누적된 경상수지 적자로 원·달러 환율이 1900원을 넘어섰고, 정부가 원화 가치를 방어하기 위해 외환보유액을 소진했다. 그 결과 외환보유액은 1997년 말 39억4000만달러까지 쪼그라들었다. 이후 외국인 자본이 더 빠르게 이탈했고, 결국 정부는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외환위기라는 뼈아픈 경험을 통해 외환보유액이 국가 경제의 방파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정부는 이후 외환보유액을 꾸준히 늘려왔다. 외환보유액은 2001년 9월 1000억달러를 넘어섰고 2005년 2월 2000억달러대로 올라섰다. 이후 2011년 3000억달러를 넘어섰고, 2018년 말 처음으로 4000억달러를 돌파했다.
이렇게 꾸준히 증가해온 외환보유액이 지난해 이례적으로 감소하면서 적정 외환보유액 논란이 불거졌다. 외환보유액은 지난해에만 458억6700만달러 급감했는데, 이는 연간으로는 역대 최대 감소폭이다. 지난해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공격적인 금리 인상으로 달러화가 초강세를 보이고 환율이 치솟자, 외환당국이 환율 안정을 목표로 시장에 달러화를 순매도한 영향이다.
지난해 말 4231억6000만달러 수준으로 줄어들었던 외환보유액은 올 들어 달러화가 약세로 돌아서면서 다시 증가했다. 지난 4월 기준 우리나라 외환보유액은 4266억8000만달러로, 세계 9위 수준이다.
◇ “IMF 권고는 신흥국 대상…한국은 신흥국 단계 넘어서”
정부와 한국은행은 물론, 경제학자들도 한 국가의 적정 외환보유액 규모에는 정답이 없다는 데 동의한다. 국가마다 사정이 다 달라 모든 국가에 일률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보편적인 기준은 없다는 것이다.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기준이 없기 때문에 시장에서는 주로 IMF나 국제결제은행(BIS) 등 국제기구의 권고안을 참고한다.
IMF가 집계하는 외환보유액 적정성 평가지수(ARA)가 대표적이다. 이 지수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의 ARA는 97%로 집계됐다. IMF는 연간 수출액의 5%, 시중통화량의 5%, 유동 외채의 30%, 외국환 증권 및 기타투자금 잔액의 15% 등을 합한 규모의 100~150% 수준을 적정 외환보유액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 기준으로 보면 한국의 외환보유액은 3년 연속 적정 수준을 밑돌았다.
그러나 IMF ARA는 외환보유액 적정 수준을 평가하는 여러 평가 지표 중 하나일 뿐이라 이 기준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기 어렵다는 게 외환당국의 입장이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지난해 8월 금융통화위원회 직후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제가 IMF에서 왔다”며 “IMF 어느 직원도 우리나라에 와서 150%까지 외환보유액을 쌓으라고 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나라 외환보유액 규모가 전 세계 9위로 크기 때문에 해당 기준이 의미가 없다”며 “150% 기준은 신흥국을 대상으로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실제 IMF는 ARA와 같은 정량평가 외에도 한 국가의 외환제도, 자본자유화와 경제 발전 정도, 외채구조 등 정성평가를 통해서도 국가별 적정 외환보유액을 가늠한다는 게 외환당국의 설명이다. 실제 IMF는 지난해 발간한 대외부문보고서(External Sector Report)에서 종합적으로 봤을 때 한국의 외환보유액이 “외부충격에 대응하기에 적정한 수준”이라고 진단했다. 국제신용평가사 피치 역시 지난해 급감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외환보유액이 충분한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IMF ARA는 외환 유출 위험이 높고 위기에 취약한 신흥국에게 권고하는 기준인데,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순대외금융자산이 7000억달러를 넘어섰고 대외 건전성도 높아졌기 때문에 신흥국 단계는 지났다”며 “선진국은 이 기준으로 적정 외환보유액을 평가하지 않을 뿐더러 실제 이 기준을 적용하면 대부분 100~150%에 못 미친다”고 했다. 한국은 경제·금융 구조가 외환위기 당시과 비교하면 많이 좋아졌기 때문에 신흥국 대상으로 만든 기준을 따를 필요가 없다는 설명이다.
크리슈나 스리니바산 IMF 아시아태평양국장은 지난 4일 인천 송도에서 열린 아시아개발은행(ADB) 연차총회에서 “한국 외환 보유액은 국내총생산(GDP)의 20%를 넘는 수준이고 거시경제 기초 체력도 탄탄하다”면서 “(IMF ARA는) 신흥국을 대상으로 한 발표 기준이며, 한국의 외환보유액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 “경상적자·한미 금리차 확대로 외환시장 불확실성 커져”
외환당국과 학계의 의견을 종합해보면, 현재 외환보유액(4266억8000만달러)은 부족하다고 보기 어렵다. 그러나 외환보유액의 적정 수준이 각 국가가 처한 상황이나 기초체력에 따라 유동적으로 바뀔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안심할 수만은 없다는 의견도 나온다.
특히 수출 부진으로 한국 경제의 대외건전성을 나타내는 경상수지가 올 들어 47억달러 적자를 기록하면서 경기 불확실성이 커진 상태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의 금리 인상으로 한미 금리 역전폭이 역대 최대인 1.75%포인트로 벌어지면서 자본 유출 우려가 커진 것도 외환시장 불안을 키울 수 있는 변수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외환보유액은 어느 수준 이상이면 적정하고 어느 수준 이하면 부족하다고 단순히 평가할 수 없다”며 “어떤 나라가 IMF 권고 수준을 초과할 정도로 외환보유액을 쌓아놓았어도 급격한 외환 유출이 불가피할 정도로 대내외 여건이 악화된 상황이라면 외환시장 안정에 필요한 외환보유액이 충분하지 못했다고 봐야 한다”고 했다.
그는 “우리나라는 현재 한미 금리 격차 확대로 원화 가치가 하방 압력을 받고 있는 데다, 무역수지와 경상수지가 부진해 외환을 획득하는 데 어려움이 있어 외환시장이 계속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며 “이런 국면에서는 외환시장 상황은 물론, 외환보유액 증감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이상원 국제금융센터 부전문위원은 “외환보유액은 금융안전망의 핵심 요소이며, 위기 발생 시 가장 빨리 사용할 수 있는 수단”이라며 “글로벌 경기 둔화, 지정학적 불안 등 위기 발생 가능성에 대비해 외환보유액 확충, 역내 금융협력 확대 등 금융안전망 강화를 위한 노력을 지속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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