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애 마지막 책”… 구순 앞둔 ‘최초의 여성 박물관장’이 들려주는 박물관 이야기

이소연 기자 2023. 5. 8.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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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여태 쓴 책이 10여 권 정도 되는데, 전부 전문가들을 위한 학술 책이었어요. 나는 그동안 누구를 위해 글을 쓴 건가. 내 생의 마지막 책은 관장이나 큐레이터가 아닌 유물을 사랑하는 할머니로서 아이들을 위해 쓰고 싶었어요. 나의 지식이 아니라 경주박물관에 얽힌 나의 추억을 담아서요." 최초의 여성 학예연구사, 최초의 여성 학예연구관, 최초의 여성 국립경주박물관장.

이 전 관장은 "일부러 유물 이야기를 전하며 샛길로 많이 샜다. 구순을 앞둔 지금 돌이켜 보니 내가 경주와 경주박물관을 사랑했던 건 지식이나 학문 때문이 아니라 그곳에서 느끼고 겪었던 추억 때문인 것 같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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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이난영 전 국립경주박물관장. 통천문화사 제공
“내가 여태 쓴 책이 10여 권 정도 되는데, 전부 전문가들을 위한 학술 책이었어요. 나는 그동안 누구를 위해 글을 쓴 건가…. 내 생의 마지막 책은 관장이나 큐레이터가 아닌 유물을 사랑하는 할머니로서 아이들을 위해 쓰고 싶었어요. 나의 지식이 아니라 경주박물관에 얽힌 나의 추억을 담아서요.”

최초의 여성 학예연구사, 최초의 여성 학예연구관, 최초의 여성 국립경주박물관장. 1957년 서울대 사학과를 졸업한 뒤 국립박물관에서 일하며 늘 ‘최초’의 기록을 썼던 이난영 전 국립경주박물관장(89)은 6일 전화인터뷰 내내 ‘마지막’이라는 말을 자주 꺼냈다.


이 전 관장은 최근 펴낸 신간 ‘박물관에서 속닥속닥’(진인진)에 대해 “내 생의 마지막이자 은퇴 이후 30년을 정리한 책”이라고 했다. 2012년 출간한 ‘한국 고대의 금속공예’(서울대학교출판부) 이후 11년 만에 펴낸 이 책에는 그가 1986년부터 1993년까지 관장을 지낸 국립경주박물관 속 유물에 얽힌 추억들이 빼곡히 담겼다.

이 전 관장은 “일부러 유물 이야기를 전하며 샛길로 많이 샜다. 구순을 앞둔 지금 돌이켜 보니 내가 경주와 경주박물관을 사랑했던 건 지식이나 학문 때문이 아니라 그곳에서 느끼고 겪었던 추억 때문인 것 같다”고 했다. ‘경주 분황사모전석탑 사리장엄구’를 소개하며 그가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 경주박물관에서 이 유물을 처음 본 순간을 들려주는 식이다. 당시 전시장에는 경주 분황사모전석탑 사리장엄구에서 나온 가위, 동전, 집게, 은합 등이 함께 전시돼 있었는데, 그의 눈에 띈 유물은 그 중 가장 작은 ‘금·은제바늘’이었다고 한다. 훗날 국립경주박물관장 소속으로 이 금·은제바늘을 재조사한 인연을 덧붙이며 “1000년이 넘는 시간이 흐르도록 완형을 유지한 이 유물은 당대 신라의 바늘 제작기법이 얼마나 완벽했는지를 대변한다”고 예찬했다.

젊은 시절 이난영 전 국립경주박물관장. 통천문화사 제공

이 전 관장이 “성덕대왕신종보다도 더 사랑한다”고 고백한 신라의 유물은 토우(土偶·흙으로 만든 사람이나 동물상)다. 토우는 한때 박물관을 떠나고 싶었던 그를 사로잡은 유물이다. 이 전 관장은 “발굴조사를 나가면 나 혼자 여자라 방을 차지한다고, 여자라서 힘을 쓰지 못한다고 늘 현장 작업에서 소외되곤 했다”며 “‘그냥 고등학교 선생님을 할 걸’ 후회하던 때 내 나름대로 박물관에서 살 길을 찾았다. 그 길이 바로 유물 창고 관리였고, 그때 창고에서 만난 게 신라의 토우였다”고 회고했다. 이 전 관장은 2000년 ‘신라의 토우’(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06년 ‘토우’(대원사) 등 자신의 토우 연구 성과를 담은 저서를 퇴직 후 출간하기도 했다.

“토우는 조그맣잖아요. 내가 다루기 쉬웠죠. 토우가 담긴 유물 상자 하나만 내게 주면 하루 종일 들여다보며 연구했어요.”

2009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를 나누는 이난영 전 국립경주박물관장의 모습. 동아일보 DB

2020년 초 무렵 이 책을 집필하면서 틈틈이 토우와 관련한 신간 초고를 집필해왔지만 아쉽게도 빛을 볼 수 없게 됐다. 이 전 관장이 지난해 7월 낙상으로 더 이상 거동을 할 수 없어 요양병원에 머물게 되면서다. 이 때문에 ‘박물관에서 속닥속닥’을 펴내는 데에도 3, 4년이 걸렸다. 이 전 관장은 “몸이 아파서 더는 못 쓰겠다 싶을 때마다 국립경주박물관 소속 직원들이 나를 찾아와 자료와 도판을 내밀며 계속 글을 쓸 수 있게 도왔다”며 “박물관을 떠난 지 30년 가까이 됐는데도 나를 관장이라고 불러주는 후배들의 말 덕분에 마지막 힘을 쥐어 짜낸 것 같다”고 했다.

“다시 태어나도 박물관에서 일하고 싶다”는 이 전 관장은 끝으로 자신의 책을 읽을 독자들에게 “박물관에 가 달라”는 부탁을 남겼다. “내 책을 읽고 더 많은 이들이 박물관을 찾아준다면 그걸로 내 할 일은 다 한 것 같아요.”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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