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프] '마약과의 전쟁'이 놓치고 있는 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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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미국에서 중독 정신과 전문의로 일하고 있습니다. 외래 환자의 절반 정도는 중독 문제가 있는 환자들이고, 나머지 절반은 중독 이외의 문제로 병원을 찾아온 경우입니다. 하지만 실제 임상 현장에서 이와 같은 분류는 크게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중독 문제를 가진 환자 중에 굉장히 많은 수가 정신 질환을 앓고 있고, 또 정신 질환을 앓는 많은 환자도 알코올이나 마약으로 스스로 우울 증상이나 불안을 달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가령 정신 질환을 앓는 사람은 열 명 중 세 명꼴로 알코올 혹은 약물 중독을 함께 앓습니다. 또 정신 질환 중 가장 흔한 우울증 환자의 경우, 우울증이 없는 사람보다 중독 위험이 두 배 이상 높습니다.
다른 정신 질환과 마찬가지로 중독 환자의 치료에 따르는 가장 큰 장벽은 중독 환자와 중독 치료를 향한 사회의 낙인입니다. 다른 정신 질환의 경우, 뇌의 생물학적 기전이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점점 알려지면서, 또 수많은 정신과 환자와 가족, 전문가들의 노력으로 낙인이 조금이나마 줄어들었지만, 유독 중독에 관해서만큼은 여전히 '의지의 문제' 혹은 '도덕성의 문제'로 보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중독만큼 뇌의 기전이 잘 밝혀진 정신 질환은 드뭅니다. 오늘 소개한 칼럼에도 언급됐듯 흔히 중독 환자의 뇌는 '하이재킹(hijacking)당했다'는 표현이 쓰입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마치 비행기(몸)의 조종석(뇌)을 '약물' 혹은 '술'에 점령당한 것 같은 행동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한 번 형성된 인간의 중독 회로는 매우 강력해서 '의지'만으로는 벗어나기 매우 힘듭니다.
[ https://premium.sbs.co.kr/article/btEvV8FElV ]
처벌만 강조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최근 한국에서도 마약 문제가 매우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마약 사범은 2018년 1만 2천 명에서 2022년 1만 8천 명으로 늘어나며,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급기야 정부는 지난해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하며 마약 수사에만 80억 원을 배정하는 등 처벌과 단속, 예방 교육 등에 편성된 예산을 대대적으로 늘렸습니다.
하지만 많은 부문 예산이 늘어나는 와중에 중독 환자에 대한 치료나 재활 비용은 증액 대상에서 빠졌습니다. 올해 마약 중독 환자에 대한 치료와 재활에 배정된 예산은 4억 원에 불과합니다. 연간 1만 5천 명을 훌쩍 넘은 마약 사범의 재범률이 40%에 육박하는 것을 고려하면, 4억 원은 터무니없이 부족한 금액입니다. 전국에서 실질적으로 마약 환자를 치료하는 병원은 두 곳뿐입니다.
칼럼을 쓴 마야 찰라비츠는 "처벌에만 집중하는 방법이 오히려 역풍만 불러오고 실패"한다고 지적합니다. "마약만이 지금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유일한 출구로 믿는 사람을 단지 처벌하고 세상과 격리함으로써 큰 고통을 주면 이들 안에서 마약을 더 빨리, 더 많이 하고 싶다는 욕구만 늘어난다"는 거죠.
사회에 이로운 수치심과 파괴적인 수치심
물론 중독의 일차적인 책임은 개인에게 있으므로, 지은 죄에 대해 응당한 처벌을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마약을 한 당사자를 아무런 사회적 비판 없이 무조건 수용하는 것은 개인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사회 전체적으로 마약 사용이 늘어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약 사범에게 무작정 수치심을 주고, 법적 처벌만 강화한다고 해서 우리 사회의 중독 문제가 해결될까요?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도파민 네이션>의 저자이자, 스탠퍼드 중독 정신과 전문의인 아나 렘키 교수는 수치심을 "사회에 이로운 수치심(prosocial shame)"과 "파괴적인 수치심(destructive shame)"으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사회에 이로운 수치심이란, 대상자가 되는 개인을 비판하되 공감하는 태도로 수용(acceptance)하고,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갈 수 있게 다음 단계를 제시해 주는 것입니다. 마약 중독 문제가 생긴 경우에는 사회적 비판과 법적 처벌 이후, 중독 치료와 재활을 받을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이로운 수치심을 활용하는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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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서 소개한 '비난보다는 책임감'을 묻는 것도 "사회에 이로운 수치심"과 일맥상통하는 접근법입니다. 결과적으로 개인은 치료와 재활을 통해 마약 사용을 줄이고, 공동체로 돌아올 수 있게 됩니다. 반면에 파괴적 수치심이란, 비난만 하고 당사자를 사회에서 밀어내는 겁니다.
마약 문제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도 파괴적인 수치심보다는 사회에 이로운 수치심을 주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약을 단순히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고, 치료와 재활의 선택지를 지금처럼 차단하면, 마약에 중독된 사람들은 사회로 돌아오지 못하고 음지로 숨어들 것이고, 결국 우리 사회의 마약 문제는 나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심영구 기자so5what@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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