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시다, 사과 대신 “가슴 아프게 생각”…진전은 있었지만 채워지지 않은 물컵
총리아닌 개인 심경, 강제동원 언급없어
고도의 정치 언어...정치적 부담 최소화
12년 만에 일본 총리가 방한하면서 관심이 쏠렸던 과거사 문제에 대한 사죄와 피고 기업의 기여는 없었다. 한국 정부가 강제징용 배상 문제를 ‘제3자 해법안’으로 반을 채운 물컵에 일본 측의 ‘성의 있는 호응 조치’는 여전히 비어있는 셈이다.
다만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는 ‘개인 심정’을 전제로 “가슴 아프다”고 밝히면서 ‘법적 책임’을 인정할 경우 수반되는 책임을 피하고 자국 내 정치적 비판을 최소화하면서 한국에 성의를 표현하는 외교력을 보이기 위한 고도의 정치적 발언을 내놓았다.
기시다 총리는 7일 대통령실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 후 공동기자회견에서 “지난 3월 윤 대통령께서 방일하셨을 때, 저는 1998년 10월에 발표된 일한(한일) 공동선언(김대중-오부치 선언)을 포함해 역사인식과 관련된 역대 내각의 입장을 전체적으로 계승하고 있음을 명확하게 말씀드렸다”며 “이 같은 정부 입장은 앞으로도 흔들리지 않는다”고 밝혔다. 지난 3월16일 도쿄 한일 정상회담에서 발표한 내용과 동일하다.
“역사 인식과 관련된 역대 내각의 입장을 전체적으로 계승하고 있다”는 입장은 한국 정부가 지난 3월6일 강제동원 해법안을 발표한 이후 일본 정부가 일관되게 밝혀온 공식 입장과 같다. 이는 ‘미래 세대에게 사죄의 숙명을 지게 할 수는 없다’는 2015년 8월 아베 담화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 발언을 재확인한 수준이다. 결과적으로 ‘통렬한 반성과 사과’에 대한 명확한 언급 없이 기존 입장을 되풀이한 것이다.
다만 기시다 총리는 “많은 분들이 과거에 아픈 기억을 되새기면서도 미래를 위해서 마음을 열어주신 데 대해 감명을 받았다”며 “저도 당시 어려운 환경 속에서 일을 하게 된 많은 분들이 힘들고 슬픈 경험을 하신 데 대해서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기시다 총리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 일하게 된 많은 분들’이 강제동원 피해자들을 지칭하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에 확답하지 않은 채 “제 자신의 심정을 솔직하게 말씀드린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 총리가 발표하는 정부의 공식입장은 아니지만, 개인적인 자격으로 감정을 표현한 것이다.
이는 기시다 총리의 정치적 부담을 최소화하면서 자신의 언어로 새로운 메시지를 우회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고도로 다듬어진 표현으로 평가된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윤 대통령에게 감사하다고 표현한 ‘정치적 용기’와 ‘개인적인 헌신’을 모두 담으려고 노력한 모습이 역력하다. ‘강제동원’ 문제를 언급하지 않고, 직접 사죄와 반성의 표현도 사용하지 않으면서 감정을 표현해 한일 양국 내 제기될 수 있는 비판을 모두 감수하거나 피해갈 수 있는 수위의 표현이다.
이원덕 국민대 교수는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은 아니지만 강제동원 문제와 관련해 위로와 공감을 표현했다는 것은 진전된 언급이라고 볼 수 있다”며 “법적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선긋기를 하면서 일본의 여론과 한국 국민들의 요망 사이에서 일종의 ‘줄타기’를 하면서도 개인적으로는 유감을 표명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이어 “한미일 공조에서 약한 고리인 한일 관계를 위해 윤 대통령의 결정에 대한 바이든 대통령의 평가에 무언의 압력을 받았을 것”이라며 “미국에도 화답하고 한국에도 호응해야 하는 점에서 고심에 찬 발언이었다고 본다”고 밝혔다.
윤 대통령은 소인수 회담에서 기시다 총리의 해당 발언을 듣고 “한국이 먼저 요구한 바 없는데 진정성 있는 입장을 보여주셔서 감사하다”며 “이것은 한일 미래 협력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화답했다. 윤 대통령은 이번 기자회견에서 “과거사가 완전히 정리되지 않았다고 해서 현안과 미래 협력을 위해 한 발짝도 발걸음을 내딛어선 안 된다는 인식에서는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최종건 전 외교부 차관은 KBS라디오 ‘최경영의 최강시사’와의 인터뷰에서 “기시다 총리 입장에서는 2015년 12월 외무상으로 방한해 위안부 문제에 대한 불가역적 해결을 하는 합의를 했고, 윤석열 정부 들어 강제징용 문제 해결을 일본 정부의 비용 지불 없이 문제를 해결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최 전 차관은 기시다 총리의 발언에 대해 “한국으로서는 상당히 부족하지만 자신(기시다 총리)은 성의를 다했다고 국제사회에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최은지 기자
silverpaper@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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