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무대서 크로즈니가 찍은 쉼표, 마임
독창적 연기·반전 묘미 채워
“잠깐의 휴식과 웃음이 되길”
“한국에선 손으로 숫자를 셀 때 어떻게 하나요?”
마임 아티스트 이레네우스 크로즈니(55·Ireneusz Krosny)는 전 세계로 공연을 다닐 때마다 빼놓지 않고 하는 질문이 있다. 그 나라에서 숫자 세는 법과 인사 하는 법에 대한 물음이다. 한 마디의 말도 없이 수많은 사람들을 울고 웃게 하는 무언극의 주인공인 그에게 각 나라의 문화적 특성과 관습을 알아가는 것은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첫 번째 관문이다.
“호모 사피언스로서 우리는 저마다 다른 바디 랭귀지를 가지고 있어요. 어떤 나라에선 아무렇지 않은 표현이 또 다른 나라에선 실례가 될 때도 있죠.”
이레네우스 크로즈니가 10여년 만에 한국을 찾았다. 폴란드 최고의 코미디언이자 전 세계를 무대로 활약하고 있는 마임 아티스트인 그는 지난 5일과 6일 올해로 18회를 맞은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 무대를 통해 한국 관객과 만났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클래식 축제에서 마임을 접목한 공연을 선보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폴란드에서 스무 시간의 비행 후 도착한 첫날 서울 인사동에서 만난 크로즈니는 “음악 축제에서의 마임은 공연 중간의 쉼표 같은 시간”이라며 “클래식 음악만 듣다가 특별한 순간이 나올 때 사람들은 더 큰 재미를 느낀다”고 말했다.
너무도 다른 두 장르의 결합처럼 보이나, 크로즈니는 ‘정통파’ 마임 아티스트라는 점에서 고전 음악의 지향점과도 닮았다. 크로즈니가 추구하는 무대의 구성과 의상이 ‘마임의 본질’에 가깝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제 공연은 클래식한 형태를 갖추고 있어요. 까만 커튼이 내려온 무대에 까만 옷을 입은 사람이 올라와 하얀 조명을 받으며 혼자 마임을 하죠. 누군가는 얼굴에 하얗게 분장을 하기도 하지만, 전 보다 자연스럽고 클래시컬한 무대를 꾸미고 있어요. 고전 음악과 비슷하죠.”
크로즈니의 무대는 친절하다. 불필요한 장치를 걷어낸 무대에 올라와 팻말을 들고 연기할 마임의 제목을 알려준다. 이야기의 소재는 다양하다. ‘공연장 안에서’, ‘시지프스’, ‘보스가 집으로 초대하다’, ‘번지점프를 하다’, ‘화가와 초상화’ 등 셀 수 없다.
동영상 플랫폼 유튜브에 올라온 크로즈니의 팬터마임 영상 중 ‘춤의 진화’는 178만 조회수를 기록할 만큼 인기가 많다. 깃털처럼 가벼운 몸짓으로 선보이는 다양한 춤사위가 예사롭지 않다. 코미디언이 만들어내는 웃음 포인트에 전문 춤꾼을 능가하는 리듬 감각이 더해졌다. 짧게는 1분, 길게는 8분에 달하는 다양한 이야기를 엮어 만든 무대는 비범한 창의력이 꽉 채워진다. 그는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위해 그때 그 때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적어두면서 마임을 만든다”고 했다. 그렇게 적어둔 아이디어 노트가 A3 크기로 세 권에 달한다.
크로즈니가 마임을 처음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때였다. 15초 분량의 범죄 소재 팬터마임을 본 이후 “나도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지금의 길로 이끌었다. 한국 나이로는 열네 살. 폴란드에선 초등학생이었던 크로즈니는 15~25세의 학생들로 구성된 팬터마임 그룹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 그룹의 유일한 ‘초딩’이었다고 한다.
1982년 마임의 세계에 첫발을 디뎠고, 여러 팬터마임 그룹을 거친 뒤 1992년부터 본격적인 솔로 활동을 시작했다. 1995~1996 시즌 폴란드에서 열린 세 개의 코미디 페스티벌을 모두 석권한 그는 전 세계에서 사랑받는 마임 아티스트가 됐다. 세계 3대 코미디 페스티벌 중 하나인 몽트뢰 국제 코미디 페스티벌에서 ‘황금 장미’를 수상하기도 했다.
어느덧 40년째 마임 아티스트로 활동 중인 그는 “마임을 하기 위해선 신체의 건강함과 관절의 유연함이 필수 요소”라고 강조했다.
“무대에선 웨이브를 하는 것처럼 손을 움직이고, 목을 돌리는 등 평상시엔 자연스럽지 않은 행동과 움직임을 보여줘야 해요. 팬터마임을 잘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있다면 첫 번째는 건강이에요. 두 번째론 테크닉을 알아야 하고, 세 번째론 연기를 할 줄 알아야 하죠.”
크로즈니의 강점 역시 독창적인 연기 스타일이다. 기존의 마임 배우들의 연기 기법에서 벗어나 이해하기 쉬운 무대를 보여준다. 검은 의상을 입고 얼굴 분장을 하지 않는 것도 “연기 이외의 요소로 극에 집중하는 것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다.
무대에서 펼쳐내는 이야기는 방대하다. 사회의 부조리를 파헤치는 드라마부터 추상적인 개념을 구체화하는 마임까지 선보인다. 특별한 메시지를 담지 않고, 삶의 무게를 잊게 만드는 웃음을 통해 마법 같은 순간도 만든다. 그는 “초반 10년 정도는 드라마에 치중했는데, 이후 코미디로 넘어오며 관객들이 더 좋아한다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힘든 일상을 보내는 사람들은 슬프고 진중한 것보다는 재밌고 즐거운 이야기를 더 보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는 것이다.
무대로 가져온 평범한 이야기엔 ‘반전의 묘미’가 담긴다. ‘휴일을 맞은 사업가’ 이야기에선 휴양지를 찾은 사업가의 모습을 보여주다가, 난데없이 전화를 받고 출근하는 장면을 그린다. “고단한 사업가의 상상 속 휴가였다는 것을 표현한 거예요. 매번 그럴 수는 없지만, 각각의 이야기마다 깜짝 놀라게 하는 반전과 강력한 엔딩을 중요한 장치로 생각하고 있어요.”
탁월한 연기로 빚어내는 그의 작품은 수많은 질문을 던진다. ‘음악가게 안의 록 뮤지션’ 이야기를 통해 “스스로를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타인에 대한 이해”의 과정을 거치고, ‘번지점프’ 이야기를 통해 “죽을 수도 있는 익스트림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들의 심리”를 들여다 본다.
“마임은 아무 것도 없는 빈 무대 위에서 세상을 창조해나가는 예술이에요. 이 예술을 나이와 국적을 떠나 모두가 쉽게 이해하면서도 제 안의 감정을 충분히 전달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한국인들은 너무나 일을 열심히 하는 워커홀릭이잖아요. 마임 공연이 잠깐의 휴식과 웃음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고승희 기자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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